58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쥐 떼라고?”
“네.”
동향을 살필 겸, 호감도도 올릴 겸, 시우를 찾아와서 이것저것 대화하고 있는데 또 불쑥 아테올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목적이 있었다. 리테바에 쥐 떼가 나타나서 시민들이 고충을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쥐 떼가 나타났는데 나를 왜 찾아. 피리 부는 사나이나 찾지.”
아테올은 고개를 갸웃했고, 시우는 그저 농담인 줄 알았는지 킥킥 웃었다. 아테올이 웃는 시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모처럼이니 그대도 같이 가지.”
“아…… 네, 네? 저요?”
“그래. 리테바는 멀지도 않으니까.”
“잠깐, 시우를 왜?”
가서 기회 잡아서 해치우려는 건 아니겠지? 눈을 부라리며 쳐다보았지만 아테올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시우도 궁에만 있어서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저도 데리고 가주시나요?”
시우가 눈을 빛냈다. 은근히 외출이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서서 적극적으로 말릴 수가 없었다. ‘진정해, 얘가 지금 너 죽이려고 데리고 가는 거란 말이야!’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당황해서 작게 고개를 젓는 내 반응을 은근슬쩍 무시하며 아테올이 말을 이었다.
“칼레우스에게서 들어온 보고입니다. 쥐가 떼 지어 다니는 건 흔한 일이지만, 그 움직임이 비상식적일 정도로 일사불란하다고요. 분명 쥐의 머리가 있을 겁니다. 그 머리는 높은 확률로 마물이고.”
칼레우스는 황태자 자리에서 물러난 후로도 기존의 업무를 그대로 하고 있었다. 게다가 황후가 해야 할 일까지 도맡았다. 무급으로. 리테바는 일종의 계획 지역으로, 난민과 극빈층을 수용해 그들의 생활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국가가 관리하는 도시였다. 조금만 관리를 잘못해도 곧바로 결과가 드러나면서 예산은 많이 들어 골치가 아픈 곳이었는데, 칼레우스가 이번에 그곳까지 추가로 맡게 되었다. 정신없이 바쁘게 만들어서 다른 생각은 하지도 못하게 하는 게 아테올의 계획인가 싶었다.
“다른 준비가 필요하십니까? 바로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테올이 말했다. 이런 화법 마음에 안 든다. ‘안 해도 되지?’를 돌려 말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일부러 옷을 갈아입고 갈 거라고 버텨 마탑에 들러서 세르타를 달고 나왔다.
세르타가 따라오는 걸 본 아테올의 표정이 미미하게 흐려졌다.
“호위는 제가 해드릴 텐데요.”
“너는 네 할 일이 있을 테니까.”
“아……. 그 일을 허락하시는 겁니까?”
“……아니?! 아니야!”
젠장, 본전도 못 찾았다. 하마터면 ‘호위는 세르타가 맡고 있으니 너는 시우 죽이는 데 전념해!’라고 말하는 꼴이 될 뻔했다. 혼자 가겠다고 말하자 세르타는 내게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아테올에게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조용히 물러났다. 아테올도 이렇게 고분고분하면 얼마나 좋아.
리테바는 수도를 둘러싼 도시 중 하나였기에 마차로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수도를 빠져나와서 경계를 조금 지나자 곧 아기자기하게 잘 정돈된 도시가 나왔다. 이번에도 시장이 다급하게 뛰쳐나와 반겨주었다.
“매번 이렇게 버선발로 뛰쳐나올 필요 없는데.”
“버선이 뭡니까?”
혼자 중얼거린 건데 어떻게 들었는지 아테올이 물었다.
“맨발로 뛰쳐나온다고.”
“……신발을 신었는데요.”
한국어 관용구 같은 건 번역이 됐다 말았다 하나? 어째 자기 편할 때만 되는 기분이었다. 설명 없이 입을 다물자 아테올도 더 묻지는 않았다.
쥐 떼는 밤에만 나타난다고 한다. 밤이 될 때까지 공관에 머물기로 하고 들어가는데, 아무래도 아테올이 신경 쓰였다. 그가 시우를 몰래 불러내 처리해 버리면 어쩌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 불려 나가 끔찍한 결말을 맞게 된다면……. 음.
“시우.”
결국 내 선택은 이렇게 되었다.
“산책하러 나갈까?”
“네? 저, 저하고요?”
시우는 깜짝 놀랐고 아테올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 속셈이 훤히 보인다는 얼굴이었다. 무시하고 시우와 함께 거리로 나섰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는 어디를 가나 쥐 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쥐가 몇 천 마리는 되었다느니, 쥐의 크기가 강아지만 했다느니, 꼬리가 뱀이었다느니……. 몇 가지 말고는 별로 신빙성 있어 보이지 않았다.
“탑주님. 원래 탑주는 이렇게 여기저기에 불려 다니는 건가요?”
시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사실 그렇지 않았다. 전생에만 하더라도 어디에 마물이 나타나면 황궁 기사단이 움직였고, 마탑에서 나서도 벨이나 세르타가 갔지 내가 가는 일은 많지 않았다. 클로든에게 ‘꼭 가야 해?’라고 물어서 그렇다고 대답하는 경우에만 마지못해 일어났는데, 그런 일은 별로 없었으니까. 이번엔 어쩌다 보니 계속 끌려다니고 있지만.
그런 사정을 시우에게는 설명할 수 없었기에 그냥 고개만 가로젓고 말았다. 쥐 떼는 보기에 징그럽고 불길할 뿐 (아직) 사람을 잡아먹거나 하는 건 아니었기에, 실제로 본 사람이 많음에도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시우와 함께 시장을 지나서 산책로를 거쳐 리테바 시내가 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보통 이런 코스를 걸으면 호감도가 오르던데, 안 오르려나.
[호감도: 시우]
65%
시우는 ‘아직 어려우려나…….’라고 생각합니다.
올랐다! 웬일로 내용도 깨지는 것 없이 나왔다. 뭐가 어렵다는 걸까. 말 걸기? 접근하기? 어려울 것 하나도 없으니까 제발 해줬으면 했다.
“저, 탑주님.”
오. 드디어 말 걸었다.
“저거, 쥐 아닌가요?”
“…….”
시선이 저절로 시우의 손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갔다. 정말로 쥐 한 마리가 부리나케 뛰어가고 있었다. 한 마리에 이어서 또 한 마리, 그리고 또 한 마리……. 삽시간에 쥐는 쥐 떼가 되었다. 다행히 강아지만 하지도, 꼬리 자리에 뱀이 달려 있지도 않았다. 나는 시우를 뒤에 세운 채 조용히 쥐 떼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피리 부는 사나이가 아니라 피리 부는 쥐 떼들이군. 아니, 피리도 안 불고 있지만.
쥐들은 정말 질서 정연하게 움직였다. 군대의 행진도 이것보다 각이 잘 잡혀 있지는 않을 것이다. 칼레우스가 이상한 일이라며 보고를 할 법도 했다.
쥐를 따라가다 보니 조금 산속으로 들어왔다. 뒤에서 헉헉거리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시우였다. 나도 좀 힘들긴 한데, 설마 시우는 나보다 더 체력이 약한 건가. 12보다 낮은 체력이라니 일상생활이 가능하긴 해?
이쯤에서 시우를 돌려보낼까 했으나 그 전에 쥐들의 목적지가 나타났다. 입구가 좁은 동굴이었다. 반듯하게 줄을 선 쥐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가고 난 후 동굴 안쪽을 살짝 살폈다. 안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의 세기나 냄새로 보아 그리 깊은 동굴은 아닌 듯했다. 시우를 돌아보았다.
“먼저 내려가. 난 저걸 처리하고 갈 테니까…….”
“여, 여기 같이 있으면 안 될까요?! 혼자 가는 게 더 무서워요.”
앞은 마물의 은신처고 뒤는 그냥 산책로인데 뭐가 무서워. 그런 말이 절로 나올 뻔했지만, 여기서 마물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면 호감도가 더 올라갈지도. 그래서 그러라고 대답하고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 동굴은 그리 깊지 않았다. 바람이 통하는 것으로 보아 반대편 출구도 가까이 있는 듯했다.
시우는 내 뒤에서 옷자락을 잡고 따라왔다. 후드가 벗겨지지 않도록 손으로 고정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역시 동굴은 짧았고, 곧 반대편의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쥐 떼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천천히 걸어 나가니 발에 마른 검불이 밟혔다. 주위에서는 흙과 오래된 나무 냄새, 약간의 비린내가 떠돌았다. 고목과 마른 풀로 덮인 작은 분지였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볼 여유는 없었다. 동굴에서 나오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일정한 간격으로 오르내리는 거대한 털 덩어리였다.
쥐 떼는 그것의 품으로 들어갔는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자극하지 말고 조용하게 저게 뭔지 알아보도록 할까. 한 걸음 다가서려 했으나 내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히익, 꼬, 꼬리……!”
이 비명 때문이었다.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자 시우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채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로 시선을 옮겼다. 처음엔 인식하지 못했었는데, 거대한 쥐의 분홍빛 꼬리가 수풀 사이에 늘어져 있었다. 약간 징그러웠지만 참을 만했다. 문제는 시우의 비명에 그것이 움찔했다는 것이다.
꼬리를 보고 있는데 불현듯 시선이 느껴졌다. 시우의 입에서 거의 울음에 가까운 비명인지 신음인지가 흘러나왔다.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가 나도 비명을 지를 뻔했다.
수백 쌍의 작고 새카만 눈알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쥐였다. 작은 쥐, 아니, 큰 쥐인데…… 머리가 엄청나게 많이 달린. 작은 머리가 엄청나게 달린 큰 쥐. 다리든 뭐든 상식 이상으로 많이 달리면 어마어마하게 징그럽구나. 헐떡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서는데, 거대 쥐가 꿈틀 움직였다. 몸을 완전히 틀어 우리 쪽으로 다가오려 하는 듯했다.
정면이 보이자 눈에 들어오는 머리의 개수는 더 많아졌다. 정말 기절할 것 같았다. 쥐 마물의 날카로운 발이 바닥을 박찼다. 순간 몸이 멈칫했다. 쥐는 거의 쏘아지듯 달려왔고, 생각보다 너무 빠른 움직임에 사고가 멈췄다. 마치 나를 들이받던 트럭을 보았을 때의 기분이었다.
어쩌지, 짧은 순간 스친 생각은 투둑, 투두둑, 하는 소리와 짙게 풍기는 피 냄새에 흩어져 사라졌다.
“케에에에엑!”
쥐 마물이 높은 비명을 지르며 빠르게 뒷걸음질했다. 순식간에 간격이 벌어진 나와 쥐 마물 사이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사람이 서 있었다. 아테올이었다. 그 옆으로는 작은 쥐의 머리가 몇 개 떨어져 있다. 아테올은 다시 뛰어올라 쥐 마물의 머리 몇 개를 더 베어냈다. 허공을 날아다니는 쥐의 머리에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아악! 당장 멈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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