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믿을 수 없어서 아테올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대단히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했다는 듯 눈을 찡긋하더니 물러섰다. 미안한데 하나도 재미없었다.
언제까지 거기에 있을 순 없었기에 다시 한번 마력 탐사로 바다를 확인한 뒤 떠나왔다. 바다에는 이제 잔챙이는 있어도 크라켄(이곳에선 크라켄이라고 부르지 않겠지만)은 없었다. 크라켄을 떠올리자 그 엄청나게 맛있는 냄새가 함께 떠올라서 좀 곤란해졌다.
아테올이 준비한 저녁 만찬으로 구운 문어가 나왔을 때는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었다. 함께 초대받은 세르타와 레사도 껄쩍지근한 얼굴로 포크를 댈까 말까 고민하는 듯했다. 메뉴를 지시했을 아테올만 맛있게 먹고 있었다.
문어의 크기를 보면 크라켄의 조각을 모아 와서 조리한 건 아닌 듯하고. 솔직히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임은 맞기에 결국 나도 먹었다.
“오늘은 다시금 경외를 느꼈습니다, 탑주님.”
식사 도중 아테올이 말을 꺼냈다. 세르타와 레사가 식기를 내려놓고는 동의한다는 듯 나를 보았다. 갑자기 왜? 어디서? 그냥 문어 한 마리 태웠다……고 하기엔 그 문어가 빨판 하나의 지름만 양팔을 펼친 것보다 크긴 했지만, 여기서 겸손을 떠는 것도 거만해지는 것도 내 성격은 아니었다.
“그렇습니다. 그 거대한 마물을 파리라도 잡는 것처럼.”
레사가 한마디 거들었다. 갑자기 전기 파리채가 된 기분이었다. 처치하고 나면 단백질 냄새가 난다는 점까지 비슷하다. 윽, 이건 좀 징그러웠다. 세르타는 말없이 나를 보며 가만히 웃을 뿐이었다. 그의 눈에서 느껴지는 존경심과 애정에 양심이 따끔거렸다. 결국 그 소동을 겪으면서도 말하지 못했다. 역시 빨리 도망쳐야 한다.
후식까지 먹고 나니 체력은 12가 되었다. 먹으면 체력이 찬다는 게 생각보다 편하다. 처음엔 체력 12라니 말이 되나, 라고 생각했지만 세상에 있는 모든 음식과 잠자는 것이 체력 회복 포션이라고 하니까 참을 만한 것 같았다. 그리고 마법만 쓸 때는 체력이 전혀 안 쓰이니까.
“탑주님.”
“…….”
찻잔을 들고 은근하게 부르는 꼴이 어째 불길하다.
“드릴 말씀이 있으니, 잠시 남아주실 수 있으신지요?”
……이럴 줄 알았다. 하지만 나도 아까 아테올이 시우를 쓱싹해 버리자는 계획 비슷한 걸 말해서 신경이 쓰였다. ‘싫으면 말씀하세요.’라고 눈으로 말하는 세르타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 끄덕였다.
“좋아. 하지만 피곤하니까 일찍 끝내 주면 좋겠어.”
“물론입니다.”
그렇게 나는 또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아테올의 침실에는 간단히 먹을 수 있고 오래 두어도 괜찮은 간식이 몇 가지 준비되어 있었다. 이 자식, 일찍 끝내 주겠다고 하더니 당연하다는 듯이 거짓말이었다.
나는 아테올의 권유를 기다리지 않고 테이블 앞에 털썩 앉아 후드를 걷었다. 아테올이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아까 그건 무슨 뜻이야?”
“그거라니요?”
“모르는 척하지 마. 시우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흠……. 그와 꽤 친해지셨습니까? 일전에는 황궁 도서관에도 데리고 가주셨다죠.”
뜬금없게도 그의 목소리에는 질투하는 기색이 약간 섞여 있었다. 할 사람이 없어서 시우한테 질투를 하냐. 어이가 없어 어깨를 늘어뜨리곤 턱짓했다. 대답이나 하라는 뜻이었다.
“뭐……. 대공의 움직임이 수상해서 말입니다.”
“대공?”
“대공의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짜를 몰아내고 진짜를 탑에 돌려보내는 거겠지.”
아테올이 턱에 손을 대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글쎄요. 그랬다면 대공의 성격상, 의심되었을 때 바로 부황에게 시우를 보낸 뒤 대놓고 말했을 겁니다.”
확실히…… 그건 그랬다. 게다가 대공은 나크사벨을 돌보는 것만으로 정신이 없기에, 아무리 같은 나랏일이라 해도 마탑에 관련된 문제는 황제에게 맡기려 했을 것이다.
“지금 하는 짓은 꼭 노리는 바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노리는 바라니. 대공이 제위라도 탐낸다는 거야?”
아테올이 어깨를 으쓱했다.
“여태까지 그런 적은 없었잖아. 나크사벨은 언제나 황궁에 관심이 없었어.”
……음?
“그들이 좋아하는 건 정복과 토벌뿐이라고.”
“그 정복과 토벌을 다른 곳에서 하고 싶어진 건지도 모르죠. 예를 들면 수도라거나.”
“하지만 이번 대 로아네스 대공의 성격은…….”
으음?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말을 하다 보니 무언가 이상했다. 나 왜 이렇게 대공을 잘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 언제부터 내가 나크사벨의 대공가에 대해 이렇게 잘 알았담. 전생 6년 동안 나크사벨과의 교류는 대단치 않았다. 이렇게 단정 지어 말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게다가 바로 얼마 전만 해도 대공이 황제 자리에 욕심을 내는 게 아닌가, 그래서 시우를 이용하려는 게 아닌가, 반란 같은 게 있지 않을까 고민도 했었는데. 갑자기 누가 머릿속에 생각이라도 주입시킨 느낌이다.
“요즘은 군사를 훈련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테올의 목소리가 내 생각을 잘랐다. 하긴, 뭐,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 군사라……. 여름 끝물, 북부에 사는 마물들은 한여름에 잠시 행동이 둔해진다. 그래서 지금은 그간 바빠서 제대로 하지 못한 군사 훈련이 한창일 시기이긴 했다. 하지만 아테올의 어조가 묘했다.
“그 군사 훈련이 의심스러워?”
“모든 게 의심스럽죠. 가을을 맞아 무기를 새로 정비한 것도, 식량 창고를 채운 것도. 시기상으로 당연한 일인데도 말입니다.”
“…….”
하지만 시우가 있는 이상 무력 충돌은 필요하지 않을 텐데. 시우가 마법을 되찾기만 하면 다 끝나는 문제 아닌가.
“……만약에 시우가 마법을 되찾아 가면.”
아테올이 나를 빤히 보았다.
“그러면 다 끝나는 거야. 알아?”
“그렇긴 하죠.”
“그러니까 그 전에 날 나가게 해주고, 너는 시우를 이용해서 살길을 찾아보라고. 자꾸 나랑 결혼설이나 부풀려서 너한테 이득이 되는 게 뭐야?”
“그가 어떤 방법으로 마법을 되찾아 갈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멈칫했다.
“그야 나도 모르지. 전……, 아니, 유리 본인 말고는 모를 거야.”
전생에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마법이 넘어가 있었다고 하려다 겨우 입을 닫았다. 마법을 되찾아 가는 방법은 모른다. 어쩌면 조력자가 있어야 하는 걸 수도 있다. 시간이나 마법진, 도구, 제물, 그런 게 필요하다거나. 어쨌든 언제 닥칠지 모를 일이었다. 지금 시우가 기억 상실 상태라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인데, 이마저도 ‘실은 그의 뛰어난 연기였다’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럼 당연히 언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거군요.”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을 것 같긴 한데.”
전생에는 무려 6년 후에야 찾아왔으니까. 이번엔 6년까진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도 아니겠지. 시우가 만약 기억 상실을 연기하는 중이라면, 혹은 정말 기억 상실 상태라 해도, 그건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는 뜻이다.
“그럼 방법은 하나네요.”
“하나?”
“그를 죽이는 거죠.”
“…….”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죽인다고? 시우를? 진짜를 처리하겠다는 게 정말로 죽이겠다는 뜻이었단 말인가. 살짝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시우가 한낱 책 속의 인물이라고는 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마탑의 주인은 엄연히 시우의 자리가 아닌가. 가짜가, 심지어 가짜의 가짜가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자리의 진짜 주인을 죽이다니.
책 속 캐릭터라 해도 해야 할 일이 있고 해선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이다. 여기는 시우의 세계였다. 그런 세계에 억지로 끌려왔다곤 하지만 침입자가 멋대로 내용을 어지럽히고 자리까지 빼앗는다니. 해서는 안 될 짓이다.
“그건 안 돼. 진짜는 진짜야. 욕심 하나로 그걸 바꿀 수는 없어. 심지어 죽여서라니, 절대로…….”
“당신은 저와 함께 있고 싶지 않으십니까?”
난 입을 다물고 아테올을 쳐다보았다. 너무 뜻밖의 말이라서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무슨 이런 순정적인 말을. 함께 있고 싶지 않느냐고? 그야 당연히.
당연히,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시우를 죽이는 건 아닌 것 같아.”
결국 대강 얼버무렸지만 아테올은 넘어가 주었다.
“이해할 수 없군요.”
“해.”
할 수 없는 게 어디 있나. 그냥 이해해야지. 이해가 안 되면 외우든가. 사람은 도덕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 법이다.
“그냥 날 놔주면 안 돼?”
내 말에 아테올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웃었다. 괜히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 자리로 와서 의자 등받이를 손으로 잡고 몸을 굽히더니 귓가에 입 맞췄다.
“안 됩니다.”
***
황궁 도서관. 수백 개의 대리석 계단과 가교, 그 가교를 가득 채운 서가에는 갖가지 귀한 장정의 책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천장에는 수정으로 만든 샹들리에와 웅장한 천장화가, 계단의 난간에는 각기 다른 신의 모습과 신화 내용의 조각이 새겨진 도서관은 아름다움을 넘어 장엄하기까지 했다.
그 도서관 한쪽 구석,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어두운 곳에 한 남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옆에 두꺼운 책을 잔뜩 쌓아둔 채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페이지를 넘겼다.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글자 반, 이해 못 하는 글자 반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공책을 펼쳐 서툰 글씨로 뭔가를 써 내려갔다.
중얼거리는 말도, 서툰 글씨도,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언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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