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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56화 (56/93)

56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이벤트 발생!]

이번에도 도망 실패……. 아테올은 화가 난 것 같아요. 어떻게 풀어주면 좋을까요?

지금 내가 열한 번째 도망에 실패한 상황인데 이런 이벤트나 띄우고, 제정신이냐? 하지만 다시 말하는데, 이 게임은 CS 메뉴가 없었다. 있었다면 이미 나는 진상 중의 진상으로 낙인찍혔을 것이다. 문의를 하도 많이 해서.

강제 귀환당한 뒤, 처음으로 도망칠 땐 조용했다. 나는 무사히 밖으로 나갔고 그대로 멀리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이제 게이지도 없으니 무서울 게 없었다. 하지만 아테올이 찾아왔다. 세 번째도, 네 번째도, 다섯 번째도, 아테올은 진짜 애너벨처럼 나를 찾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애너벨이 아니라 집에서부터 따라오는 애너벨이었다.

어느 쪽이든 나는 거절하고 싶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였다.

대체 어떻게 찾아오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아는, 탑주만 아는 몇 개의 포털을 썼는데도 아테올은 금세 날 찾아냈다. 현대 사회에서 세상 모든 CCTV를 해킹하더라도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인데 해냈다. 아테올이 작두를 타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대체 어떻게 찾은 거냐고 물으면 아테올은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비밀 포털을 다 쓰고 나자 무작정 도망치는 것밖에 없었다. 도망 생활에서 뜻밖에도 마법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투명 인간이 되는 마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왜인지 투명 인간이 되더라도 길을 걷다가 아테올한테 부딪칠 것 같긴 했지만.

그리고 일주일 만에 열한 번째 도망길. 오늘은 황궁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잡혔다. 대체 왜 아테올은 나를 가만히 두지 않는 걸까.

“잠시 타시지요. 마차로 황궁을 한 바퀴 돌게 하겠습니다.”

왜…… 왜 그래야 하는데. 주뼛거리면서 다시 도망치려고 했으나 헛일이었다. 아테올은 나를 안아 들어 손쉽게 마차에 태웠다. 마차에 올라 덧창을 닫자마자 그는 내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등을 때려 쳐냈지만 그는 끈질겼다.

“정말, 자꾸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곤란하면 어쩔 건데……. 또 감금이라도 할 거야?”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습니다만.”

나도 너를 다시 거꾸로 매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 차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쉽게도 할 일이 있습니다. 실람 해협에서 마물이 나타난다고 하더군요.”

그게 이렇게 물고 빨면서 할 말인가?! 몸을 빼내려 했지만 아테올의 팔 힘은 언제나 그렇듯 올가미처럼 단단했다. 결국 아테올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난 후에야 나를 놓아주었다. 마차는 이미 황제궁 앞에 도착한 지 오래였다.

옷을 바로 입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서려 하는 나를 아테올이 다시 안아 들었다. 황궁에는 소문이 파다했다. 황제가 탑의 주인에게 청혼했는데, 탑주도 마음은 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거절하고 있으며 황제는 그런 탑주에게서 승낙을 받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라고. 정말 달갑지 않은 소문이었다.

아테올은 나를 자연스럽게 침실로 데리고 들어가, 문에서 침대를 향해 가며 옷을 하나씩 벗겼다. 바닥으로 로브, 가운, 윗옷, 허리 천 따위가 차례로 떨어졌다.

“안 그래도 당신이 자꾸 도망 소동을 일으켜서 시끄러우니, 민심 안정을 위해 저와 함께 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모르는, 으, 으응……!”

아테올의 손가락이 아직 부어 있는 안쪽으로 들어왔다. 결국 이번 도망 시도도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

소금 냄새 나는 바람이 축축하게 피부를 덮었다. 느릿하게 흔들리는 뱃전에서 나는 검푸른 바닷물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달은 바뀌었고 여름도 끝물이었다. 거대한 배는 흰 포말을 만들며 실람 해협의 중앙으로 향하고 있었다. 피부가 검게 그은 뱃사람들이 바쁘게 오갔지만, 배 갑판에는 이상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보통은 짐을 가득 실어둬야 할 공간도 텅 빈 상태다.

정규 항로에 나서는 게 아니라, 우리가 잠시 빌린 배였기 때문이다. 이 해협에서 최근에 큰 배를 덮치는 마물이 나타난다고 한다. 오늘 온 건 그 마물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나타나는 마물을 마탑주가 하나하나 다 처리할 수는 없지만, 이번처럼 크고 위험한 건은 직접 나선다. 보여주기식 정치와 비슷한 것이었다. 그거보다 좀 더 도움이 되긴 해도.

아테올은 잠시 자리를 비우고 레사와 세르타가 각각 내 뒤에 서 있었다. 둘의 분위기가 별로 좋진 않았다. 세르타가 아테올을 워낙 싫어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탑 사람들은 건드리지 말라는 약속을 받아내고 나서 세르타를 탑으로 불러들였다. 약속대로 아테올은 세르타는 물론 다른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으나, 저래도 괜찮은가 싶을 정도로 사이가 나빠졌다.

뭐, 내가 사라지고 나면 해결될 일이다…….

“어릴 때부터 실람 해협의 전설을 많이 듣고 자랐죠.”

레사가 불쑥 입을 열었다. 원래 떠들기 좋아하는 성격의 그녀였기에 이 침묵을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중앙에서 뱃사람들만 아는 길로 들어가면 배의 무덤이 있다면서요? 탑주님께서는 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 없어.”

배의 무덤? 정말 불길한 이름이었다. 게임에서 보면 그런 지역에 꼭 크라켄 같은 게 나타나던데. 화창하고 아무것도 없던 하늘에 갑자기 구름이 끼면서 바다가 술렁이기 시작하고…….

“…….”

“마, 마물이다!”

당장이라도 비를 쏟아부을 듯 새카맣게 구불거리는 하늘이 뱃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배가 불길하게 출렁거렸다. 분명 맑고 푸르기만 하던 물속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하고 음산한 형체가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이거 잘 안다. 물구나무서서 봐도 크라켄이었다.

“유리 님.”

사라졌던 아테올이 어느새 옆에 나타나 있었다. 그가 말을 건 것과 동시에 몸이 옆으로 부웅 떴다. 나뿐 아니라 배 갑판에 서 있던 모두가. 이어 배 바로 옆으로 솥뚜껑만 한 빨판이 나란히 붙은 두족류의 검푸른 다리가 솟구쳤다. 배는 이미 파도타기라도 하는 것처럼 옆으로 떠오른 상태였다. 더 생각할 여유고 뭐고 없었다. 우선 배와 후드득 떨어지는 사람들을 마력으로 붙잡아 올렸다.

크라켄은 뭐 때문에 화가 난 건지 거의 첨탑의 탑 둘레 정도는 될 굵고 긴 다리를 마구 철벅거렸다. 순식간에 바다가 소란스러워지고, 크라켄을 중심으로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배가 마력 없이 물에 떠 있었으면 당장 저 가운데로 빨려 들어갔을 것이다.

“위험합니다. 마물은 제가…….”

“누구한테 하는 말이야.”

나한테 거꾸로 매달렸던 주제에 위험은. 게다가 크라켄은 다리를 자르면 그 자리에서 다리가 하나 더 생기는 법이라고. 한 번에 불로 태워버리는 게 최선이었다. 타격을 주기는 쉬웠다. 워낙 눈에 보이는 표적이 크니까.

마법으로 일으킨 불이 단숨에 피어올라 바다를 뒤덮었다. 불은 바닷물에 닿아서도 꺼지지 않은 채 크라켄의 몸을 타고 활활 번졌다. 크라켄은 천지가 개벽하는 듯이 어마어마한 소리로 울며 몸부림쳤다. 그리고…… 엄청나게 맛있는 냄새가 났다.

어디선가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자 뱃사람 한 명이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자기 배를 감싸고 있었다. 크라켄……, 식용일까?

사방으로 타닥타닥 빨간 불티와 함께 맛있는 냄새가 휘날렸다. 화로에 말린 문어 구워본 사람? 그 광경을 떠올리면 거의 비슷할 것이다.

독은 없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물의 시체를 먹으라고 할 수는 없었다. 거대한 크라켄이 완전히 타서 쪼그라들어 작아질 때까지 태운 후에야 불을 끄고 마물을 바다로 돌려보냈다. 환경 파괴가 조금 걱정되긴 했는데, 크라켄이 있는 것보다는 크라켄의 타고 남은 재가 있는 게 이곳 해양 환경에 좋을 것 같았다.

크라켄이 사라지자 하늘은 거짓말처럼 화창해졌다. 바다 역시 언제 날뛰었냐는 듯 잠잠하다. 뱃사람들은 다들 뱃전에 붙어서 아직 둥둥 떠다니는 크라켄의 잔해를 구경하다가 선장의 불호령을 들은 뒤 흩어졌다.

배는 머리를 돌려 다시 항구로 향했다. 항구에는 뱃사람들의 가족을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배가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멀쩡하게 돌아오는 걸 본 그들에게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황제 폐하!”

“탑주님!”

의외로 나를 부르는 목소리도 많았다. 선착장에 내려서서 걸음을 떼려 하는데 갑자기 주위가 술렁거렸다. 내 바로 곁에서 걷던 세르타도 발을 멈춘 채 인상을 찌푸렸다. 뒤를 돌아보자, 아테올이 내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제국을 대신하여 가장 높은 탑의 주인께 감사드립니다.”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닌데 그의 낮은 목소리는 멀리까지 울렸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날 올려다보던 아테올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이마에 입 맞춰 주십시오.”

하여간 퍼포먼스를 어지간히 좋아한다. 그렇다고 이 수많은 군중 앞에서 그냥 무시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다가가 몸을 굽혀서 그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 거의 입술이 닿은 듯 만 듯한 정도였다. 어영부영 잘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순간, 아테올이 휙 일어나더니 내 허리를 안고 입술에 입을 맞췄다. 다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

물론 마탑과 황궁의 결합이 평화의 상징 그 자체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이런 반응은 이해가 갔다. 머리로는. 마음은, 아테올의 뺨을 후려칠 뻔한 손을 간신히 막는 정도였다. 나는 아테올에게만 보이도록 입 모양만으로 소리쳤다.

“미쳤어?!”

“왜요?”

“……왜긴, 이러다 나중에 어쩌려고!”

나는 가짜였다. 그런데 이렇게 잔뜩 무드를 잡아놓으면, 나중에 진짜 유리……, 시우가 돌아왔을 때 어쩌려는 걸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실망은 성혼을 이뤄내지 못한 아테올에게 모두 돌아갈 것이었다.

“다 밝혀진 다음에 바보 되고 싶어?”

그러자 아테올이 쿡쿡 웃더니 대답했다.

“안 그래도 대공이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로아네스 대공이? 뭐라고?”

“빙빙 돌려 말했지만 요는 당신이 가짜일 수 있으니, 결혼설을 빨리 진정시키는 게 좋을 거라는 소리였습니다.”

순간 내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제 도피할 여지가 없었다. 대공은 정말로 사실을 알고 있다. 가슴이 철렁했다.

“알면서 왜 더 불을 붙여.”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진짜라고 말하면 진짜가 되는 거라고.”

“웃기지 마. 엄연히 진짜가 존재하는 이상, 그 진짜가 시장에 나오면 다 끝이야.”

“그야 나왔을 때 이야기지요.”

“뭐?”

“진짜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아테올이 빙긋 웃었다.

“당신이 말하는 진짜는, 지금 우리 수중에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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