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나흘은 긴 시간이었다. 아니, 날수로 닷새인가? 시간의 개념도 없어질 정도로 길었다는 뜻이다. 아테올은 잠깐씩 나갔다 오는 시간만 빼면 나한테 매달려서 떨어지지 않았다. 중간중간 나는 몇 번이나 체력이 방전되어 기절했다. 나중엔 아테올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까지 해가며 질질 울고 애원했다. ……정신이 돌아오고 생각하니 차라리 그냥 기절하지 싶을 만큼 창피한 말이었다.
잠들고 먹는 시간만 빼면 내내 하기만 했다. 아테올은 제정신이 아닌 놈 같았다. 물론 거기에 어울려준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테올이 하도 미친 짐승처럼 달려들어 대서 휘말린 것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닷새가 지나자 나도 조금 영혼이 돌아왔다. 아테올이 정무를 보러 나간 사이였다. 나는 손목에 매달린 사슬을 흘끔 내려다보았다. 자리를 비울 때 아테올은 이렇게 내 손목과 발목에 족쇄를 채워놓고 갔다. 그런다고 내가 못 움직이리라 생각은 안 하겠지만, 이렇게 하는 게 심적 안정을 주는 모양이다.
나는 멍하니 손목을 보고 있다가 느릿느릿 일어났다. 무기력했다. 몸이 잔뜩 지친 탓인지 나가야겠다는 생각도 안 들 만큼 의욕도 기력도 없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몸을 일으켜 채워진지도 모를 만큼 가벼운 사슬을 질질 끌며 창가로 향했다.
당연히 창문도 잠겨 있었으나, 잠금쇠에 마력을 넣어 손가락으로 툭 치자 열쇠도 없이 찰칵 잠금이 풀렸다. 활짝 열린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자 새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왔다. 새의 부리에 입술을 툭 대고 다시 날려 보냈다. 새는 날개를 열심히 파닥거리며 멀어졌다.
침대로 돌아와 눈을 감고 얼마쯤 있자 열린 창문으로 아까 그 새가 날아 들어왔다. 부리에 종이를 문 채였다. 종이를 받은 뒤 새에게 건 마법을 풀어주고, 이번엔 자기 의지로 빠르게 사라지는 새의 뒷모습을 보며 창을 닫았다. 창으로 들어오던 미적지근한 바람이 뚝 끊겼다.
누워서 종이를 펼쳤다. 클로든의 글씨로, 길지 않은 내용이었다. 가만히 눈으로 글씨를 따라가던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
아테올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그에게 구긴 종이를 던졌다. 그는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몸을 굽혀 종이를 줍더니 내용을 확인했다. 짧은 문장을 슥 읽은 그가 나를 보았다.
“어느 틈에 이런 편지를 주고받으셨습니까? 새가 물어다 줬나요?”
“맞아.”
“…….”
순간 당황한 듯했으나 그는 금방 평정을 되찾았다.
“애초에 당신을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긴 했습니다.”
“그래서 거짓말했어?”
내 말에 아테올은 입을 다물었다.
쪽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세르타는 무사하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라고 좋아서 닷새나 아테올의 침실에 갇혀 있었던 게 아니다. 그는 세르타를 이용했다. 중상을 입은 그를 황궁으로 데리고 왔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면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겠다고.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의미와 같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거짓말이었다. 세르타는 애초에 황궁으로 오지도 않았다. 오두막에서 아테올과 마주친 후 나를 찾으러 뛰쳐나왔을 것이다. 아테올과 싸우다 피를 그렇게 흘린 몸으로. 혹은 애초에 그 피가 세르타의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왜 넌 나한테 거짓말만 해? 나는 너한테 거짓말한 적이 없는데.”
아테올은 가만히 웃기만 하다가 한 걸음 다가왔다.
“맨발로 거기 서 계시지 마십시오. 위험합니다.”
바닥에는 내가 부순 족쇄의 파편들이 가득했다. 별로 나한테 위험하진 않았다. 물이라도 튀기듯이 족쇄 파편을 아테올 쪽으로 휙 날렸다. 날카롭게 깨진 쇳조각이 그의 뺨에 붉은 선을 그었다. 핏방울이 가늘게 흘러내렸다. 아테올은 자기 상처에 눈길도 주지 않고 말했다.
“사실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뭘.”
“그냥…… 제가 뭘 생각하는지요. 그냥 한 가지에만 맹목적이 됩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내가 어떻게 알아.”
“당신을 옆에 잡아둬야 할 것 같다.”
하, 언짢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코웃음 쳤다. 이게 지금 특별 호감도가 100%가 되고 나서 일어난 일이다. 그거, 역시 ‘호감도’가 아닌 것 같다. 집착이라든가 광기라든가, 아니면 100%가 되면 눌리는 비밀의 발작 버튼이라든가.
tip: 포기하지 마세요. 호감도가 100%가 되면 특별한 일이 일어나요!
웃기고 있네. 여기서 더 특별해지면 어떻게 되는 거냐. 생각만 해도 무서웠다. 나는 팔에 걸치고 있던 로브를 입고 후드를 눌러쓴 뒤 발을 내디뎠다. 쇳조각이 반대 극의 자석에 밀리듯 내 발을 피해서 이리저리 굴러갔다.
“아테올.”
“네.”
내 마법이 대지를 반대로 뒤집어 놓을 수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사람 하나를 거꾸로 매달 수 있는 건 확실했다. 쇳조각들이 차르륵 모여 다시 긴 사슬이 되어선 아테올의 발목을 휘감고, 그를 들어 올렸다. 검은색 망토가 바닥을 향해 흘러내렸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 미남은 거꾸로 매달려도 미남이었다. 뺨에서 피를 흘리며 팔과 다리를 구속당한 채로도 그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 상황이 재미있다고 말하듯이. 재미있냐. 반성이나 해라.
“앞으로 마탑은 안 건드리겠다고 약속해.”
“약속합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을 제시할 입장이야?”
“저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당신과 동등한 신분이니까요.”
“……뭔데.”
아테올이 말했다.
“도망칠 때 부하들을 이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어차피 앞으로 그럴 생각이었어.”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더 이상 대화는 없었다. 나는 아테올을 매달아 놓은 채 문을 부순 뒤 침실에서 나왔다.
“마탑으로 돌아갈 거야.”
밖으로 통하는 다섯 개의 문을 다 부수고 나온 날 보며 레사는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다른 것보다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인 모습이었다.
“흠. 으흠.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다행히 레사는 곧 본분을 찾고 시종장을 불렀다. 태연하게 마차에 올라타고 나니 갑자기 후회가 밀려들었다. 이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하지? 열받아서 저지르긴 했는데, 아테올이 나한테 어떻게 복수할지 벌써부터 겁이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거꾸로 매단 건 좀 너무했나…….
마차는 금방 마탑에 도착했다. 클로든과 벨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기다렸습니다, 탑주님.”
두 사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나와 아테올의 이상한 분위기는 이들이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세르타 일도 그렇고. 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것부터 물었다.
“세르타는? 어디에 있대? 다친 곳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모양입니다. 지금은 수도 근처의 산속에 있다고 했습니다. 다친 곳도 없고요.”
너무 가까이 있지 않나 싶었지만, 알아서 잘 도망 다니겠지. 무사하다고 연락이 왔으면 됐다. 그는 정말 무사하지 않으면 그런 연락을 안 할 사람이다. 역시 그날 오두막에 뿌려져 있던 피는 아테올의 연출이었던 듯했다.
“탑으로 돌아오라고 해. 더 도망 다닐 필요 없어.”
“알겠습니다. 쉬시겠습니까?”
클로든의 말에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시우는 아직 4황자 궁에 있어?”
“예. 대공 전하는 돌아갔습니다만.”
“그럼 4황자 궁으로.”
그러자 클로든이 잠시 멈칫했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조금 쉬시는 편이…….”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지금 내 체력은 10,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괜찮아. 잠깐 다녀올 거니까.”
“알겠습니다. 새 옷을 준비하겠습니다.”
옷을 갈아입은 뒤 4황자 궁으로 향했다. 대공은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어 나크사벨로 돌아갔지만, 시우는 유학을 명목으로 황궁에 남았다는 모양이다. 대공이 특별히 부탁했다고 한다. 굳이 그렇게까지. 나한테는 위험한 사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시우를 만나 호감도를 채울 수 있는 건 다행이었지만.
“탑주님!”
시우는 변함없이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막상 오긴 했는데 시우와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대화하는 게 즐거운 것도 아니고, 티타임도 지루하고. 시우의 수다를 대강 받아주고 있는데 퍼뜩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책 읽는 걸 좋아한다고 했지?”
“네, 아직 잘 읽진 못하지만…….”
“4황자 궁에도 서고는 있지만 규모가 작지. 앞으로 황궁 도서관을 이용해.”
“황궁 도서관이요?” 하며 시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설명할 것 없이 눈으로 보여주는 게 빨랐다. 시우를 데리고 황궁 도서관으로 향했다. 황궁 도서관은 궁 하나를 통째로 사용했다. 그중에 서가는 출입 가능 구역과 불가능 구역이 있는데, 내 권한으로 들여보내 줄 수 있는 곳은 전부 출입 허가를 내주었다.
“언제든 와. 공부도 하고. 내가 추천하는 책은…….”
그렇게 말하며 아무거나 생각나는 책 이름을 적어주었다.
[호감도: 시우]
60%
시우는 ‘어려워 보이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웬일로 하나도 안 가려지고 나왔지?! 별로 도움이 되는 내용은 아니었다만. 황궁 도서관 정원을 천천히 한 바퀴 돌며 시우와 이야기를 좀 나누었다.
“기억은 좀 돌아오는 것 같아?”
“아니요…….”
시우가 시무룩해졌다. 얼른 말을 돌렸다. 대공에 관해 좀 떠보려 했지만, 시우는 별로 아는 게 없었다. 시우의 호감도가 오르면 99%에서 움직이지 않는 아테올의 진짜 호감도도 오를 수 있다고 했는데……. 잠깐. 지금 특별 호감도가 100%가 된 것만으로 그렇게 맛이 가버렸는데, 호감도까지 100이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게다가 팁이라면서 뜨지 않았던가. 호감도가 100으로 오르면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고. 그 특별한 일이 대체 뭘까. 짐작도 가지 않는다.
“음, 그, 그래. 그럼……. 내킬 때 언제든 도서관에 와.”
“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하는 시우를 내팽개치고 후다닥 마탑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그대로 발을 돌려서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졌다. 아테올이 와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거꾸로 매달아 두고 왔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탈출한 건지. 나는 그를 보고 떨리는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며 손을 내밀었다.
“……?”
아테올이 고개를 갸웃했다.
“금화 50개. 돌려줘.”
“아……. 레사. 가서 금화 5천 개를 마련해 와라.”
“알겠습니다.”
5천 개?! 그걸 또 알겠다고 하고 바로 가는 너는 뭐야! 아테올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이제 금화 문제는 해결되었고,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무슨 이야기?”
“뭐든요.”
역시, 역시 무섭다. 내 얼굴이 파리해진 걸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뒷걸음질할 뻔하다가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일부러 성큼성큼 아테올을 앞질러 걸었다.
“오늘은 피곤하니 내일 찾아와.”
“예, 그럼 내일.”
그대로 탑에 올라가자마자 보석과 금이 들어 있는 서랍을 마구 뒤졌다. 그때부터 나의 수많은 도망 시도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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