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탕, 탕……. 일정하게 울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이른 아침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멍한 정신으로 짐작해 보았다. 탕, 탕, 뒤이어 쩌억, 투둑, 소리가 이어진다. 세르타가 밖에서 장작을 패고 있는 모양이었다. 목가적인 아침이었다.
나는 부스스 일어나 세르타가 욕실에 받아놓은 물로 아침 목욕을 했다.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산속의 밤과 새벽은 불을 때야 할 정도로 쌀쌀했다. 따뜻한 물에 발끝부터 담그자 온몸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했다.
목욕을 마치고 나왔더니 세르타는 어느새 집으로 들어와 아침을 차리는 중이었다. 신선한 우유, 콩으로 만든 페이스트와 납작한 빵, 노릇노릇하게 구운 감자, 채소를 잘게 다져 만든 샐러드와 차였다. 마탑에서 먹는 것처럼 화려한 요리는 아니지만 아주 훌륭했다.
다만, 여기에 처음 온 날 내가 장담했던 것과 달리 있는 식재료만으로는 버틸 수 없었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였다. 꼼꼼하게 재료를 살펴본 세르타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탑주님, 이건 전쟁 중에나 먹는 식재입니다.”
아무리 마법이 항상성을 유지한다고 해도 신선한 음식을 영원히 썩지 않게 만들 수는 없다. 그건 내가 사람에게 영생을 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보존성 높은 식재로 채워 놓은 건데, 세르타의 눈에는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들키지 않게 다녀오겠다면서 후드를 눌러쓰고 산 아래까지 내려갔다가 왔다. 가깝지 않은 거리인데 우유, 채소, 햄, 빵, 올리브, 과일 같은 것을 자루 가득 사서 채워 오기까지 겨우 한 시간 남짓 걸린 그를 보며 혹시 공간 이동이라도 한 건 아닌지 의심해야 했다. 여기서 시장까지 이어진 포털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보존고, 마법으로 움직이는 일종의 냉장고에 식자재를 넣은 세르타는 부엌을 정리해 먹을 만한 재료와 그렇지 못한 재료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이건 혹시 여기서 농성하게 될 상황이 온다면 먹는 게 좋겠습니다.”
설마 우리가 농성할 일이 생길 리는 없으니 세르타 나름의 농담이었다. 그 말과 함께 내가 말한 재료 대부분은 찬장으로 도로 들어갔다.
이후로 세르타와 나는 산자락 오두막에서의 평온한 일상을 약 일주일째 영위하는 중이다. 세르타는 하루 종일 나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고, 그래도 남는 시간엔 뜰에서 검을 휘둘렀다.
힘을 상당히 빼고 휘두르는 건데도, 허공을 가르는 그 검이 얼마나 강력한지 내가 보며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세르타와 그 다음가는 실력의 벨이 함께 덤볐으니 아테올이 순간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것도 이해가 갔다.
나는 콩 페이스트가 담긴 숟가락을 들고 빵을 만지작거렸다. 세르타는 내 잔에 차를 따르고 있었다.
“……저기, 세르타.”
“네. 탑주님.”
“아테올이 혹시, 다치진 않았어?”
내 말에 세르타가 멈칫하며 찻주전자를 내려놓았다. 그는 묘한 얼굴을 하다가 “아뇨.” 대답했다.
“전혀 다치시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황제 폐하이신데요. 옥체에 흠집을 낼 수는 없지요. 또…….”
“또?”
“실력이 저희가 예상한 것보다 대단하셔서 상처를 내려야 낼 수도 없었습니다.”
하긴, 그때 촉수 괴물을 단칼에 처치한 것만 봐도. 순간 ‘안 다쳐서 다행이다.’와 함께 ‘역시 대단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다 곧바로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테올이 뭐라고 내가 그렇게 생각해.
아테올이 뭐라고……. 그래, 나한테 아테올은 뭘까?
조력자였는데 이제 아니게 된 사람. 또, 애매한 분위기를 주고받은 관계. 이건 정말 애매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아테올을 떠올리면 느끼는 지금 이 기분처럼. 그리고, 몇 번 잔…… 사이. 으윽. 그 생각을 한 순간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페이스트가 튀었다. 세르타가 말없이 냅킨을 들어 테이블을 닦았다.
헉하고 정신을 차린 뒤 식사를 시작했다.
아테올이 한 말은 일견 일리가 있다. 가짜를 진짜로 만들면 진짜가 된다는 말 말이다. 하지만 그건 너무 긍정적인 가정이었다. 인어의 심장처럼 진품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감정 결과마저 마음만 먹으면 조작이 가능할 경우에는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와 보석은 경우가 너무 다르다. 진짜 유리가 돌아오면 내 마법은 그에게 넘어가 버릴 거다. 그건 내가 가짜라는, 무엇보다 큰 증거가 된다.
어쩌면 자신까지 위험해질 일을 하려는 이유가 대체 뭔지. 애초에 나는 주인공급이 그렇게 집착할 만한 인물이 아니지 않은가. 완전히 그 상태였다. ‘저기요, 왜 엑스트라인 저한테 그렇게 집착하세요?!’ 하는 로맨스 판타지의 클리셰.
어차피 클리셰는 내 것이 아니다. 나는 클리셰와 사이다가 이루어지기 위한 도구일 뿐이지, 그 주체는 아니었다.
세르타도 어느새 내 앞에 앉아 같이 식사를 시작했다. 주인과 겸상은 안 될 말 어쩌고 할 줄 알았는데 그러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는 이 초원 생활이 생각보다 마음에 든 듯했다. 아침마다 여기보다 더 위쪽에 있는 목장으로 새 우유를 사러 가는 것도, 우물에서 물을 길어 와 집에 채워두는 것도, 이틀에 한 번씩 시장에 내려가는 것도. 매일 하루 내내 집 창문을 다시 달거나, 아궁이 속을 청소하거나, 나무를 베러 가거나 하며 전원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나 때문에 혼자 고생하는 건가 싶었는데 표정이나 평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걸 보면 아무래도 나름 즐기는 게 맞다. 세르타, 사실은 귀촌하고 싶었던 거 아닐까.
나는 그냥 탑에 있을 때랑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서 뒹굴뒹굴하고 책을 읽고 산책하고 목욕하는 게 다다. 세르타가 시장에서 사다 주는 최신 통속 소설이 요즘의 낙이었다.
어차피 아무도 없기 때문에 로브도 쓰지 않고 지낸다. 여름 더위를 막아주는 로브를 벗었지만, 산속의 여름은 생각보다 쾌적했다. 한 번 세르타를 따라 시장에 갔었다. 어차피 나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을 것이기에 가벼운 차림으로. 얼굴을 가리는 후드 없이 해가 쨍쨍한 무더위 속을 걷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수도에서는 항상 로브 차림으로 다녀서 몰랐는데, 초록이 가득한 곳은 불볕 아래더라도 열섬으로 달구어진 한국의 도심과 완전히 달랐다.
이렇게 평화로워도 되나 싶은 시간이었다. 시우가 말했던 호수 축제도 지나가고, 어느덧 루아의 달 20일이었다. 여름의 마지막 달이 절반이나 지나간 것이다. 사실 호수 축제 날에는 아테올이 어떤 모습을 했을지 잠깐씩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밤에 목이 말라서 깼는데 침대 머리맡의 주전자가 비어 있었다. 저녁에 절반쯤 남아 있어서 세르타가 새로 채우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갈증이 나 내가 다 마셔버린 탓이었다.
주전자를 들고 조용히 거실로 나간 순간 나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거실 소파에 키 큰 남자가 구겨지다시피 누워 있었다. 그는 내 기척을 느끼자마자 눈을 반짝 뜨고는 언제 잠들었었냐는 듯 휙 일어났다.
“무슨 일이십니까, 유리 님?”
“……왜 거기서 자고 있어?”
“아…….”
세르타가 민망한 듯 웃었다. 어둠 속에서 봐서 그런지 더 흑막 같은 웃음이었다. 세르타에 대해 몰랐으면 정말이지 나를 습격할 생각으로 숨어들었다고 의심할 뻔했다.
“혹시나 위험한 일이 생길까 걱정이 되어 줄곧 이곳에서 잤습니다.”
자기 방을 두고 여태까지? 그랬는데 이제야 알았다니, 나도 참 나였다.
“이전에도 한 번 그런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제가 한순간 방심하여…….”
“…….”
옛날이야기가 나오려고 한다. 위기감을 느꼈지만, 다행히 세르타의 말은 길어지지 않았다. 나는 대충 뭐, 응, 그랬지, 정도로 대답하면서 넘겼다.
“……저도 유리 님과 함께 참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이렇게 단둘이 보내는 시간은 드물었으니까요. 외람된 말씀이오나 저는 이렇게 유리 님과 시간을 보내게 된 게 조금은 기쁘기도 합니다. 유리 님도 편안해 보이시고요.”
수도는 지금쯤 내가 없어져 발칵 뒤집어졌을 텐데, 철저하게 유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고였다. 양심이 따끔따끔 아파왔다. 하마터면 여기서 ‘나는 네가 아는 그 유리가 아니야.’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뻔했다. 그러지 못했고, 하지도 못할 테지만.
역시 하루라도 빨리 세르타를 두고 떠나는 게 나을 것 같다.
***
다음 날 나는 혼자서 시장에 나갔다. 세르타가 이곳에서 돌아갈 테니 마지막으로 내 흔적이 남는 건 여기가 된다. 기왕 흔적이 남는 거, 여기서 보석과 금을 팔 수 있는 만큼 팔아버릴 생각이었다. 큰 마을이 아니어서 얼마나 매입해 줄 수 있을지 모르는 게 문제였다.
몇 시간 정도 작은 보석상과 금 가게, 전당포까지 돌아다닌 결과, 시세보다 낮은 금액으로 팔았는데도 꽤 많은 돈을 얻을 수 있었다. 금화 50개. 언제 마법이 없어질지 모르니 공용 포털을 맘대로 타고 다닐 돈까지 생각해도 사치만 안 한다면 앞으로 몇 년은 여유롭다.
금화를 품에 잘 숨기고 산을 올랐다. 마지막으로 세르타의 얼굴을 한 번 본 다음에 떠날 생각이었다. 어차피 포털은 그 오두막을 지나서 좀 더 위쪽에 있으니까. 세르타에게, 클로든과 벨에게도 미안했다고 전해 달라고 해야지. 편지를 쓸 걸 그랬나……. 아니, 편지도 기만으로 보일 거야. 많이 실망하겠지. 전생에 모든 게 밝혀졌던 순간, 그들의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늘 생각했던 것과 같이, 지금도 그들은 조금쯤 짐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제 갑자기 옛날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뭐였을까. 대놓고 나를 시험할 수 없으니까 그런 식으로 나온 걸지도. 어쩌면 내가 과민한 건지도 모르고. 어쨌든, 차라리 빨리 알게 되는 게 낫다. 내가 사라지면 그들은 모든 걸 알게 될 테니까. 그때 이미 그들의 진짜 유리는 기억을 잃은 채 황궁에 있다. 그러니 괜찮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참 걸어 오두막에 도착했을 때였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
싸늘하고…… 비릿하고, 불길한 기분. 정적. 퍼뜩 굳었던 나는 빠르게 손을 뻗어, 문을 밀치듯 열었다.
피 냄새가 확 몰려들었다.
“윽…….”
나도 모르게 손등으로 코를 가리는데, 집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온통 피투성이였다. 벽에도, 바닥에도. 그리고 그 피의 중심에는…….
“오랜만입니다.”
아테올이 검을 들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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