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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52화 (52/93)
  • 52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잘못됐다.

    잘못돼도 아주 크게 잘못됐다. 나는 일으키기도 어려운 몸을 간신히 뒤집으며 생각했다. 아테올은 어젯밤 나타나서 오늘 새벽에 사라졌다. 그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내 몸은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렸다. 12로 가득 차 있던 체력이 0이 될 때까지.

    이건 정말 아닌 것 같다. 아테올은 아주 미친놈이었다. 기어이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며 까무룩 기절할 때도 아테올은 내 안에 들어와 있었다. 기절했다가 어렴풋이 그가 내 뺨에 입 맞추는 걸 느끼고 다시 눈을 뜨니 정오가 다 된 시간이었다. 아테올이 조례를 나가고도 한참 더 잔 것이다.

    ‘잘못됐어…….’

    이건 도를 넘지 않았나?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나도 아테올이랑 하는 게…… 싫은 건 아니었지만, 정도라는 게 있지 않은가.

    아테올이 얼마나 꼼꼼하게 씻겨놓았는지 몸에 지저분한 부분이라곤 없었다. 안쪽까지도 깨끗한 걸 보며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한참 이불에 머리를 파묻은 채 있다가 어정어정 일어나 옷을 주워 입었다. 목과 손등까지 완전히 덮는 도톰한 옷이었다.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티타임 조금 전, 새로 즉위하신 황제 폐하는 한창 다망할 시각이었다. 이대로 아테올에게 기를 쪽쪽 빨리면서 대공과 시우를 두려워하며 살아갈 앞날에 대해 한 시간 정도 생각했다.

    그 한 시간은 의미가 있었다. 나는 역시 도망치기로 결론을 내렸다. 처음에는 워낙 정신이 없어서 실패했지만, 두 번의 실패는 없다. 클로든을 불러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잠깐 탑을 비울 거야. 아테올이 날 잡으려 할 테니, 알아서 잘 막아줘.”

    “탑을 비우신다고요? 어디로 가시려고…….”

    “그건 도착해서 말해 줄게.”

    어디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야지. 하지만 지금은 어디로 마실이라도 가는 것처럼 가볍게 말해야 의심을 안 산다. 과연 클로든은 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를 내보낸 뒤에 다시 짐을 쌌다. 탑주는 수없이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는 나중에 세공하겠다며 방치해 둔 보석 원석이나 금붙이도 포함되었다. 꼬리가 잡히지 않을 만한 귀중품 말이다.

    그런 것들을 위주로 가방에 슥슥 집어넣고 로브를 입었다.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탑주님.”

    “응. ……아테올이 생각보다 강경하게 막으려 들지도 모르니까, 세르타랑 벨도 따라오라고 해줘. 내가 포털에 들어갈 때까지만 그를 저지하면 돼.”

    “……알겠습니다.”

    클로든은 개운치 않은 기색이었다. 당연하다. 내가 무슨 죄짓고 도망치는 사람처럼 굴고 있으니까.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죄를 짓고 도망치는 게 맞았다.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다가 들킬 것 같으니까 재물까지 훔쳐서 달아나는 거거든.

    내가 이용할 수 있는 포털은 탑 안과 바깥 곳곳에 있었다. 그중에서 탑 안의 포털은 다 목적지를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정말 비상시에 쓰려고 만든 곳은 마차를 타고 가야 하는 사냥터 근처에 자리했다. 원거리용 포털은 아예 황궁 성문 밖에 있었고.

    아테올이 곧바로 목적지를 알 수 있는 곳은 곤란했기에 사냥터까지 가기로 했다. 사냥터의 포털은 아주 오래되어서 목적지를 탑주밖에 알지 못한다. 도착해서 다음 포털로 이동할 때까지의 시간은 벌 수 있다.

    원래 마법 포털은 그 포털을 만든 이보다 상위의 마법사가 찾으려 하면 수색이 가능하다. 즉, 가장 강한 마법사인 탑주가 만든 포털은 아무도 읽어낼 수 없었다. 도망치기에 아주 적격이다. 나는 진짜 유리만 아는 포털을 두어 군데 알고 있었고, 이건 내 탈출에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곧바로 마차를 타고 사냥터로 출발했다. 클로든도, 세르타도, 벨도, 내심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이었으나 내가 무게를 잡고 있어서인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사냥터는 엎어지면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사실 뛰어서도 올 수 있을 정도다. 금방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세르타와 벨이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당황해서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아테올이 말을 타고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아니, 대체 어떻게 알고 여기로 바로 온 거야? 서둘러 포털로 가려 했으나 아테올은 귀신처럼 훅훅 다가왔고, 내가 한 걸음을 채 떼기도 전에 말에서 뛰어내리며 나를 등 뒤에 숨긴 세르타에게 검을 휘둘렀다. 카앙, 금속이 공기를 가르고 검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비켜라.”

    “그럴 수 없습니다.”

    “네놈들이 감히…….”

    “저희는 호위 기사의 임무를 다할 뿐입니다, 폐하.”

    세르타와 벨이 번갈아 말하며 아테올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막상막하였지만, 제국에서 가장 강하다는 세르타와 그다음으로 꼽히는 벨을 한 번에 당해 내는 건 아테올에게도 어려운 일인지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검기까지 사용해 가며 요란하게 얽혀 싸우는 세 사람을 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멍하니 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언제 아테올이 풀려날지 모르니 빨리 도망쳐야 했다.

    “갈게, 클로든. 너무 걱정하지 마.”

    게이지는 깎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며 포털로 발을 옮겼다. 막 두 발을 다 긴 직선 위에 올린 순간, 누군가가 옷자락을 잡았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동시에 온몸이 빛에 감싸이면서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우당탕. 멀쩡히 서서 도착해야 할 포털 너머에, 나는 누군가와 뒤엉킨 채 떨어져 뒤로 넘어졌다. 내 옷자락을 잡았던 사람이 다급하게 손을 뻗어 나를 받쳤다. 덕분에 소리는 요란했지만 떨어진 충격은 전혀 없었다.

    설마 아테올이 따라온 건가. 얼굴이 창백해져서 올려다보는데, 눈에 들어온 얼굴은…….

    “괜찮으십니까, 탑주님?”

    세르타였다. 그는 몸싸움을 하며 조금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는 레몬색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포털을 이동하며 생긴 바람이 가라앉고 주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무로 지은 집, 창밖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풀 냄새 섞인 바람. 포털의 목적지인 이르우 산맥 한 자락의 작은 집이었다.

    제대로 도착한 건 좋은데 생각도 하지 않은 손님이 따라왔다. 차라리 아테올이 따라왔다면 이렇게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세르타, 네가 왜.”

    “아무래도 탑주님만 보내는 게 걱정이 되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일은 아니긴 한데. 그렇게 생각하며 보니 내가 세르타의 아래에 미묘한 자세로 깔려 있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았겠지만, 바로 어제 아테올과 신나게 뒹굴어댔던 터라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나는 재빨리 세르타의 몸 아래에서 빠져나왔다. 내가 묘하게 굴자 세르타까지 덩달아 민망해졌는지 다시 한번 사과를 했다.

    “사과할 것 없어. 음, 아테올 상대로 상당하던데.”

    재빨리 말을 돌리자 세르타도 머쓱하게 웃었다.

    “저도 나잇값은 해야지요.”

    나이……. 아테올보다 많긴 하지. 나잇값이라고까지 해야 할 정도인가 싶지만. 몸을 털며 일어난 그가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날 일으켜주었다. 관리하는 사람 하나 없는데도 깨끗한 집 안을 휙 둘러보는데 세르타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런데, 탑주님.”

    “왜?”

    “어째서 굳이…….”

    “…….”

    “……아무것도 아닙니다.”

    뭔가 물으려던 그는 내 표정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왜 굳이 이렇게 도망치듯 왔느냐고 묻고 싶은 거겠지. 도망 맞다. 세르타가 따라오지만 않았으면 완벽한 도망이었을 거다. 나는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계획을 조금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여기는 수도에서 가까운 편이다. 여기서 다음 포털을 찾아 다른 곳으로 이동할 생각이었지만, 그 포털의 위치는 역시 탑주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그 위치도, 그곳을 통해서 어디로 갈 수 있는지도 굳이 세르타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수도에서 가까운 곳. 흠,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도 있고, 수도의 소식도 들어야 하고, 세르타를 돌려보내는 데도 너무 먼 곳보다는 여기가 낫겠지. 당분간 여기서 버티는 걸로 해볼까. 가지고 온 보석을 팔지 않아도 이곳에 당장 먹고 입을 것은 있으니 괜찮을 듯했다.

    “당분간 여기서 나가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필요한 물건은 대강 갖추어져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찬장이며 서랍장 같은 곳을 뒤적거렸다. 밀가루, 싹이 난 듯 만 듯한 감자, 말린 고기와 야채 같은 식재료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포털의 목적지가 집인 경우에는 대부분 이랬다. 며칠 틀어박혀 먹을 게 갖춰져 있고……. 세탁실에서 나가는 시장 거리 뒷골목의 집도 사실 이곳과 비슷했다. 가짜 탑주의 기억인지 뭔지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뒤뜰에는 우물도 있으니 정말 밖에 나가지 않고도 버틸 수 있을 거다. 한동안 버티다가 적당한 핑계를 대고 혼자 나갔다가 그대로 사라지면 끝이다.

    다들 처음에는 나를 찾겠지만, 내가 가짜라는 걸 알면 금방 포기하겠지. 사칭범을 찾느라 시간을 낭비하기엔 돌아온 진짜를 모실 시간도 부족하지 않은가.

    “청소를 좀 하겠습니다. 잠시 산책이라도 하고 오시지요.”

    세르타가 망토와 검집을 풀며 말했다.

    “청소? 깨끗한데?”

    “그래도 오래 비워둔 곳이니…….”

    마법으로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었는데. 괜한 고생으로 보였지만 하겠다는데 굳이 말릴 이유도 없었다. 그의 말대로 밖으로 나왔다. 산맥에서 내려온 시원한 바람이 불었고, 저 멀리까지 펼쳐진 푸른 초원은 눈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아직 여름이 한창이다. 나는 로브를 벗어서 팔에 걸쳤다. 습한 더위는 느껴졌지만, 그래도 바람이 차가워 나쁘지 않았다.

    집 근처를 서성거리다가 돌아가자 세르타가 막 청소를 마치고 밖에서 이불을 털던 참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기분 탓인지 정말로 조금 전보다 반짝반짝하게 윤이 났다.

    “부족하지 않게 탑주님을 모시겠습니다.”

    흠, 세르타는 이 집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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