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이벤트 발생!]
오늘 아테올은 공식적으로 휴일입니다. 아테올과 함께 시우를 찾아가 볼까요?
진짜 열받는다…….
연회 동안 조금만 밖으로 나가려 해도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게이지 때문에 나는 정말 아테올의 침실에 갇혀 있었다. 처음 돌아와서 부서진 문고리를 보고 폭소하던 아테올은 내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보고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 그 순간 특별 호감도가 올라가기까지 했다.
그러다 연회가 끝난 오늘 아침에 이런 이벤트가 뜬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혼자서 찾아가려고 할 땐 그렇게 게이지를 팍팍 깎아대더니 갑자기 이벤트까지 발생시키면서 시우를 찾아가라고? 아테올이랑 같이 가느냐 여부가 중요했던 건가.
흠, 어쩌면 시스템이 아테올과 시우의 만남을 늘려서 둘 사이에 뭔가를 만들어 보려고 하는 건지도 몰랐다. 아닌가? 그런 건 시우와 아테올이 한 궁에 살고 있을 때 충분히 만들 수 있었나? 아무튼 나는 원래 시우를 만나는 게 목적이었다. 이벤트까지 떴는데 거부할 이유가 없었기에, 식사를 마친 후 아테올을 구슬려 시우에게 갔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대공이 아직 4황자 궁에 있는데요.”
“…….”
내가 대공을 불편해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시우를 만나러 간 거니 시우만 나오기를 바라며 4황자 궁으로 갔으나, 자리는 어째서인지 자연스럽게 사자 대면이 되고 말았다. 대공은 시우와 가까운 자리에 앉아 냉기를 풀풀 날렸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시우는 보호자인 대공이 옆에 있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잘 떠들었다.
“곧 호수 축제네요. 무척 기대돼요. 저는 물놀이를 좋아하거든요.”
“그러고 보니 그렇군.”
루아의 달 13일이 호수 축제였으니 이제 열흘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호수 축제에서는 내가 딱히 할 일이 없기에 굳이 신경을 쓴 적이 없다. 아테올은 다르겠지만. 호수 축제가 되면 사람들은 호수에서 길어 온 물로 손과 몸을 씻거나, 호수에서 목욕을 하곤 한다.
전통적으로 새로 즉위한 황제는 처음 맞이하는 호수 축제에서 목욕하는 장면을 보여주곤 했다. 국민들 앞에서 벌이는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문득 이 젊은 황제가 몸을 적시는 모습을 보러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릴지 궁금해졌다.
“탑주님, 호수 축제는 언제부터 이렇게 정착한 건가요? 호수 축제 말고 다른 축제나 기념일도요. 누군가 처음 시작한 사람이 있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모두가 당연시하는 축제로 자리를 잡은 건지…….”
“글쎄, 아무래도 왕궁과 마탑에서 주도적으로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답하고 나자 뭔가 어색했다. 내가 꼭 축제가 처음 시작됐을 때부터 지금까지 지켜봐 온 사람처럼 대답하고 있었다. 기억을 잃은 시우야 그렇게 물어볼 수 있지만 나는 뭐야. 웃기는 일이었다. 그러나 시우가 질문하는 것마다 내 입에서는 술술 답이 흘러나왔다. 나 지금 무의식중에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있는 거 아니겠지. 아테올과 대공이 딱히 토 달지 않는 걸 보면 맞게 말하는 것 같은데.
그동안 읽은 책의 내용이 머릿속에 남은 거거나, 아니면 가짜 마법사의 기억일지도.
[호감도: 시우]
50%
시우는 필■링이 너무 강■■ 아무 말■ ■ ■ ■■■ㅠㅠ
뭐라는 거냐……. 그래도 호감도가 올라간 건 좋은 일이었다.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대공이 갑자기 손을 뻗더니 시우의 앞에 케이크를 내려놓았다. 막 뭔가를 더 떠들려 하던 시우는 그걸 보고 곧바로 입을 다물고 포크를 들었다. 대공이 흘끗 그 모습을 보더니 다시 제대로 앉아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뭐지?
……뭐지?
방금 대공의 행동이 꼭…….
“당신을 질투하는 것처럼 보였는데요.”
아테올이 나한테도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저쪽에게는 케이크를 집어 주는 것만큼이나 꼴같잖은 모습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아테올의 말에 동의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시우가 들떠 나와 대화하는 모습에 대공이 꼭 나를 질투한 것처럼 보인다. 아니, 설마. 저 일만 오천 년 동안 한 번도 녹은 적 없는 빙산 같은 얼굴로.
하지만 추측은 확신이 되었다. 그 후로 대공은 계속 시우의 질문을 끊으며 그를 방해했고, 그러다 급기야 나를 흘끔 보기까지 했다. 긴 속눈썹이 드리워진 검은 눈동자에는 탐탁지 않은 기색이 어려 있었다. 세상에, 진짜로 로아네스 대공이 나를 질투하고 있는 거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조카나 사촌과 결혼하는 일이 흔하니 장차 시우가 대공비가 될 수도 있는 건가. 시우는 나보다 약간 연상으로 보였으니까 대공과 결혼한다면 상당히 나이 차이가 있는 부부가 된다.
덕분에 점점 시우는 말이 없어졌고 분위기가 식었다. 그래도 호감도는 만족스러울 만큼 올렸기에 이쯤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4황자궁을 나서자마자 아테올에게 말했다.
“나는 탑으로 돌아갈 거야.”
“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읍. 잡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상쾌한 반응이었다. 어쨌든 보내준다는데 안 갈 이유가 없었다.
탑으로 돌아오자마자 벨을 찾았다.
“부르셨습니까, 탑주님.”
오늘은 머리를 옆으로 땋아 내려서 묶은 벨이 언제나처럼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벨, 전에 로아네스 대공을 찾아갔을 때 말이야. 대공이 뭘 키우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었지.”
“네? 네, 그렇죠. 대공 전하가 자기 입으로 말했습니다. 요즘 뭘 키우는데 키우는 재미가 있다고요. 그런 표정은 처음이라 신기했습니다.”
그 신기한 처음 보는 표정 나도 본 것 같단 말이지. 설마, 하는 의심이 슬그머니 확신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대공이 키운다던, 비 오는 날 주운 특이한 동물. 그게 아마 시우가 아닐까. 대공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표현하고도 남는다.
“그거 아무래도 동물이 아니고 사람인 것 같은데.”
“네? 사람이요?”
“대공의 조카 말이야. 지금 4황자 궁에 있는.”
“네에에에에?”
벨이 거의 펄쩍 뛰어오를 듯 놀랐다. 벨의 뒤에 서 있던 클로든도 놀라서 눈을 둥글게 떴다. 그 둘이 만일 결혼하게 된다면 어떨까. 그거야말로 의심할 나위 없는 마탑과 황실의 결합이다. 문제는 그 후에 대공이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느냐인데……. 대공 자리에 만족할 거였다면 굳이 시우를 데리고 움직이기 시작했을까? 설마, 사랑에 눈이 멀어서 시우의 원래 지위를 찾아주려고? 으음.
“그럼 대공 전하가 갑자기 조카를 수도로 보낸 것도 이해가 가는군요. 황궁에 손님으로 오래 머물다 왔다고 하면 아무래도 지위가 좀 더 보장되니…….”
클로든이 말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았다. 그럴 수도, 하고 대답하며 상태창을 보았다. 시우의 호감도는 50%……. 그런데 내가 쳐다본 순간 띠링, 하며 숫자가 움직여 1%가 올랐다.
그 순간 머릿속에 이상한 장면이 지나갔다. 내가, 아니, 유리인가? 아니면 가짜 마법사? 후드를 깊게 눌러쓴 로브 차림의 한 남자가 호숫가를 걷고 있었다. 그러나 그뿐. 거기서 장면은 끝났다. 마치 백일몽을 꾼 듯한 기분이었다. 이게 도대체 뭐지?
[이벤트 성공!]
과연 대공의 마음은……?
안내 문구가 나왔는데 왜 하필 이 타이밍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벤트는 잘 끝난 모양이다. 성공과 실패의 기준도 모르겠고 거기서 뭐가 달라지는지도, 보상으로 뭐가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이벤트가 나오면 반사적으로 행동을 하긴 하지만 결과에 신경 쓰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51%라는 글자를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대체 호감도란 뭘까.
말 그대로 호감의 정도라고 여겼다. 하지만 퀘스트를 진행할수록 그런 단순한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숨겨진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또 그 때.
tip: 장미는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장미.
“……?”
그래서?
뭐 어쩌라고.
장미는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장미. 그게 다였다. 다른 덧붙임이 없다. 호감도가 호감도 같지 않아도 호감도라는 건가? 뭔가 다른 느낌이긴 한데. 아니면 그건가? 호감도는 사실 명칭일 뿐이고 역시 다른 스탯인 걸까. 부르기는 호감도라고 부르는데 사실 다른 스탯인 거지. 근데 그래서 어떤 스탯이냐고.
“하…….”
“왜 그러십니까?”
벨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머리가 좀 복잡해서. ……클로든. 약이 이제 없어. 에레토에게 말해서 더 받아다 줘.”
“벌써요?”
클로든이 미간을 좁혔다. 벨이 있는 자리에서 말하면 잔소리가 덜할 거라 생각해서 말했는데, 역시 통했는지 그는 다른 말을 더 얹지 않고 알겠습니다, 하며 에레토를 부르러 사라졌다.
“여전히 잠을 잘 못 주무세요? 외출이라도 하고 올까요?”
“저번에도 경위서 열 장이나 썼잖아, 벨.”
“헤헤. 탑주님을 위해서라면 백 장도 쓸 수 있습니다. 제가 글솜씨가 좋거든요. 비슷한 말을 길게 늘려 쓰는 데는 천재적이죠.”
눈물겨운 충성심이었다. 전에 강아지 축제에 같이 나갔던 걸 클로든은 그냥 눈감아 줬는데, 세르타가 문제였다. 거기서 아테올을 만난 것 때문에 세르타가 나와 벨의 외출 사실을 알고 말았고, 벨은 추가 훈련을 잔뜩 받은 후에 경위서까지 열 장이나 써야 했다. 나도 세르타에게 잔소리를 조금 들었다.
“괜찮아. 오늘은 아마…….”
밤에 아테올이 찾아올 것 같으니까. 그 말은 삼키고 하지 않았지만, 벨은 뭘 짐작했는지 네에, 하며 아쉬운 표정만 지었다.
이번엔 아테올의 호감도를 확인했다. 호감도도, 특별 호감도도 전혀 움직임 없이 똑같았다. 시우처럼 상태창을 쳐다보고 있으면 1%쯤 오르지 않을까 싶어 빤히 바라보았으나 시야가 흐리멍덩해질 뿐이었다. 호감도가 호감에 대한 게 아니라면, 뭘까? 전혀 뜬금없는 것일지도.
그날 밤, 아테올은 내가 예상한 대로 탑을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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