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짐이 잘그락 소리를 내며 내던져졌다. 아테올은 나를 그대로 떠밀어 침대 쪽으로 끌고 가더니 침대에 채 이르지도 못한 상태에서 키스했다. 입술이 맞닿고 옷의 끈이 풀어졌다. 입술이 꽉 맞물려 숨을 쉴 수 없게 되자 어지러웠다. 아주 많이. ……심상치 않을 정도로 많이.
깜빡깜빡, 어두워졌다 밝아지는 시야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건 당황한 아테올의 얼굴과 ‘체력: 0’이라는 메시지였다.
***
깨어나니 이번에야말로 낯선 천장이었다. 정말 낯설었다. 마탑만큼 화려하지만 느낌이 조금 다른 천장의 장식과 휘장의 색, 늘어진 보석 줄. 여기가 어디인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황제의 침전입니다.”
아, 그렇구나……. 어쩐지 낯설더라.
근데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식사를 준비하게 했습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
식사라니. 지금 내 체력에 반가운 소리지만,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냐니까. 흘끗 아테올을 쳐다보자 그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첫날밤은 여기서 보내고 싶어서요.”
“……이상한 표현 쓰지 마. 헷갈리잖아.”
첫날밤이라니, 누가 들으면 오해한다. 그러나 아테올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헷갈리긴요. 당신이 생각하시는 뜻 그대로입니다. 우선은 식사를 해야겠지만.”
그 때 마침 밖에서 시종들이 문을 두드렸다. 아테올의 허락에 문이 열렸다. 희미하게 풍겨오는 음식 냄새에 배가 확 고파졌다. 아직도 체력 3 정도에서 회복되지 않은 몸이 빨리 음식을 집어넣으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시종들이 음식을 차리고 나가자, 아테올은 그중 몇 가지를 같이 들어온 쟁반에 직접 올려 침대로 가지고 왔다. 겉을 불에 바싹 그슬린 매운 생선찜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돼지기름으로 구운 자고새와, 그 속을 꽉 채운 고소한 찹쌀은 말할 것도 없었다. 후자는 거의 트럭에서 파는 옛날 통닭과 비슷했다.
아테올은 직접 내 접시에 음식을 덜어 주며 식사 시중을 들었다. 중간중간 테이블로 가서 다른 음식을 덜어 오가면서. 어느 정도 배가 차 샐러드와 음료만 깨작거리기 시작하자 그는 후식을 들여오게 했다.
후식은 아주 익숙한 것들이 나왔다. 마탑에서 즐겨 먹던 것 그대로였다. 체리 과육이 통째로 들어간 촉촉한 젤리를 먹고 있자니 아테올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후식은 마탑에 가서 만들어 가지고 온 겁니다.”
아, 어쩐지 익숙하더라니.
“마탑과 황제궁의 조리장이 앞으로 서로 교류를 많이 할 겁니다.”
“……왜?”
“황제궁에서도 당신이 입맛에 맞는 식사를 하실 수 있어야죠.”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그러다 퍼뜩 생각했다. 이 자식 진짜로 나를 도망치게 해줄 마음이 없다. 그보다 지금 대관식 연회가 한창일 때 아닌가?
“너 연회는 어쩌고 여기 있어?”
“잠깐쯤은 자리를 비워도 괜찮죠. 저도 사람인데 잘 시간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사람이라니. 당연한 말인데 왜 이렇게 어색하지? 빤히 아테올을 쳐다보자, 그는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어떤 포인트인지 알기라도 한다는 듯 픽 웃었다.
“역시 당신은 이상하게 저를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라 무서운 거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곤 은근히 다가오려 하기에 화려한 옷에 감싸인 가슴팍을 탁 밀어냈다. 단단하고 두꺼운 가슴의 감촉이 옷 너머로도 느껴져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씻을 거야.”
아테올은 순순히 물러나며 욕실 방향을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욕실 시중까지 들어주겠다면서 따라 들어오면 소리라도 버럭 지를까 했는데, 다행히 그러진 않았다. 나는 최대한 느리게 몸을 씻고 나갔다. 그사이 연회장을 너무 오래 비운 아테올이 돌아가 있기를 바라면서.
내 바람은 시원하게 빗나갔다. 아테올은 저 무거운 옷을 입고 힘들지도 않은지 꼿꼿한 자세로 여전히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서」. 심오한 듯 쉬운 듯한 제목이었다.
“그, 그건 무슨 책이야.”
딱히 궁금한 건 아니었지만, 책으로 화제를 돌리는 게 덜 어색할 것 같아 물었다. 아테올이 무거운 책을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 올려 보여주었다.
“기억 상실에 관한 책입니다.”
“…….”
내가 기억을 잃었다고 말한 걸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건지. 시우도 기억 상실이긴 한데 그가 시우 때문에 굳이 저런 책까지 읽진 않을 것 같고. 욕실 입구 근처에서 괜히 서성대는 나에게 아테올이 일어나 다가왔다.
“머리를 말리셔야지요.”
나는 말없이 따뜻한 바람을 일으켰다. 바람이 머리를 스치고 나자 머리카락은 언제 감았냐는 듯이 말끔하게 말랐다. 아테올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을 뿐 굴하지 않았다.
“그럼 빗겨드리겠습니다.”
그러곤 기어이 나를 품에 안고 데려가서 자기 다리 사이에 앉혔다. 순간 기지를 발휘해 스스로 머리를 빗어보려 했으나, 적당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빗을 저절로 움직이게 하는 것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우물쭈물하면서 몸을 빼내 도망치려다 곧바로 허리를 안겨 붙들렸다. 아테올이 여유롭게 빗을 들었다.
“빗어도 지저분해. 그냥 놔두라고.”
“안 빗어도 지저분하니 빗죠.”
이게 무슨 무논리지? 입을 벌린 사이 부드러운 빗이 머리에 닿았다. 사락사락 머리카락을 스치며 이어지는 빗질은 묘한 느낌이었다. 클로든이나 시종들이 할 때는 한 번도 이런 느낌이 안 들었는데, 하는 사람한테 흑심이 있어서인가. 생각하기가 무섭게 아테올은 빗질로 드러난 내 목뒤에 슬쩍 입을 맞췄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빼며 쏘아붙였다.
“그럴 거면 하지 마.”
“그럴 거면, 이라니요?”
모르는 척하긴! 얄밉다. 다시 벗어나려 바르작거려 봤지만 소용없었다. 아테올의 굵은 팔은 몸을 옭아맨 오래된 나무줄기 같았다. 아니면 거미줄. 나는 거기에 걸린 곤충.
아테올은 내 목에 계속 키스하고, 손을 앞으로 뻗어 얇은 옷 위에서 가슴을 만졌다. 금방 곤두선 유두가 옷 위로도 튀어나와서는 아테올의 손가락에 쉽게 걸렸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빗은 어디론가 도망가고, 아테올은 날 두 팔로 안은 채 지분거리고 있었다.
이대로 분위기에 휩쓸려버릴 것 같다. 발끝을 꾸물거리고 있는데, 어둠 속에 빛이 내리듯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아테올이 잔뜩 짜증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문밖의 사람은 그에 굴하지 않았다.
“접니다, 레사. 연회장에서 사람들이 다 폐하를 찾고 있습니다.”
“……빨리 가 봐.”
기회는 이때다 싶어 아테올을 밀어내며 말했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았는지, 그는 한숨을 한 번 쉬고는 일어났다. 애초에 책이나 읽으면서 여유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금방 돌아올 테니 쉬고 계십시오.”
“금방 안 와도 돼. 사흘 낮 사흘 밤 동안 연회를 지키는 게 황제의 의무이자 덕목이라고.”
“저는 의무와 덕목을 애써 지키지 않는 폭군이 될 거라서.”
나는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아테올이 말하니 농담 같지 않다. 노크 소리는 ‘똑똑’에서 ‘쾅쾅쾅쾅쾅’ 정도로 점점 커졌다. 아테올은 결국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일어났다.
“나갈 테니 그만 두드려.”
“조속하게 부탁드립니다.”
“가. 조속하게.”
피식 웃은 아테올이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침실에서 빠져나갔다. 겨우 혼자가 되었다.
혼자 남겨지자 생각할 시간이 생겼다. 분명히 지금쯤 보석을 잔뜩 들고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도착해 있어야 했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속았어.’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테올에게 속았다. 무사히 도망치게 해준다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손바닥 뒤집듯이 말을 바꿨다. 배신감보다는 ‘앞으로 어쩌지?’라는 생각 쪽이 강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대공은 의미심장하고, 아테올은 가짜를 진짜로 바꾸겠다고 하고 있다. 그 사이에서 나는……. 나는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테올을 황제로 만들려 한 시점에서부터 이미 전생의 내용은 모두 뒤엉켜 그대로 흐르지 않고 있다. 어떤 시기에 누가 방문하고, 이런 것조차 흐트러졌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은 특별한 일 없이 침대 위를 뒹굴뒹굴해야 하는 때인데 아테올의 대관식이라는 큰 사건이 일어나고, 거기에 로아네스 대공이 등장했다.
원래 대공의 등장 시점은 좀 더 뒤였다. 대공의 얼굴을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고. 아마 지금부터 1년은 더 지난 뒤 아니었던가? 그게 확 앞당겨진 데다 안부나 주고받던 대공과 나의 관계가 미묘해졌다.
대공이 대관식에서 한 말이 그냥 아무 의미 없는 거였다면?
그건 아니지. 달빛을 배경으로 총이 클로즈업되면 그 총은 반드시 쏘아진다. 대공의 눈빛, 말투, 말의 내용. 그건 완전히 달빛 속의 선명한 총 한 자루였다.
이제 이야기는 전생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거다. 회귀의 의미가 전혀 없었다. 이래서 상태창이 생겼던 건가? 회귀는 보통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다는 강점을 위해 존재하는 장치인데, 그걸 못 쓰게 될 테니 대신 도움이 되라고.
아니지. 어쩌면 전생대로 흘러가지 않기에 상태창이 나타난 건지도 몰랐다. 회귀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어차피 전생에는 이번 생에 도움이 될 만큼 의미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시우가 있다. 전생의 기억 따위 시우의 존재 앞에서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는 그냥 도망치고 싶었다. 내가 도망침으로써 자연스럽게 시우가 진짜 유리임이 밝혀지고, 그사이에 나는 꼭꼭 숨어 아무도 날 죽이지 못하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죽는 건 정말 싫으니까.
“후…….”
나는 무기력한 몸을 일으켰다. 이러지 말고 시우라도 찾아가 보자. 시우의 호감도를 올리면 뭔가 돌파구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시우는 아직 연회장에 있을까. 없으면 4황자 궁으로 가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문고리를 돌렸을 때였다.
‘응……?’
철컥, 철컥. 몇 번을 돌려도 마찬가지였다. 문은 잠겨 있었다.
‘아테올…….’
이…… 이 미친놈. 문을 밖에서 잠그고 간 것이다. 기가 막혔다. 그런다고 내가 못 나갈 줄 아나? 마력을 모아 문고리를 부수자 문은 맥없이 열렸지만 다른 난관이 생겼다. 게이지가 팍 깎였다. 이 망할 게이지. 그래, 전생의 내가 문을 부수고 탈출하는 대담한 행동을 할 수 있었을 리 없지. 내가 진짜 너무 소심하게 살았다. 갓 빙의해서 세상 모든 게 낯선 상태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게이지가 깎이거나 말거나 성큼성큼 걸어서 연회장으로, 가려고 했지만.
“…….”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챙그랑거리며 떨어지는 게이지 때문에 결국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욕이 저절로 나왔다. 하늘을 쳐다보며 분노를 삭이고 있는데 나를 조롱하듯이 눈앞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tip: 아테올의 호감도가 높아지면 행동의 제약이 사라집니다!]
하, 씨, 누구 놀리냐! 나는 상태창이 있는 허공을 향해 주먹질을 하고는 씩씩거리며 침대로 돌아와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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