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로아네스 대공, 네이아 유이 로아네스. 올해 서른두 살로 북부 접경지의 철벽같은 수호자이자 노련한 전쟁 영웅. 예장용 검에 손을 얹은 그녀는 나크사벨의 추위를 그대로 두르고 온 것처럼 냉랭하고 엄격한 표정을 한 채 서 있었다.
저절로 그녀에게 시선이 갔다. 나뿐 아니라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황실의 핏줄은 누구나 얼굴만은 뛰어났다. 그 황실의 핏줄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아름다운 얼굴에 북부 출신 친가의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이 더해지니 신비한 분위기까지 감돌았고, 거기에 무수한 전쟁을 겪은 사람 특유의 강철 같은 단단함으로 무장까지 하니 눈을 뗄 수 없었다.
빤히 대공을 쳐다보고 있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뭔가 싶어 눈을 돌리자, 아테올이 하라는 대관식은 안 하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음, 아테올을 보니까 또 아테올에게 눈이 묶였다. 아테올과 로아네스 대공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둘 다 무인이라는 게 확연했으나, 뭐랄까, 척박한 동토의 패자(霸者)와 새로운 영토의 정복자라고 하면 되려나. 둘이 나이도 차이가 났으니 더욱 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얼굴은 닮았으나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마주 섰다. 로아네스 대공이 절도 있게 망토를 펼치며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새로운 황제 폐하께 나크사벨의 로아네스가 인사드립니다. 영화로운 치세를.”
“일어나라, 대공.”
그리고 대공은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황제에게 직접 인사할 신분은 되지 않는 시우가 대공의 동반으로 미리 와서 앉아 있다가 반갑게 대공을 맞이했다. 별 뜻 없이 대공과 시우를 보고 있던 나는 한순간 눈을 의심했다. 대공이 시우를 보며 살짝 미소 지은 것이다.
세상에. 6년 동안 몇 번 안 되긴 하지만 대공을 보긴 보았는데, 그리고 수없이 많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웃는 건 처음이다. 내 조카에겐 따뜻한 북부 대공인 건가? 굉장한데.
흘끔흘끔 대공과 시우의 자리를 구경했지만 웃은 건 그 한 번이 전부였다.
길고 지루한 입장 행렬과 이런저런 사람들의 축복사가 지나갔다. 이런저런 사람들에는 나도 끼어 있었다. 내가 단상에 오르자 주위가 다 술렁거렸다. 왜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무시하고 할 말만 한 뒤 내려왔다.
그때부터 태양신의 고행이 끝나고 평화의 상징인 달이 떠오를 때까지 길게 이어지는 식순 내내 아테올과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다. 점점 사람들이 우리 쪽을 보면서 속삭거리는 게 느껴져 나중엔 아테올 쪽을 쳐다보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드디어 자정. 달이 가장 높게 떠 있으며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 나는 내게 다가오는 아테올을 바라보았다. 그는 길게 늘어지는 화려한 망토로 갈아입은 채였다. 옷 무게만 수십 킬로그램은 나갈 것 같은데 그런 걸 입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그는 붉은 눈을 빛내며 나에게 걸어왔다. 왕관을 받기 위해서였다.
엄숙한 음악이 천장이 높은 실내를 크게 울렸다. 저벅저벅 다가온 아테올이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천천히 왕관을 집어 아테올의 머리에 얹었다. 칼레우스가 황태자로 즉위할 때 한 번 해보았던 터라 어렵지 않았다. 전생과 다른 행동이라서인지 게이지가 깎였지만, 게이지보다는 지금 아테올의 대관식을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게 더 중요했다. 며칠 앓지 뭐.
이어 왕홀과 향합까지 건넨 뒤 그의 이마에 키스했다. 처음 그가 나를 수행했을 때 했던 것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가슴이 이상하게 두근거린다. 황제가 된 아테올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음악이 고조되고, 나는 손을 들어 허공에서 가볍게 흔들었다. 5층 높이는 될 천장 위에서부터 방울방울 작은 형태가 빛처럼 맺히더니 이내 그것이 꽃으로 개화하여 사방에 흩날렸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환호하는 목소리와 음악, 꽃잎. 향합에서 흘러나오는 우아한 향기. 아테올은 드디어 황제가 되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불시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보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호감도도, 특별 호감도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감정이 나쁘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식순이 모두 끝난 후에는 사흘 낮 사흘 밤을 이어지는 연회였다. 아테올은 불행하게도 그 사흘 낮밤 동안 거의 내내 연회장을 지켜야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이미 체력의 한계다. 여기서 주섬주섬 뭘 먹고 싶지도 않고. 적당히 음료 종류만 마시고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누군가가 다가왔다. 로아네스 대공과 시우였다.
“가장 높은 탑의 주인을 뵙습니다.”
“아……. 대공. 잘 지냈어?”
“예, 덕분에. 일전에 보내주신 선물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야.”
게이지가 푹푹 깎이고 있었다. 하지만 대공과 대화를 안 할 수는 없다. 대공이 시우를 무슨 생각으로 데리고 있는지 알아야 했으니까. 그에 따라서 내가 언제 도망칠지 여부가 정해지지 않겠는가.
“조카가 황궁에서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대공은 시우의 어깨에 한 손을 올리며 말했다. 시우보다 대공이 더 키가 컸다. 과연 무슨 말을 할까, 어떻게 떠봐야 좋을까 고민했으나…… 고민은 쓸데없는 일이었다.
“조카는 기억을 잃은지라 아직 예법도, 말도 부족한 부분이 많아서요. 혹시 실례는 없었는지요. 탑의…….”
로아네스 대공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나를 보았다.
“……주인이시여?”
“…….”
얼음물을 등에 쏟아부은 기분이었다.
***
왜 그러시는 거냐고 놀라는 클로든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도망치듯 탑으로 돌아왔다. 대공의 그 눈빛. 말투. 마지막에 시우의 어깨에 얹은 채 꽉 쥐던 손. 의미심장했다. 어쩌면 내가 확대 해석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불안하다. 불길했다. 로아네스 대공은 내가 가짜라는 걸 알고 있을 수도 있다.
탑에 돌아오자마자 짐을 싸기 시작했다. 가볍고 비싼 것을 그냥 대충 쓸어 담았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일단 무작정 도망치면 아테올이 수습해 주겠지. 그러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도 말했다. 제국에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진짜 유리라고. 나는, 난 가짜니까 어차피 필요도 없다. 들켜서 또 죽기 전에 어떻게든 도망가야 했다. 죽는 건 너무 무섭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짐을 챙기고 있는데 클로든이 문을 두드렸다. 나는 재빨리 침대 이불 속에 싸던 짐을 던져 넣고, 직접 나가서 문을 열었다.
“탑주님……?”
놀랐는지 클로든이 눈을 둥글게 뜨고 있다.
“연회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곧바로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뀐다. 나는 자동 반사처럼 고개를 마구 저으며 아니, 아니, 하고 중얼거렸다.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사람처럼 보인다.
“폐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아테올이?”
연회장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기엔 왜 왔어. 아니, 하지만 지금 아테올이 온 게 다행인지도 몰랐다. 그에게 의논하면 좀 더 제대로 도망칠 방법을 찾아줄 수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번 보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잠시 후 아테올이 침실로 들어왔다. 연회에서 입고 있던 차림 그대로였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불룩한 침대를 한번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저건 뭡니까?”
“짐. 도망치려고.”
“……도망이요?”
“그래. 로아네스 대공이 이상해. 내가 가짜인 걸 아는 것 같아.”
나는 말하면서 이불 속에서 꾸러미를 다시 꺼내 들여다보았다. 덜 챙긴 것 같기도 하고 많은 것 같기도 했다. 너무 많아도 한 번에 팔 수 없으니 문제였다. 나눠서 팔면 되긴 하지만 그러다 덜미라도 잡히면 큰일이다. 진짜 유리가 돌아오면 나는 마법도 못 쓰게 될 텐데.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아테올이 다가왔다.
“너, 넌 연회는 어쩌고 여기서 이러고 있어?”
“당신이 놀란 토끼처럼 도망가기에 걱정이 돼서 따라왔습니다.”
“토……, 아무튼 잘 왔어. 나는 지금 도망갈 거야. 뒷일은 네가 알아서 해줘. 로아네스 대공이 뭔가 하기 전에 선수 치면 될 거야. 그리고 내 안전은 꼭 보장해 줘야 하고……. 나 정말 죽은 듯이 살 테니까.”
“아니요.”
“뭐가 아냐? 다른 방법 있어?”
“글쎄요. 다른 방법은 모르겠군요.”
왜 이래. 어느새 아테올이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이것 좀 놔. 나 지금 바로 갈 거야. 더 좋은 방법 있나 들어보려고 했는데 없다니 그냥 가는 수밖에…….”
“아뇨, 당신은 아무 데도 못 갑니다.”
“……뭐?”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얼이 빠져서 아테올을 보다가 겨우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는 확 언성을 높였다.
“약속 지켜!”
“무슨 약속이요?”
“날 도망가게 해준다고 했잖아. 어차피 제국에 필요한 건 진짜 유리라며!”
“도망가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진 않았습니다. 지켜주겠다고 했죠. 그리고 제국에 필요한 건 진짜 유리인 것도 맞고요.”
갑자기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답답해져서 손목을 뿌리치려 했으나, 아무리 팔을 휘둘러도 아테올은 떨어지지 않았다.
“예전에 인어의 심장이라는 보석이 도난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내가 알 리가 있냐.
“도난 사실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축복하는 국보가 도난당한 게 밝혀지면 난리가 날 테니까요.”
“그게 지금 무슨…….”
“그것과 같습니다. 황실은 도난 사실을 밝히느니 모조품을 숭배하기를 선택했죠. 지금도 제국 박물관 높은 자리에 있는 인어의 심장은 가짜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 가짜를 보고 아름답다고 칭송하지요.”
아테올이 고개를 기울여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진짜라 믿으면 그 순간부터 진짜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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