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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48화 (48/93)

48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황제는 빠르게 양위를 결정했다. 칼레우스의 설득이 있었던 건 말할 것도 없다. 설득이었는지 협박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들은 확실하게 자식 농사에 실패했다. 하나는 배신자, 둘은 멍청이, 다른 하나는 망나니로 자랐으니까. 그 다른 하나를 키우는 데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긴 해도.

칼레우스가 이번 일에 얼마나 연관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발 앞서서 황태자 자리에서 물러나고, 황제 부부의 죄를 실토시키는 데에 큰 역할까지 했으니, 거기다 대고 ‘거기서 네가 가담한 부분은?’이라고 대놓고 묻기 어려워진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의 배후가 칼레우스일 수도 있는데. 황제와 황후의 자백이야, 뭐……. 그들이 아예 가담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만, 자기 목숨이라도 부지하게 해달라고 하는 맏아들의 부탁을 차마 외면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차기 황제로는 물론 아테올이 지목되었다. 그와 동시에 마탑과 황궁의 결혼설도 심심치 않게 돌고 있었다. 뭐,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나중에 자연스럽게 무산된다 해도 실망할 사람들이나 좀 실망하지 큰 문제로 번지진 않을 거였다. 탑의 주인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변덕스러웠으니까.

나, 아니, 이번 ‘유리 아이엘레스’가 아마 22대. 대만 바뀔 뿐 계승식 등에 관한 정보가 하나도 없어서 짐작만 하자면, 탑의 주인은 달라이 라마와 비슷했다. 같은 이름을 가지고 같은 사람으로 취급되지만 사실은 계승되는. 영혼을 이어받는다거나, 그런 개념인 모양이다. 마법도 같이 이어받고. 사람이 영원히 살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어쨌든 그 지나간 모든 탑주들의 기록에 변덕스러운 기행이 꼭 한두 번씩은 있었다.

‘유리’라는 이름을 이어받으면 그렇게 되는 건지, 탑의 터가 안 좋은 건지. 아무튼 그러니 분홍색 무드를 조성하다가 갑자기 쌩하고 달아나도, ‘또 변덕을 부리시는구나!’ 하고 말 거라는 뜻이다. 아테올이야 처음부터 내가 가짜라는 걸 아는 상태였고.

“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책상으로 시선을 내렸다. 책상에는 얇은 책자 여러 권이 펼쳐진 채 놓여 있었다. 열 장 남짓한 양피지 장정 책자에 천의 샘플까지 붙여서 만든 의상 도안들이었다. 하나같이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실 이것보다 더 많은 가봉 의상 샘플을 이미 입어보았고, 그중에서 추려 다시 고를 수 있도록 책으로 만든 것이다.

아테올의 대관식에서 입을 의상이었다.

어차피 로브 안에 가려질 텐데 안에 입을 옷의 섬세한 디테일까지 다 챙겼다. 옷을 만들 때마다 생각하지만 의미 없는 짓인데, 이번에는 그 화려함이 몇 배나 더 뛰었으니……. 내가 대관식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람.

급기야 나는 책자를 전부 덮어서 눈을 감고 여러 번 섞은 뒤에 자연스럽게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책자가 바닥에 산처럼 쌓였다. 그중 가장 위에 있는 책자를 집어 들었을 때, 놀란 클로든이 문을 벌컥 열었다.

“탑주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큰 소리가…….”

“아무것도 아니야. 이걸로 할게. 내가 정리할 거니까 나가도 돼.”

수많은 활자 속 디자이너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귀찮으니 어쩔 수 없다. 클로든은 내가 내민 책자를 들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쪼그리고 앉아 널브러진 책자들을 주섬주섬 집었다.

아테올의 대관식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관식의 주인공은 마지막으로 만난 날 이후 문안 서신 외에는 아무런 연락이 없다. 무슨 오류인지 상태창에도 99%의 기본 호감도만 보이고 특별 호감도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아침마다 날아오는 문안 서신에도 기본적인 말만 적혀 있을 뿐, 그의 마음이 드러나는 글귀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테올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긴…… 무슨 생각을 하면 어때.

그런데 만약에 내가 떠난 후에 아테올이 마탑으로 돌아온 시우랑 결혼한다면?

‘…….’

하하, 그런 일이…….

“…….”

나는 다시 클로든을 불렀다.

***

아테올은 원활한 대관식 준비를 위해서 황태자궁으로 거처를 잠시 옮겼고, 텅 빈 4황자 궁에는 시우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시우는 갑자기 찾아온 나를 정말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맞이했다. 놀랍게도 아주 반갑지 않은 기색은 또 아니었다.

상태창 말로는 시우의 호감도를 올리는 게 아테올의 마지막 1%를 채우는 것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 시우를 쳐다보았지만 거기서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선물을 준비해 왔는데.”

“서, 선물이요? 저한테 말씀이세요?”

시우가 깜짝 놀라 몸을 퍼덕이다가 차를 엎을 뻔했다. 저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클로든에게 손짓해 가지고 온 선물을 꺼내게 했다. 별로 대단한 물건은 아니었다. 그래도 무슨 게임이건 호감도 올리기에는 선물만 한 게 없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아테올한테는 한 번도 선물을 한 적이 없네. 설마 그래서 1%가 안 오르는 건 아니겠지.

“책 읽는 걸 좋아한다면서?”

“네, 아직 말이 많이 서툴러서…….”

부끄러운 듯 대답하며 시우가 포장을 풀었다. 책과 필사할 수 있는 노트, 펜과 잉크였다. 4황자 궁에도 갖춰진 물건이겠지만 성의가 느껴지는 물건으로 골라보았다.

[호감도: 시우]

25%

이번엔 부연 설명은 없네. 그래,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있어도 열불만 나던데. 시우가 노트와 책을 가만히 넘겨보더니 얼굴을 붉혔다. 나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음침한 기운은 훨씬 덜하다. 뭐가 다른 거지? 부러웠다.

“감사합니다, 탑주님. 제가 글 쓰는 걸 정말 좋아하거든요.”

“잘됐네.”

뭐야. 취향에 딱 맞는 선물을 했는데 호감도 오르는 게 영 시원치 않네. 아테올은 선물도 없이 엄청 가파르게 올랐던 것 같은데. 설마 시우하고도 접촉을 하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불길함에 눈을 내리까는 척 상태창을 보았으나 그런 말은 없었다.

시우는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나도 적극적으로 말을 붙이지 않았으므로 티 테이블에는 자주 정적이 내려앉았다. 시우는 불편했는지 아무 말이나 꺼냈고, 난 적당히, 그러면서도 최대한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주로 수도나 제국에 관한 이야기였다. 내가 시우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건 아니었는지 말할 때마다 호감도가 +1씩 찔끔찔끔 올랐다.

“저…… 탑주님은, 만약에 기억을 잃으면 어떨 것 같으세요?”

“기억……?”

역시 자기가 기억 상실이라는 걸 신경 쓰고 있는 건가. 그게 사실이긴 한지부터 의심하는 입장에서 듣자니 좀 미안한 마음도 드는 질문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실, 잃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아, 그, 그렇죠. 맞아요. 그렇겠죠.”

시우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고는 얼굴이 빨개졌다가 고개를 약간 숙이며 웃음 비슷한 걸 지었다.

“부러워요…….”

[호감도: 시우]

35%

왜 여기서 오르냐. 정말 알 수가 없네. 기가 막혀하던 그 순간, 머릿속에 이상한 느낌이 지나갔다. 이게 뭔지 몰라서 눈을 깜빡였다. 뭐랄까, 조명이 갑자기 머릿속을 한 번 비추고 간 듯한. 이게 뭐지?

뇌출혈 전조 증상 같은 건가?

아니, 아니, 그럴 리 없고 그렇다고 해도 자가 치유로 어떻게 되겠지. 머리를 작게 휘저어 멍청한 생각을 털어냈다. 시우의 호감도가 올라서 그런 건가? 호감도가 오른 건 시우인데 왜 나한테 이런 느낌이. 혹시나 해서 시우에게 물었다.

“방금 이상한 느낌 같은 거 안 들었어?”

“느낌이요? 어떤……. 잘 모르겠어요.”

“아니, 아무것도 아냐.”

내가 생각해도 너무 뜬금없었다. 호감도는 거기서 더 이상 오르지 않았고, 나와 시우의 만남은 적당히 마무리되었다. 몇 번 더 찾아가 빨리빨리 호감도를 올리고 싶었으나, 아테올의 대관식 준비인데도 내가 할 일이 많아 바빠서 그러지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대관식 당일이 되고 말았다.

대로에는 온종일 색색의 꽃잎이 휘날렸고 수천 송이의 만개한 장미와 작약, 그리고 새로운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금화가 뿌려졌다. 오늘을 위해 화려하게 치장된 마차 두 대에 아테올과 내가 각각 올라타, 수도 내성 벽의 정문인 태양의 문에서 황궁까지 이어진 대로를 직선으로 행진하게 되어 있었다.

정오. 태양신이 가장 높은 자리에서 세상을 비추는 시간에 대관식은 시작되었다. 황금빛으로 휘감아 눈이 부실 지경인 호위대가 선두를 장식하며 여덟 마리의 백마가 이끄는 아테올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황제의 대관식이었기에 나는 그 뒤를 따라갔다.

머리를 완벽하게 넘기고 황제의 의복을 입은 아테올은 정말 태양처럼 찬란했다. 승리를 상징하는 붉은 망토, 번영을 상징하는 황금 장신구, 위엄을 상징하는 검은색 제복. 각기 같은 색으로 꼼꼼히 자수와 장식이 들어간 옷은 눈이 튀어나올 만큼 화려했으나, 아테올의 외모도 그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망나니 행세를 완전히 버린 그는 누구보다 당당하고 빛나는 눈을 가진 젊은 황제였다. 그 압도적인 분위기에 ‘4황자가……?’라며 걱정하던 사람들의 목소리도 단번에 수그러들 것 같았다.

반면 나는 언제나와 같이 로브 후드로 얼굴을 가린 음침한 모습이었다. 이 화려한 분위기 속에 있는데도 지지 않고 음울할 수 있다는 게 대단하다면 대단했다. 적당히 손을 흔들어주는데, 대로 옆을 빼곡하게 메운 사람들 사이에서 ‘황제 폐하 만세!’ 같은 당연한 말 말고도 ‘성혼(成婚)을 축하드립니다.’ 등등의 앞서간 말이 튀어나와 슬그머니 무시해야 했다.

긴 행진을 거쳐 대관식 행렬이 황궁에 도착했다. 그것만으로 나는 이미 지쳤다. 체력이 벌써 8까지 떨어져 있었다. 그나마도 도착하자마자 클로든을 시켜 달콤한 마실 것을 가지고 오게 해서 회복한 거였다.

아테올이 자신의 자리로 가고, 손님의 입장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칼레우스를 비롯한 황자들이 입장했다. 칼레우스와 레오나, 아리스트. 칼레우스는 여유로운 얼굴이었고 나머지 둘의 얼굴은 당연히 좋지 못했지만, 권력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웃는 체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서. 황자들보다는 조금 더 시선이 가는 인물이었다. 황족이자 대공. 그 유명한 소설 속 북부 대공을(소설이지만)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사람.

검은 긴 머리를 늘어뜨린 훤칠한 키의 여성이 청회색 망토에 짙은 남색 제복을 입은 채 입구에 섰다.

“나크사벨의 로아네스 대공 전하가 입장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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