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깨어나자 범인은 잡힌 뒤였다. 내가 지목한 그곳에서. 간당간당한 게이지를 보며 내가 6년 전 이맘때쯤 뭘 하고 있었는지 생각하느라 애써야 했다. 딱히 뭘 하진 않았다. 그냥 침대에 누워서 뒹굴뒹굴했을 뿐. 덕분에 며칠 동안 누워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요양한 것만으로 게이지는 제법 채워졌다.
그러는 사이 살인 사건 범인의 심문은 계속 미뤄지고 있었다. 누가 심문의 주체를 맡느냐를 두고 토론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국립 재판소에는 아홉 명의 최고 재판관이 있었는데, 말은 완벽한 중립이라고 하지만 당연히 파벌이 존재했다. 가장 크게는 황제파와 반황제파다.
그중에서 중심 재판관을 황제파가 맡느냐, 반황제파가 맡느냐, 양익(兩翼) 재판관 두 사람을 다 같은 파벌로 채우느냐 마느냐, 그런 문제를 두고 치열한 갑론을박이 한창이었다.
내가 누워 있던 며칠 동안 범인은 하염없이 방치되었다는 뜻이다. 좀 일어날 만해졌을 때, 나는 곧바로 황궁 감옥으로 향했다. 지금 누가 재판할지를 두고 침이나 튀겨댈 때가 아니었다. 범인을 보호해야 했다.
보호라고 하니까 말이 이상하지만…… 그 범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가에 따라 앞으로 양위 논란의 향방이 결정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불리해질 쪽은 어떻게든 범인의 입을 막기 위해 애쓸 테고.
탑 아래로 내려가자 미리 연락을 받은 아테올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소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왜?”
드물게도 대놓고 그러고 있기에 묻자, 그는 버릇처럼 눈썹을 까딱였다.
“아직 좀 더 누워 계셔야 하는 게 아닌가 해서요.”
“클로든 같은 소리를 하네……. 갑자기 웬 걱정이야…….”
적응이 안 되어 말하자 아테올은 살짝 충격받은 표정을 하더니 그 후로 입을 다물었다. 마차는 황궁 지하 감옥까지 빠르게 달렸다. 열어둔 창밖에서 장마철의 미적지근한 바람이 들어왔다.
아테올을 앞장세우고 황궁 지하 감옥의 미끌미끌한 계단을 밟아 내려가던 중, 그가 갑자기 팔을 뻗어 내 걸음을 막았다.
“또 왜.”
아테올은 가만히 나를 돌아보았다.
“피 냄새가 납니다.”
“피 냄새?”
코를 킁킁거리자 정말로 비릿한 냄새가 습기 사이사이를 떠돌고 있었다. 젖은 돌이나 흙에서 나는 냄새라 생각해 그냥 넘겼는데 피 냄새였다니,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나는 아테올의 등을 툭 밀었다.
“빨리.”
그러자 아테올은 뛰다시피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피 냄새가 점점 짙어졌다. 드디어 가장 안쪽, 살인 사건 범인을 가둔 감옥 앞에 이르렀을 때, 아테올은 걸음을 멈추고 망토를 들어서 내 시야를 차단했다.
“……뭐야…….”
“안 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짙은 피 냄새. 설마 범인이 죽기라도 한 건가. 다급하게 아테올의 팔을 밀치고 앞으로 나아가자 내 눈에 보인 건 뜻밖의 인물이었다.
“……가장 높은 탑의 주인을 뵙습니다.”
철컹, 칼이 바닥에 닿는 소리와 함께 그 인물이 무릎을 꿇었다. 피 묻은 칼을 옆에 두고 앉은 건 다름 아닌 칼레우스였다.
“태자가 왜 여기에 있지?”
“범인을 살피러 왔었다가…….”
칼레우스가 흘끗 옆을 보았다. 나는 흠칫했다. 낭자한 피 웅덩이 속에 한 사람이 목과 몸이 분리된 채 뒹굴고 있었다. 새카만 옷에 얼굴이 완전히 가려진 두건 차림. ……범인은 아니었다. 얼른 고개를 돌리자 범인은 창살 안쪽 구석에 딱 달라붙어 처박힌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암살자로 보입니다. 범인을 막 공격하려 하고 있었기에 마음이 급하여……. 고귀한 분의 눈을 더럽혔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간발의 차로 암살자가 왔었고, 그 암살자가 범인을 죽일 뻔한 걸 칼레우스가 저지했다는 건가? 그런 우연이. 뭔가 다른 내막이 있는 건 아닐까. 아테올을 보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칼레우스를 노려볼 뿐이었다. 손짓해서 칼레우스를 일으키니 뒤늦게 간수와 경비병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칼레우스가 혀를 찼다.
“오늘 감옥 경비에 나섰던 인원, 그 경비를 책임지는 직위에 있는 자들은 모두 파면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재판에 참석해야 할 것이다.”
그의 엄중한 목소리에 간수와 경비병들의 얼굴이 파래졌다. 암살자가 침입하는 것을 저들이 방비하지 못했다는 건 이미 일어난 일이니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한 번이 두 번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칼레우스를 보며 말했다.
“범인은 마탑의 미궁 지하로 옮겨 갈 거야. 불만은?”
“없습니다. 탑주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야 이 상황에서 당연히 불만이 없겠지. 칼레우스에게 묻긴 했지만, 사실 그가 불만을 제기할 입장도 아니고. 나는 그대로 돌아섰다. 내 뜻대로 살인 사건의 범인은 미궁 지하에 있는 마탑 감옥에 수감되었다. 범인에게는 끔찍한 일일 거다. 황궁 지하 감옥도 열악하지만, 마탑은 그에 비할 바가 못 되니까. 삶의 질 수직 하락이다. 그러게 누가 살인 같은 거 하랬나.
마탑 감옥으로 끌려온 뒤 범인은 전부 털어놓을 테니까 여기서 나가게 해주거나 차라리 죽여달라고 계속 울부짖었다는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드디어 정해진 재판 당일까지 범인은 계속 그곳에 갇혀 있었다.
재판 당일.
여느 재판정이 그렇듯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묵묵히 착석했다. 나는 높은 곳에 위치하나 발언을 하거나 재판관에게 눈치를 줄 수는 없는 자리에 앉아 있었고, 내 옆 두 자리는 텅 빈 채였다. 원래는 황제와 황후가 앉는 자리였다. 하지만 지금 그 두 사람은 재판의 참고인으로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범인의 자백과 어떤 인물의 증언으로 인하여 이번 연쇄 살인 사건의 배후로 지목받고 참고인이 되었다. 당연히 본인들은 부정했지만, 부정한다고 해서 혐의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덕분에 나는 이 자리에 혼자 앉는 신세가 되었다.
엄숙하고 중요한 재판이었으나 온갖 선언문을 낭독하고, 여러 신들과 기타 등등에게 맹세하고, 사건의 시종 전말을 읊는 과정은 눈물이 나도록 지루했다. 나는 의자에 똑바로 앉아 있는 것에만 집중하며 이런저런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증인석에 기다리던 인물이 나왔다.
칼레우스였다.
“증인에게 묻습니다. 증인은…….”
또다시 긴 선언문 낭독이 끝나고 정숙해진 재판정에서 재판관이 물었다.
“이번 사건의 배후에 황제 폐하나 황후 폐하, 혹은 두 분 폐하가 모두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합니까?”
“확신합니다.”
“어떻게 확신합니까?”
“범인이 있는 감옥에.”
칼레우스의 시선이 자신의 양친에게 향했다.
“황실 비밀 기사단의 기사가 침입하여 범인을 암살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순식간에 재판정이 소란스러워졌다. 최고 재판관이 법봉을 들어 탕탕 내리쳤다.
“정숙! 정숙하시오!”
소란은 한참 후에야 가라앉았다.
“증인이 암살자가 황실의 비밀 기사단임을 확언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아시다시피 비밀 기사단은 황제, 황후, 황태자를 보호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얼굴을 아는 건 당연합니다. 또한 그자의 손가락에 특이한 모양의 흉터가 있어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내가 다시 한번 술렁거렸다. 범인의 자백에 이어 나온 증언. 상황은 확실히 황제와 황후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황제가 비밀 기사단까지 보내어 입막음을 하려 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큰 증거가 아니겠는가.
“증거로 황실 비밀 기사단 단원의 명부 중 한 장을 공개합니다.”
비밀 기사단은 말 그대로 비밀 기사단이었다. 비밀스럽기가 국정원 같아서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고, 이렇게 문제가 터질 때만 복잡한 과정을 거쳐 서류 공개가 승인된다.
재판관들의 손에 서류가 넘어갔다. 감옥에서 칼레우스에게 죽은 암살자의 얼굴 그림과 비밀 기사단원임을 증명하는 서류, 두 장이었다. 볼 것도 없이 서로 일치할 것이다.
시선을 비스듬히 내렸다. 아테올이 앉아 있는 위치였다. 눈길을 느꼈는지 아테올도 힐끗 고개를 들었고,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가 입을 벙끗거렸다. ‘끝났네요.’ 슬쩍 웃는 얼굴이 좀 얄미웠다.
그의 말대로 재판은 끝났다. 범인은 사형을 구형받았고, 황제와 황후에게는 당장 형을 내리진 못했으나 연쇄 살인을 교사했음이 사실상 인정되었다. 이 소식이 제국에 존재하는 모든 신문에 대서특필될 것이다.
게다가 칼레우스는 아무리 암살자였다 해도 중요한 참고인이 될 사람을 함부로 죽인 책임을 지겠다며 스스로 황태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쉬운 일이었다. 이 사건을 빌미로 해서 칼레우스까지 싸잡아 보낼 기회였는데, 저렇게 몸을 빼다니. 칼레우스가 나선 덕분에 일이 쉬워지긴 했으나, 정작 그를 처리하기는 어려워졌다. 머리를 자르려고 했는데 머리가 자기 몸통을 다 집어삼키고 혼자 살아남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직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으나 이제 남은 건 하나였다. 아테올의 제위 계승. 2황자와 3황자는 어차피 생각할 거리도 되지 않는다. 둘 다 한없이 존재감이 희미한 멍청이들이니까. 자기 목숨을 보전하길 원하는 저 머리통이 아테올의 순탄한 계승을 위해 발 벗고 나서줄 테고. 뒤로 무엇을 꾸미는지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재판이 끝나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밖으로 나섰다. 기자들이 모두 돌아갔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직 일부가 나를 기다렸는지 어정거리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아테올이 서 있다. 세르타에게 눈짓하자 벨이 재빨리 움직여 재판정 앞으로 마차를 가지고 왔다.
기왕 기자들이 보고 있는 거, 확실하게 해두는 게 낫지.
“아테올.”
“네.”
기자들은 재빨리 수첩에 무언가를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나와 아테올에게 쏠린 채였다. 마차가 도착했고, 나는 그쪽으로 가볍게 손짓했다. 타라는 손짓이었다. 아테올이 깊게 고개를 숙이고는 마차에 올랐다. 나도 세르타의 손을 잡고 따라 타며 흘끔 기자들 쪽을 보았다. 후드 때문에 보이지 않겠지만 시선이 닿은 정도는 알 것이다.
마차의 문이 닫히고 난 뒤, 저마다 기사를 쓰기 위해 물세례 맞은 개미 떼처럼 흩어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내일이면 제국에 내가 아테올에게 청혼이라도 한 것처럼 소문이 퍼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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