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설마 이 세계에 와서 연쇄 살인이라는 단어를 듣게 될 줄이야.
지난 며칠 동안 수도는 들썩거렸다. 똑같은 방식으로 살해당한 시신이 연달아 발견되어서였다. 첫 발견은 나와 아테올이 외출했다 돌아오던 날, 어느 허름한 집에서 달려 나오던 사람을 본 그날이었다.
그 사람이 살인범이라는 건 아니었다. 그랬으면 우리도 이미 조사를 받았을 테니까. 그는 첫 번째 시신을 발견한 운 나쁜 사람이었을 뿐이다. 제일 운이 나쁜 건 물론 살해당한 사람이지만…….
닷새 동안 무려 세 건. 동일한, 그리고 꽤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당한 시신 옆에는 모두 동일한 내용의 쪽지가 놓여 있었다. 「선정을 베푸시는 황제 폐하에게 부당하고 불온한 요구를 멈춰라.」 그러니까, 양위 요구를 멈추라는 말이었다.
당연히 난리가 났다. 두 명 이상 모이는 곳에서는 빠지지 않고 이 문제를 둘러싼 토론이 벌어졌다. 탑에서는 클로든과 세르타의 단속으로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으나, 황궁까지만 나가도 하인과 시종들이 모여 심각하게 속닥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양위에 대해 마뜩잖게 생각하던 사람들이 기세가 등등하여 튀어나왔다. 말하자면 신전의 권위와 황제……, 정확히는 현 황제 한 사람의 권위가 맞붙는 것이었는데, 정치적 능력의 유무를 떠나 황제라면 그저 신처럼 떠받드는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섣불리 양위라는 말을 꺼내선 안 되었다’, ‘아니다, 이건 황제와 그 세력이 꾸민 일인지도 모르니 하루라도 빨리 양위해야 한다’, 이 두 의견을 바탕으로 해서 무수한 의견과 소문이 문어발처럼 뻗어 나갔다.
심지어 황제 폐하가(또는 황후 폐하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음산한 오두막에서 나오는 모습을 본 사람이 있다는 터무니없는 소문까지도 떠돌았다. 이건 아무리 내가 완전히 황제의 반대파가 되었다지만 수긍할 수 없는 말이었다. 황제와 황후에게는 건장한 사람 하나를 피투성이로 살해할 만큼의 체력과 근력이 없다.
지금까지 발견된 시신은 모두 신전에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이었고 그것 외의 공통점은 없었다. 신전으로 향하는 발길은 확 줄었지만, 열성적인 신도는 오히려 늘었다. 양위에 찬성하는 목소리와 반대하는 목소리가 서로 경쟁하듯 나날이 커졌다.
마탑을 향해 몰려드는 알현과 접견 요청은 눈치 빠른 클로든 덕분에 완전히 중단된 상태였다. 그러자 서신이 물밀듯 날아들었다. 그중에서 추리고 추린 것만 읽고, 클로든과 세르타의 보고를 받으면서 상황은 전부 파악할 수 있었다.
황제를 향한 것 정도는 아니었으나 나를 둘러싸고도 이런저런 말이 나왔다. 지난 국립 병원에서의 사건이 자작극 아니었냐는 논란은 칼레우스의 의도에서 빗나가 별다른 힘을 받지 못하고 사그라졌으나, 연쇄 살인이 벌어지면서 다시 불거졌다. 양위 신탁부터 수상쩍다는 의심이었다.
물론 이 의견은 마탑과 신전의 권위를 한꺼번에 무시하는 것이었으므로 크게는 대두되지 못했다. 특히 마탑. 사람들은 황제보다 나를 무서워하니까.
하지만 당장 하루걸러 한 번 꼴로 사람이 죽고 있다. 그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 신경 쓰지 말고 갈 길을 가시라 하는 목소리 등등, 서신의 내용은 다양했다.
내가 생각한 답은 이 문제를 나와 아테올이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 살인범이 원하는 바가 ‘양위 촉구를 중단하라’였기에 겁에 질린 사람들의 의견이 그쪽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지만, 범인이 잡히면 달라질 거다. 범인은 양위를 반대하는 파일 테니까 그 사람 입에서 황제 폐하를 위해 한 일이다, 라는 한마디만 나오면 공포는 분노로 바뀌고 양위에 대한 목소리는 더욱 커질 터였다.
나는 게이지를 한 번 확인하고 클로든을 불렀다.
“4황자 궁으로 갈 거야.”
“지금 바로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클로든은 다른 말 없이 준비를 해주었다. 아테올의 궁에 도착하자 시우 생각이 났지만, 지금 상황에 시우까지 챙길 수가 없었다. 일단 시우 공략은 뒤로 미뤄놓기로 했다.
미리 전갈을 받은 아테올이 궁 바깥까지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셔도 되는 겁니까? 뒤숭숭한 와중에.”
“뒤숭숭하니까 왔지.”
최소한 우리가 범인으로 의심받지는 않는 상황이라 움직임이 자유로웠다. 오히려 황제와 황후, 그리고 그 측근들이 힘들지. 살인하고 나오는 모습을 봤다는 소문까지 떠도는 마당이니.
“오늘 이 일을 해결할 거야.”
차를 내온 시종들이 물러가자마자 한 말에 아테올이 눈썹을 까딱였다.
“탑주님께서 직접 말씀이십니까?”
“제일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잖아.”
“그야 반박의 여지가 없습니다만……, 어떻게 하시려는 건지 여쭤도 될까요.”
나는 아테올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내게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부 너무 어려웠지만, 또 한편으론 너무 쉽게 해결이 가능한 것들이기도 했다.
***
깊은 밤, 나는 또다시 도시에서 가장 높은 첨탑 꼭대기에 발끝으로 서 있었다. 물론 이번엔 마탑의 꼭대기였다. 마탑은 수도와 제국뿐 아니라 대륙 전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으니.
높은 건물이 많지 않은 이곳에서는 멀리 산자락과 검게 보이는 강물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곳에 선 채 나는 일전에 마물을 찾아냈을 때와 같이 마력을 거미줄처럼 얇게 펼쳤다. 촘촘한 마력의 선이 빠른 속도로 수도 전체에 번져 나갔다.
아직 조사 중인 시신을 모두 확인하고 왔다. 마물이 기운을 남기듯, 사람도 강렬한 행동을 하고 간 자리에는 기척을 남기는 법이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시신 모두에 역시 같은 기운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걸 찾으러 여기까지 올라온 것이다.
시체를 조사하던 순간부터 게이지가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지노선을 10%로 잡고, 며칠 요양하자. 그런 각오였다. 거미줄은 점점 넓어졌다. 높은 곳 특유의 강한 바람이 후드를 젖히고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게이지가 실시간으로 깎여 나가고 있었다. 챙그랑, 챙그랑 소리에 바람 소리가 섞인다.
조용히 힘의 범위를 늘리기만 하던 내 거미줄에 무언가가 걸렸다.
그렇지, 안 걸릴 리 없지. 나는 탑 꼭대기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얼마나 높은지, 지상에 착지하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바로 밑에 서 있던 아테올은 또 나를 묘한 눈길로 보았다. 아마 그런 것 같았다. 어지러워서 잘 모르겠지만. 아, 토할 것 같다.
“23지구 라브스 거리 14번지. 여관 3층, 계단 올라가서 세 번째 방에 숨어 있어. 도망치지 않게 주의해서…….”
“탑주님!”
마지막으로 게이지를 확인했다. 15%쯤 되나? 눈앞이 뜨문뜨문 검게 보였다. 현기증이 엄청났고 하늘이 핑그르르 돌았다. 나는 그대로 기절했다.
***
아테올은 쓰러지는 유리의 몸을 급하게 받아 안았다. 그의 충실한 측근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유리, 아니, 본인은 유리가 아니라고 했던가. 그의 얼굴은 밀랍처럼 창백했고 숨도 끊어질 듯 가늘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되 무슨 제약이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는 침실로 옮겨졌다. 따라가는 걸 막으면 무력으로라도 어떻게든 할 생각이었으나, 다행히 아무도 저지하지 않았다. 부산스럽게 그의 곁을 오고 가는 측근들 사이에서 아테올은 태연히 침대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았다.
사실 마음은 썩 태연하지 못했다. 그가 마치 이대로 깨어나지 못할 사람처럼 다 죽어가는 얼굴로 누워 있었기 때문에. 타고난 침울함에 병의 기색까지 더해지자, 그의 얼굴은 한층 가련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이런 생각이나 할 상황은 아니었으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게 사실이었다.
본인이 말하기를, 진짜 탑주가 아닌 가짜.
하지만 이렇게 어려운 마법을 손가락 까딱하듯 가볍게 사용하면서 가짜라고? 차라리 처음에 기억을 잃었다고 말한 쪽이 더 신빙성 있었다. 아니면 기억에 문제가 생겼거나, 뭔가 일이 있어 자신이 가짜라고 믿게 되었거나.
그날, 무도회 이후로 벌써 달을 옮기는 신이 두 번 바뀌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와 퍽 가까워졌다고 생각한다.
그를 만날 때마다 아테올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정확히는 솔레트 기념관에서 만난 이후 계속, 이다. 그를 보고 있으면 때로 머릿속에서 뭔가가 부풀어 올랐다가 물거품처럼 꺼지곤 했다. 그리고 나날이,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호감이 점점 깊어진다? 그런 식으로 말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뭔가 다른 느낌이 든다. 호감이 아닌 무언가. 호감이라고 이름을 붙이기에는 성질이 다른 어떤 것이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돌며 자신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속삭인다.
그를 만나면서 꿈도 많이 꾸었다. 주로 그가 나오는 꿈이었다. 그와 함께 외출을 하기도 하고, 탑이나 황자궁에서 비밀스러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꿈에서 갔던 곳은 꼭 현실에서도 그를 데리고 가야 직성이 풀렸다. 지난번 과일 농장도 그랬다. 꿈에서 그는 사람들 틈에 섞이는 게 싫다며 언덕에 앉아 농장을 구경만 하더니, 현실에서도 똑같이 행동했다. 자신이 그의 성격을 알아서 그런 꿈을 꾼 걸 수도 있겠지만…… 묘했다. 마치 한번 겪었던 일을 꿈으로 꾼 것처럼.
그에게 어느 정도 정이 붙은 건 사실이다. 이건 호감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분명 호감과는 구분이 되는 다른 무언가가, 그를 만날 때마다 자꾸만 머릿속에서 몸집을 키운다. 이건 뭘까. 그는 자신에게 무슨 영향을 주고 있는 걸까.
아테올은 창백한 얼굴을 한참이나 가만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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