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호오.”
아테올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의견이 모두 모이는 대로 황제 폐하께 알현을 청할 예정입니다. 오늘의 이 일은…… 의견 합치에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럼 그 알현은 이제 황제에게 무조건 나쁜 방향으로 가겠군.
신전 연합의 목소리는 크다. 대신관이니 교황이니 하는 지위는 없지만, 신관은 무시할 수 없는 계층이었다. 각 신전과 신전구(區)의 대표들이 모여 하는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알현을 통해 황제에게 전달되고, 이것이 받아들여지느냐, 아니냐에 따라 때로 신관들이 신전을 폐관하기도 한다.
필요한 신을 찾아가서 기도하는 게 생활이 된 나라인 만큼, 그렇게 되면 국민들의 반발이 엄청나게 치솟는다. 해서 신전 연합과 황제의 밀고 당기기는 유구하게 이어져 왔다. 다만 이번에는 신탁이라는 명분이 있고, 나도 사실상 신전의 편에 섰다는 게 공고해진 만큼 압도적으로 연합에게 유리할 터다.
즉, 황제의 양위는 이제 시간문제라는 이야기였다.
아테올은 꽤 만족한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 대지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가겠다는 이야기였다. 금화 천 개에 유향과 몰약 열 상자, 그리고 후추와 정향과 팔각. 신관들의 얼굴이 저절로 밝아졌다.
나는 흘끗 아테올을 보았다. 마법이 발달했다고는 하나 아무래도 현대만큼 물류가 활발하지는 못했고, 그만큼 향신료는 귀했다. 거기에 금화는 한 개 값이 평범한 사람의 한 달 월급 정도였다. 또 유향과 몰약까지.
아무리 황족이 돈이 많아도 아테올은 그다지 대접받지 못하는 황자였다. 그런 그가 신전 한곳에 제물로 턱 내놓기에는 큰돈이다. 이때부터 이미 다른 주머니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뭐, 그런 문제는 나랑 상관없지만.
이야기를 마치고 일어날 때 신관들은 조용히, 나와 아테올에게 같은 예를 취했다. 이미 아테올을 황제로 대우하고 있다는 거다. 나는 모르는 척 앞장서서 밖으로 나왔다. 마차에 올라 아테올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제 생에 있을 리 없다고 믿었던 일이 일어나니 기뻐서요.”
“…….”
“물론 그건 당신 덕분이고요.”
난 물끄러미 아테올을 보았다. 흥, 당신 덕분이긴.
“내가 없었어도 너는 어떻게든 제위를 차지했을 거야.”
별생각 없이 뱉은 말이었는데 일순 공기가 조금 식었다. 후드를 살짝 걷고 아테올을 보자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좀 전보다 눈매가 냉정했다. 나를 가늠하듯이 보고 있다.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재미있으라고 한 말은 아냐.”
“뭐. 정답을 맞히셨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가 반란을 일으킬 거라고 얼굴에 쓰여 있기라도 한가요?”
반란이라는 말을 이렇게 당당하게 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아무리 양위가 어쩌고 해도 버젓이 황제가 살아 있는데.
“처음부터 네가 제일 절박해 보인다고 했잖아.”
“하하. 그러셨죠.”
아테올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절박하지는 않거든요.”
“…….”
“절박하다는 건 뭐랄까, 희망이 없는 사람이 느낄 법한 감정 아닙니까. 하지만 저는 한 번도…… 황제 자리에 오르지 못할 거라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네 상황에? 무슨 자신감이야.”
“황제가 될 사람은 따로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쯧.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하면 재수 없기만 할 텐데, 아테올이 말하니 설득력 있다.
“칼레우스는 그 나이가 되도록 유아 수준의 자만심에서 못 벗어난 멍청이입니다. 나머지 둘이야 말할 것도 없고, 황제는 치세를 오래 이끌어 나가기엔 사람이 너무 평범하죠.”
“네가 지금 하는 말도 나한테는 자만심으로 보일 거란 생각 안 해?”
“안 합니다.”
정말 대단한 자신감이군. 그리고 맞는 말이었다. 전생 6년 동안 황제나 황자들이나 별것 없구나 하는 생각만 했었다. 아테올이 있다는 걸 몰랐으니까. 아테올을 아는 지금은 황제가 될 인물은 그밖에 없다고 느낀다.
“칼레우스는 운이 좋아 첫째로 태어났지만, 안타깝게도 그 자리를 지켜낼 능력이 부족합니다. 흠……. 사실 부황은 저를 의심하고 있는데, 아십니까?”
“의심? 무슨?”
아테올이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입가에 손을 대며 내게 속삭였다.
“제가 사통하여 태어난 자식이라고 말입니다.”
“…….”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게 말이 되나? 아테올은 칼레우스랑 똑같이 생겼고 칼레우스는 황제를 닮았는데. 차라리 칼레우스가 열두 살에 만든 애라고 의심한다면 모를까. 하지만 그렇게 의심한다면 칼레우스에게도 적대감을 보이겠지. 지금처럼 서른여덟이나 먹은 아들을 애지중지할 게 아니라.
“그러니 제가 그들을 어리석게 보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뭐…….”
나는 동의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첫째 아들과 똑같이 생긴, 자신과 닮은 막내아들을 정말 사생아라 생각해서 지금처럼 대하는 거라면 황제는 평범한 걸 넘어 어리석은 인물이다.
“도착했군요.”
“아.”
그 말에 고개를 든 순간 입술이 닿았다. 아테올은 내가 그를 밀칠 때까지 길고 집요하게 키스하고 난 뒤, 손으로 내 입술을 닦아주고는 마차 문을 열었다. 클로든과 세르타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 안에서 뭘 했는지…… 티가 나진 않겠지. 후드와 옷깃으로 더욱 얼굴을 가리며 마차에서 내린 후 돌아보지 않고 탑으로 들어섰다.
방에 올라와 창밖을 보니 그제야 아테올이 마차에 오르는 게 보였다.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며 신탁을 생각했다. 황제의 양위를 종용하는 신탁. 그건 무슨 의미이고, 나한테는 어떤 영향을 줄까.
‘설마…….’
이번 회차에서 주인공은 아테올인 걸까? 아니면 내가 읽지 않은 부분에서 이미 진짜 주인공은 아테올이라는 암시가 나왔을 수도 있고. 나는 그럼 초반에 조력하다 떠나는 담당? 악역 빙의자를 그렇게 써먹는다면 나름 가성비가 좋긴 한데, 그건 이 세계의 입장에서고.
아테올이 주인공이라면 그가 황제가 되고 난 후에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진짜 유리는? 애초에 그 둘의 호감도를 다 올려야 하는 이유가 뭐지? 생각에 잠겨 있자니 눈앞이 반짝거렸다.
tip: 공략을 안 하면 죽기 때문입니다!
“…….”
황당했다. 이게 팁이냐? 어디가 팁이야? 놀리는 거잖아?
tip+tip: 어쩌면 내 손에 세상의 운명이 달렸을지도?
악! 누가 봐도 동기 부여를 위한 헛소리! ‘열심히 일하면 승진시켜 줄게.’ 같은 말! 이 상태창 대표 새끼 아니야?!
tip+tip+tip: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처럼 ■■을 ■■이라 말하지 못하니…… 호감도가 최선! ‧º·(˚ ˃̣̣̥⌓˂̣̣̥ )‧º·˚
X발, 이건 뭐냐…….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문이 다 막혔다. 됐다, 됐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모든 걸 포기하듯이 침대에 털썩 엎어졌다. 오랜만에 공포와 악몽에 시달렸다.
***
아테올과의 외출은 일상이 되었다. 오늘도 여름에만 개방을 한다는 과일 농장을 방문했다. 여름의 연둣빛 나뭇잎 사이로 빨간 열매가 가지마다 무겁게 열려 있었고, 열매 따기 체험을 온 여러 사람들이 그 사이를 돌아다니며 즐겁게 웃었다.
나는 그늘에 앉아서 잠깐의 평화를 즐겼다. 아테올도 내 옆에서 열매 따기에 여념이 없는 커플과 가족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재미있어 보이는군요.”
“가서 하지 그래?”
“저도 체통이라는 게 있는지라.”
무슨, 나무 열매 좀 딴다고 훼손될 체통이면 없는 게 낫다. 물론 나는 체통이 어쩌고 하는 것 때문에 앉아 있는 게 아니었다. 로브가 있어서 더위가 안 느껴진다고는 해도 저 많은 인파 사이를 헤치고 다니는 피곤함이 싫다. 구경하는 쪽이 훨씬 적성에 맞았다.
“열매를 좀 가지고 오게 할까요? 차가운 마실 것도요.”
둘 다 반가운 말이었다. 아테올의 손짓에 멀리 떨어져 있던 시종이 후다닥 움직여 갓 딴 싱싱한 나무딸기와 기포가 들어간 음료를 가지고 왔다. 아테올은 금 쟁반을 내 쪽으로 밀어주더니 말했다.
“바람이 좋습니다. 아주 덥지도 않고요. 여기서라면 뭘 해도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아테올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망토를 풀어 옆에 벗어놓았다. 그는 아무래도 여름의 더위를 좋아하는 듯했다. 평범한 사람으로 살면서 지겹게 더위를 겪은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지구에서의 이야기고. 여기선 더위를 느낄 일이 별로 없지 않은가? 나도 못 이기는 척 로브를 벗었다.
나무 사이로 비쳐 드는 햇살은 적당히 기분 좋을 정도로 따뜻했으며, 생생한 풀잎을 타고 불어온 미지근한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만지면서 아테올을 보았다. 그도 나쁘지 않다는 표정을 하고 있나 싶었는데, 어느 순간 얼굴이 가까워지더니 재빨리 내 입술에 입 맞추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뗐다.
아테올과의 외출은 대체로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할 때마다 특별 호감도가 찔끔찔끔 올랐다. 정말 미연시 이벤트 그 자체였다. 아테올의 얼굴이 게임 특별 일러스트 같다는 점도 포함해서.
그렇게 한 캐릭터만 집중 공략하는 미연시 게임 일상이 이어지던 어느 날, 여름 장마가 시작되었다. 예보에 없던 빗방울이 추적추적 날리기 시작하여 서둘러 마차로 돌아가던 중, 나와 아테올은 허름한 집에서 다급하게 뛰쳐나오는 한 사람을 보았다.
그때는 그냥 넘겼지만…… 설마 그게 그렇게 큰일로 번지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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