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그래, 이렇게 될 텐데 세르타가 같이 오면 큰일이지.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거절할 수 없는 달콤함이었다. 더운 공기와 축축한 바람이 이곳이 밖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지만, 아무도 없으니까 괜찮다는 핑계로 넘겨버렸다.
두 손으로 아테올의 등을 더듬었다. 단단한 등의 근육이 조금씩 꿈틀거렸다. 주춤주춤, 내 손이 그의 골반으로 내려갔다. 지난번의 쾌감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 강렬한 자극은 일상생활 속에서도 몇 번이고 떠올라 나를 곤란하게 했다. 빨리 아테올의 호감도를 올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나도 몰랐던 사실이지만 상당히 밝히는 걸까.
어느 쪽이든 기회가 온다면 놓을 이유가 없었다. 바깥이라는 게 조금 걸리지만, 가까운 곳에 마차가 있다. 마부와 기사들은 전부 멀리 떨어졌고. 거기로 가자고 해서…….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면서 거센 물결이 밀려왔다.
아테올에게 말을 걸기 위해 한 걸음 떨어지려 했었던 나는 그 물결에 그대로 다리를 잡아 채였다. 몸이 휘청 뒤로 넘어갔다. 아테올이 잡아줄 줄 알았으나 그는 나를 보고만 있었다. 덕분에 나는 뒤로 넘어져 물에 첨벙 빠지고 말았다.
“으…….”
물은 깊지 않았다. 철퍽 주저앉아서도 손목까지밖에 안 오는 정도였으니까. 또 조금 전처럼 큰 물결이 온다면 모를까. 하지만 온몸으로 빠지다시피 한 바람에 옷과 머리카락까지 죄다 젖었다. 아테올은 나를 일으켜줄 생각도 하지 않고 계속 보고 있기만 했다. 참다못해 손으로 물을 퍼 올려 그에게 확 끼얹었다.
“넘어지잖아!”
“잡아드리려 했는데 늦었습니다.”
“거짓말.”
일부러 안 잡아준 거다. 내가 물에 빠지는 걸 보려고. 분명했다. 아테올은 인정한다는 듯이 소리 내 웃더니 자신도 그대로 무릎을 꿇어 앉아 내 위로 몸을 기울였다. 다시 키스가 이어졌다. 처음엔 혀나 입술을 깨물어버릴까 싶었으나…… 이게 다 아테올이 키스를 너무 잘하는 탓이다.
“응, 으음…….”
앓는 소리를 내는 나를 아테올이 안아 들었다.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대로 호숫가의 너른 바위로 간 아테올은 그 위에 날 눕히고, 내게 올라탔다. 그러는 동안 계속 입술은 맞닿아 있었다. 해가 쨍쨍했다. 젖은 옷과 머리카락이 금방 말라가는 게 느껴졌다. 아테올은 내 옷깃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가슴을 만지며 계속 입을 맞췄다.
손끝이 유두를 꽉 쥐고 꼬집듯 만지자 배가 뜨끈해졌다. 젖은 옷과 머리카락의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몰두했다. 내 정신을 깨운 건 낮게 내리깐 아테올의 목소리였다.
“이 근처에 신전이 있는데, 들렀다 갈까요.”
“……시, 신전?!”
신전이 있다고?! 신전 옆에서 무슨 짓을! 깜짝 놀라 아테올을 밀쳐내자 그는 순순히 밀리면서도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신전 옆이라며.”
“그게 왜요?”
“왜긴. 신성한 공간에서…….”
그러자 아테올은 더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신도도 아닌데 신전이 왜 신성합니까.”
아차. 그런 세계관이었지. 이곳은 신전이라고 해서 딱히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고, 아테올은 유독 더 신경을 안 쓰는 편으로 보였지만, 한국에서 절이나 성당에 가지는 만큼의 조심스러움이 이곳엔 없었다. 오히려 마법이 신보다 숭상을 받았기에.
“신성한 신전도 아닌데 뭐 하러 들러.”
“이 근처에서 가장 큰 신전이니까요. 제물이라도 바치고 갈까 합니다.”
신성하게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웬 제물. 하긴, 꼭 신앙심 있는 사람만 신전에 제물을 바치는 건 아니었다. 각자 원하는 일이 있을 때 그것을 관장하는 신의 신전을 찾아가니까. 아테올이야 어떻든 나는 보육원에서부터 종교의 신성성을 주입받으며 살아온 인간이었기에 마음에 거리낌이 생겼다. 아테올의 몸 아래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오며 옷을 여미자, 그도 달리 더 말하진 않았다.
햇살이 강했고 로브 안에 입은 건 여름옷이었기에 벌써 물기가 거의 말랐다. 남은 물기와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듯 빗으며 바위 위에 앉았다. 아테올은 내 뺨에 짧게 입 맞추고는 옆으로 왔다.
햇살이 잘게 부순 보석처럼 내려앉은 물은 다채로운 빛으로 일렁거렸다. 호수가 아니라 커다란 예술 작품을 보는 것 같다. 아테올의 시선이 곁에서 느껴졌다.
[이벤트 완료!]
아테올은 뿌듯한 것 같습니다.
뿌듯하기까지 해……?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자 아테올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키스하려 했다. 얼른 손을 들어 입술을 막고, 다시 호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대로 오랫동안, 옷이 완전히 마를 때까지 호수를 구경했다. 카메라가 있으면 찍고 싶은 풍경이었다. 도망치기 전에 많이 봐둬야지.
옷이 다 마른 후 아테올이 호숫가로 가서 내가 내팽개쳐 두었던 로브와 신발을 가지고 와 신겨주고, 입혀주었다. 로브를 다시 입자 생생하게 느껴지던 여름의 열기는 사라지고 서늘한 기운만 남았다. 더위가 물러나자 살 것 같았지만 약간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사람 마음이 간사한 거라고. 계속 더위만 느끼라고 하면 싫을 거면서. 아테올도 옷을 바르게 했다. 검을 다시 차고 망토 자락을 탁탁 터는데 망토 핀이 약간 비뚤어진 게 보였다. 무심코 손을 뻗어 핀의 모양을 고쳐주자 시선이 느껴졌다. 아테올이 웃으며 날 보고 있다.
‘이 자식 일부러…….’
일부러 망토 핀을 비뚤게 단 것이다. 세상에. 여우 자식이 따로 없었다. 손으로 팍 쳐서 다시 핀을 비뚤어지게 한 뒤, 마차 쪽으로 먼저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테올은 열받게도 몇 걸음 만에 나를 따라왔다. 망토 핀도 스스로 고쳐서 제대로 된 모양새였다.
“장난이 지나쳤습니까?”
그는 내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지나쳤냐고 물으면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는 그를 흘낏 흘겨보기만 했다.
[특별 호감도]
+5
60%
……째려봤는데 올랐다. 계속 째려보면 더 오르나 싶었지만 눈이 가자미처럼 될까 봐 참았다.
신전이 가깝다는 건 사실이었다.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호수를 돌아가자 바로 신전 건물이 있었다. 이런 곳에서 그런 짓을 했다니. 신전이 가까운 게 문제가 아니고, 누가 호수에 물이라도 길으러 왔다가 봤으면 어쩌지. 현실적인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하자 아테올이 몸을 굽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신전에서 나오는 길로 와서는 절대 안 보였을 위치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걸 어떻게 장담하는데…….”
“거기서 무슨 짓을 해도 한 번도 들킨 적이 없거든요.”
거기서 무슨 짓을 얼마나 한 거야?! 궁금했지만 모르는 채 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마차가 신전에 들어서자 신전 정문 안쪽에서 신관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무릎을 꿇었다. 신전을 찾아온 다른 사람들도 수군대다가 나와 아테올이 마차에서 내리자 마찬가지로 몸을 숙였다. 우리에게 인사하는 신관들은 말 그대로 자다 날벼락을 맞은 듯한 모습이었다. 공무원으로 치면 갑자기 대통령이 나타난 거니까 그럴 법도 하지.
아테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 대지의 신께 제물도 바치고 말이야.”
“영광입니다, 탑주시여. 그리고 4황자 전하. 모쪼록 안쪽으로 드시지요.”
나는 한 마디도 안 했는데도 내 이름이 먼저였다. 우리는 신전 안쪽의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신전답게 아주 화려하진 않지만 품위 넘치는 공간이었다. 아테올은 신관들이 모두 착석하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을 슥, 눈길로 훑었다. 신관들이 제각각 움찔거렸다.
“내가 궁금한 건…… 이번에 내려온 신탁에 관해서인데.”
자리 위로 옅은 긴장감이 내려왔다. 신탁의 주인공이나 다름없게 된 사람이 와서 묻고 있으니 당연하겠지. 그렇다고 섣불리 말하자니 아직까진 제위에 있는 황제의 눈치가 보일 테고.
“그, 그런 신탁이 내려오는 것은 워낙 오랜만인지라.”
오랜만? 예전에도 있긴 있었던 모양이군.
“그래, 오래되었지. 수백 년쯤……. 그렇지 않습니까?”
“……?”
‘그렇지 않습니까?’에서 아테올은 나를 보았다.
날 봐서 어쩌자고?
내가 아는 건 이런 신탁이 영 처음이 아니라는 것 정도였다. 몇 대쯤 전인가, 양위가 어쩌고 하는 일이 있었다고 하지만 대충 읽고 넘겨서 잘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애매하게 움직였다. 아테올이 말을 이었다.
“지난 신탁이야 오래된 과거이니 기억이 나지 않으시겠지만, 이번엔 어떠신지요. 탑주님께서는 신탁을 어찌 받아들이셨습니까?”
아. 이러려고 신전에 왔군. 여기는 제법 규모 있는 신전이었다. 근방에서는 제일 클 것이다. 게다가 신 중에서 숭배를 많이 받는 대지신의 신전이기도 했고. 그런 곳의 신관들에게 탑주는 4황자가 양위받기를 원한다고 공공연히 알려두기 위해서다. 내가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직접 말씀하시지 않는 한 모른다’고 우기는 사람은 나오니까.
“내가 여기에 4황자와 함께 왔다는 것으로 그건 설명이 되겠지.”
아테올이 빙긋 웃었다. 칭찬이라도 받은 느낌이라 기분이 묘했다. 신관들은 저들끼리 눈치를 보며 흘끔거리다가, 날 보곤 일제히 움찔해서 고개를 숙였다. 얼굴에 서린 두려움이 내게도 보일 정도였다. 역시 이 음침한 몰골로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된다. 사람들한테 안 좋은 기억을 만들어준단 말이지.
우물쭈물하던 신관들 사이에서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는 자가 결연히 고개를 들었다.
“실은, 이미 신전 연합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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