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생각하자마자 뜨네. 게다가 왜인지 5%나 올랐다. 이 대화가 시우에게는 유쾌했던 모양이다. 따라붙는 메시지는 여전히 모르겠으니 그냥 무시하자. 이런 걸로 퍼즐 맞히기를 하는 건 질색이었다. 한정된 정보만 던져주고 알아서 맞혀보라고 하는 것. 사람 놀리는 기분이 들어서 별로다. 뭘 가지고 싶다는 건지.
게다가 짐작이나 할 수 있게 던져줘야지, 이건 그냥…… 놀리는 기분이 아니라 놀리는 거잖아. 알아듣게 해주려는 의지가 없다.
아테올과 있는 게 어지간히 불편했는지 시우는 주뼛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내가 일어나라는 말을 한 적도 없는데 멋대로 일어나는 것도. 평범한 자리라면 모를까 내가 일부러 찾아와 차를 마시고 있고, 찻잔이 다 비지도 않았는데. 게다가 심지어 그대로 가버리는 것까지. 시우의 시종은 당황했고, 내 뒤에 서 있던 세르타가 인상을 찌푸리는 게 나한테까지 느껴졌다.
아테올은 시우의 뒷모습을 빤히 보고 있다가 내게 속삭였다.
“이래도 저쪽이 진짜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기억을 잃었다잖아. 말도 잘 못하고.”
“기억을 잃었더라도 몸이 익힌 세월이 얼마인데요. 본능에 밴 수준일 텐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그야 저게 진짜 유리가 아니라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너무 희박하지 않은가. 거의 뇌가 리셋 되는 수준으로 기억을 잃은 모양이지.
“뭐…… 좋습니다. 그보다, 당신께 여흥을 하나 제공해 드릴까 하는데요.”
“여흥?”
별로 좋게 들리진 않았다. 인상부터 찡그리자 아테올은 웃으며 내 미간을 꾹 눌러 폈다.
“당신의 기사와 대련을 해도 될까요?”
“……뭐?”
나도 모르게 세르타를 돌아보았다. 그는 묵묵한 얼굴이었다. 둘이서는 벌써 뭔가 이야기가 된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아테올이 다가올 때 세르타가 따로 알려주지 않았는데, 그때 둘이 무슨 일이 있었나.
“갑자기 무슨 대련이야.”
아테올은 웃기만 했다. 대신 세르타를 보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탑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의아함이 지나고 나자 갑자기 흥미로워졌다. 흑막처럼 생긴 사람이랑 (내 입장에서) 진짜 흑막의 대결.
“좋아. 어디서 할 건데?”
그렇게 우리는 4황자궁의 연무장으로 이동했다. 흙이 단단히 깔린 바닥에 아테올과 세르타가 각자 경갑옷을 입고 섰다. 심판은 아테올의 수행 기사가 맡았다. “시작!” 높게 울린 목소리와 함께, 나는 후드를 살짝 걷었다. 더위를 느끼지 않게 하는 로브였으나 뺨에 한 자락 여름의 후끈한 공기가 지나갔다.
저 옷이랑 경갑옷은 마법도 걸리지 않았을 텐데, 이 더위 속에서 자진해 대련이라니 특이한 인간들이었다. 시작 신호와 함께 두 사람은 칼을 움켜쥔 채 서로를 탐색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탓, 소리로 표현할 수 없는, 실이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든 순간 둘은 동시에 발을 굴렀다.
그때부터 칼날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고 빠르게 울렸다. 세르타는 아테올에 비해 체구가 작았지만 속도로 따라올 사람이 없는 실력이었고, 아테올은 그보다 힘이 셌다. 서로의 강점이 그렇다는 거지 아테올이 느리거나, 세르타가 약한 건 아니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해졌다. 더위가 나한테까지 느껴지는 것 같다. 둘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눈으로 따라가기가 어려울 지경인데도 박진감이 넘쳤다. 나는 어느새 스포츠 경기라도 관전하는 기분으로 둘을 보고 있었다.
첫 번째 경기는 아테올이 먼저 칼을 떨어뜨렸다. 두 번째는 세르타가 졌다. 승부가 나야 할 세 번째에서는 둘이 정말 치열하게 칼을 맞부딪히다가 심판이 손을 들면서 경기를 멈췄다.
“모래시계가 다 떨어졌으니, 무승부로 하겠습니다.”
아테올의 수행 기사, 레사가 손에 든 모래시계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두 사람은 호흡을 정리하더니 서로 예의를 차려 인사했다. 무승부인 게 아쉽지만, 둘의 실력이 워낙 박빙이다. 심판의 판정이 없었다면 해가 꼴딱 넘어갈 때까지 저러고 있었을 것이다.
세르타가 먼저 내게 다가왔다.
“갑자기 돌발 행동을 해서 죄송합니다, 탑주님.”
“아니……. 재미있었어.”
“정말 여흥을 드렸다면 다행입니다만.”
“응. 충분히 여흥이었어. 아테올이 만만치 않네.”
내 말에 세르타가 흘끗 아테올을 보더니 경계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세르타의 반응은 당연했다. 그는 아테올의 실력을 얼마쯤 말로 들었으나, 이 정도까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
“솔직히 말씀을 드리자면…… 어째서 4황자를 고르신 건지 의문이었으나, 이제 알겠습니다. 신이 부족하여 탑주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뭘 또 그렇게까지. 손을 내젓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세르타 역시 몸을 일으켰다.
“탑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그…….”
그럴 생각이야, 라는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아테올이 가까이 다가와서 날 보며 웃고 있었다.
“뭐야?”
“오랜만에 여름답게 더위를 느끼니 기분이 좋습니다. 탑주님께서도 여름을 즐겨보는 건 어떠시겠습니까?”
“놀러라도 가자고?”
아테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 놀러는 무슨. 하지만 로브 때문에 거의 느낀 적 없는 여름 더위가 궁금하긴 했다. 흘끗 세르타를 한 번 보고는 아테올에게 물었다.
“어디로?”
“좋은 곳이라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흠…….”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아테올을 따라가겠다고 하면 게이지 깎이는 거 아니야? 세르타의 눈길이 뜨거웠다. 그는 내가 탑으로 함께 돌아가기를 바라는 듯했다.
[이벤트 발생!]
아테올은 당신과 호수의 시원한 바람을 느끼고 싶어 합니다. 함께 가보면 어떨까요?
나왔다, 게이지 치트 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 호수. 얼마나 좋은 조합인가.
“세르타는 먼저 물러가.”
“호위하겠습니다.”
“내가 있으니 괜찮다.”
아테올이 세르타의 말을 끊었다. 세르타는 반박하지 못하고 나를 한 번 보더니 애매한 표정을 했다. ‘안 가면 안 돼?’ 정도로 보였다. 좀 미안한 기분은 들었으나 세르타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만 물러가. 클로든에게는 늦을 거라고 전하고.”
세르타랑 같이 갈 수는 없었다. 호수에서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최소한……. 아테올의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한창 뛰고 난 다음이라서인지 핏기가 올라와 유독 붉게 보였다. 아무튼 그러니 세르타를 대동하는 건 안 될 말이었다.
세르타가 돌아간 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아테올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황궁을 빠져나와 대로에서 숲길 방향으로 들어서서 30분쯤 달렸다. 청량한 숲길을 가만히 감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손이 뻗어와 창문의 가리개를 내렸다.
“왜?”
“깜짝 놀라게 해드리려고요.”
어떤 의미로 놀라는 거지. 아테올이 말하면 평범하게 들리지 않아서 큰일이다. 얼마 후 마차가 멈췄다. 마차 밖에서 물결 소리가 들려왔다. 아테올은 손으로 내 눈을 가리기까지 하고서 마차의 문을 열었다. 물이 밀려드는 소리가 더 커진다. 뺨에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마음에 드시면 좋겠군요.”
아테올이 손을 뗐다.
정말…… 깜짝 놀랐다. 그리 크지는 않았으나 내가 놀란 건 호수의 색 때문이었다. 마치 오팔을 녹여 부어놓은 듯 오색으로 반짝이는 물결. 파도처럼 물가로 밀려오는 물마저 같은 색이었다. 내 바로 뒤에 서 있던 아테올이 물었다.
“여기도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요정 호수요.”
“여기에서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요, 수도에서 꽤 알려진 관광지이지 않습니까. 오늘은 개방일이 아니라 아무도 없지만요.”
그렇군. 이 정도면 이름난 관광지가 될 법도 했다.
“왜 이름이 요정 호수야?”
“여기서 수천은 되는 요정이 죽었다고 해서 요정 호수입니다. 요정의 시신은 부패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 요정의 날개 색으로 반짝거리기 때문이지요.”
“…….”
좀 더 로맨틱한 이유를 기대했는데 이 세계의 요정은 플랑크톤이나 다를 바 없는 듯했다. 지구에도 있지 않았나? 플랑크톤 시체가 충격을 받으면 반짝반짝 빛나는 그런 바다.
요정 시체라고 하니 약간 떨떠름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로브를 벗겨드릴까요?”
나는 아테올을 돌아보았다.
“호수 바람이 시원합니다.”
뺨에 닿는 물기 어린 바람은 확실히 시원했다. 나는 후드를 젖힌 뒤 로브 장식을 풀어서 벗어버렸다. 로브에 가려져 있던 여름이 단번에 몸을 감쌌다. 에어컨이 돌아가는 실내에 있다가 바깥에 나온 것처럼 더위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한여름의 공기. 습하고 무덥고 맑다. 나쁘지 않았다.
샌들을 벗고 바짓단의 매듭도 풀어 종아리에서 다시 맨 뒤 호숫가로 다가갔다. 햇살을 받아 더 여러 색으로 반짝이는 물결이 잔잔하게 밀려왔다가 물러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조심스레 발끝을 대자, 차가운 물이 가만히 맨발을 적셨다.
아테올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는데 왜인지 모르게 웃음이 좀 났다. 별생각 없이 웃자, 아테올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성큼성큼 내 쪽으로 다가왔다. 바람이 한차례 불었다. 어느새 목덜미에서 배어난 땀이 금세 식었다.
바로 곁으로 온 아테올은 내 허리에 팔을 휘감으며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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