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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39화 (39/93)
  • 39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자작극?”

    “제가 주역이 되어 마물을 처리한 두 사건의 간격이 너무 짧지 않습니까. 뭐랄까, 굳히기를 하기 위해서 일부러 국립 병원에 사건을 일으켰다고 말하는 의견이 있을 거예요. 그 자작극을 당신이 도왔다는 말도 나올 거고. 장소가 하필이면 칼레우스가 운영하는 국립 병원이라는 점도 있으니까요.”

    “……흐음.”

    그럴듯한 의견이었다. 자작극. 그렇다면 칼레우스의 그 태도도 이해가 간다. 처음부터 내가 아테올을 데려가려 한다는 걸 상정했으리라. 어째 손쉽게 놀아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아테올이 돌아가고 이틀 후. 정말로 클로든으로부터 이번 일에 대하여 자작극 논란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더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아직은 무시하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황태자가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고 있어서요.”

    흠. 칼레우스의 침묵은 나쁘지 않았다. 아무리 그라도 여기서 나서서 ‘자작극이었다’라고 말할 순 없기 때문이다. 또 칼레우스가 생각한 것만큼 열띤 반응이 나오는 것 같지도 않아 다행이었다.

    “그럼 전부 무시해.”

    “알겠습니다.”

    간단한 한마디로 나는 관련된 모든 알현과 서신을 받지 않게 되었다. 역시 어그로는 무시가 답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무시할 수 없는 적이 찾아왔다. 황제였다.

    양위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해도 아직 황제는 황제다. 그는 아테올처럼 위병이 멋대로 돌려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결국 클로든이 곤란한 얼굴로 나를 찾아왔고, 나는 수선화 정원으로 황제를 불러들여야 했다.

    “탑주시여.”

    “황제 폐하.”

    “……제가 찾아온 이유를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마음이 많이 급한 모양이었다. 말없이 차만 한 모금 마시자, 황제는 초조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도는 소문이 사실인지, 그것을 여쭙고 싶습니다.”

    “제가 일부러 국립 병원에 마물이 나타나게 해서 4황자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줬다고요?”

    “…….”

    직설적으로 말하자 황제는 순간 말문이 막혔는지 조용해졌다. 나는 시선을 비스듬히 하며 말했다.

    “굳이 제가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다분히 불쾌함을 담은 말투였다. 챙그랑 소리가 선명했다. 감정을 앞세워 찾아왔던 황제는 내 말투에 잠시 움찔했으나, 전혀 누그러지지 않은 태도로 답했다.

    “탑주님께서 마음이 조급해지셨다면 그럴 수도 있지요.”

    “마음이 조급해질 이유가 있나요?”

    “하루라도 빨리 황제 자리에 앉은 아테올을 보고 싶으신 게 아닙니까?”

    뭐, 내가 아테올에게 호감을 가졌다면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기왕이면 상대가 4황자인 것보단 황제인 편이 나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나, 혹은 진짜 유리라도 전국 모든 신전에 같은 날 같은 신탁이 내리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가장 높은 탑의 주인은 지상의 신이지 진짜 신이 아니고, 신이라 해도 다른 신들을 모두 통제하는 존재는 아니니까. 즉, 황제의 말은 생떼에 가까웠다.

    “미리 말씀드리는데, 그런 신탁이 내려온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탑주님께서 모르시면…….”

    “글쎄요, 신관들은 알지도 모르죠.”

    존재하는 모든, 시골구석 허름하고 다 쓰러져가는 신전의 신관 한 사람까지 전부 단합해서 신탁을 조작했을 확률. 내가 아테올을 사랑한 나머지 좀 일찍 황제가 되게 하려고 신의 심판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가짜 신탁을 내렸을 확률. 갑자기 신들이 그런 결정을 내렸을 확률. 셋 중에 가장 그럴듯한 건 세 번째가 아닌가.

    황제도 그에는 반박할 수 없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결국 소모적인 따짐과 매달림 끝에 황제는 아무런 수확도 없이 돌아갔고, 나는 게이지를 일부 잃었다. 최대한 가만히 있으려고 했지만 너무 헛소리를 하면 어쩔 수 없이 몇 마디 던져야 했기에.

    방에 돌아와 60%에서 시름시름거리는 게이지를 보자 자연스레 호감도가 떠올랐고, 호감도를 떠올리니 시우에게 생각이 미쳤다. 그래. 다른 캐릭터의 호감도를 빨리 올려야지. 그리 생각하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나는 시우와 4황자 궁 정원에 마주 앉아 있었다.

    시우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흘끗 후드 아래로 그를 살폈다.

    “저…… 이번에도 국립 병원에서 마물을 퇴치하셨다고 들었어요.”

    “…….”

    “대, 대단하세요.”

    “내가 아니고 아테올이 한 건데.”

    “하지만 탑주님이 같이 가셨잖아요!”

    시우가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얹고 몸까지 내밀며 외쳤다. 놀랍게도 그의 두 눈은 선망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선망? 선망이라고? 나한테? 진짜 유리가?

    “뭐…… 그래.”

    “정말 대단하세요.”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차를 마시며 시우가 진정할 때까지 시간을 끌었다. 시우는 자신이 방금 너무 들떴던 걸 깨달았는지 곧 얼굴을 붉히며 쪼그라들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저, 저한테요? 네!”

    여기에 너 말고 누가 있어.

    “정말 이전 일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네……. 눈을 막 떴을 땐 백치나 마찬가지였다고 아버님이 말씀하셨어요.”

    아버님이라면 대공의 동생인가. 시우는 지금 말하는 것도 조금 어눌하다. 기억을 잃은 채 발견된 그때부터 말을 새로 익히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1년 만에 조금 어눌하긴 하지만 자유롭게 말하고 쓰는 걸 보면, 제국어든 다른 나라 말이든 말을 배운 적이 있다는 뜻이겠지.

    역시 진짜 유리가 기억을 잃은 채 떠돌던 것을, 아테올이 아닌 로아네스 대공이 발견하고 만 걸까. 전생에는 대공이 대리인이라며 누군가를 보낸 적이 없으니. 그럼 왜 발견자가 달라진 건지 궁금했다. 혹시 아테올이 진짜 유리를 발견했어야 할 시점에 나와 함께 있어서? 그러면 원래 1년 전쯤 아테올은 북부에 갈 일이 있었던 건가.

    그렇다 치고, 아테올이나 로아네스 대공은 유리를 어떻게 알아보고 보호한 거지? 그들은 내 얼굴을 모르는 데다 얼굴을 안다 해도 탑에 있는 건 가짜, 이건 진짜라고 판단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않나. 기연과 영약을 우연히 만나는 주인공도 아니고……. 아. 유리가 주인공이지, 참.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다.

    이 안에 오래 있다 보니 여기가 책 속 세계라는 걸 자꾸 잊는다. 이마를 톡톡 치는 나를 시우가 이상하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렇지. 유리가 주인공이니까, 누구든 그를 찾아내서 보호하다가 ‘사실은 이쪽이 진짜 탑주였다!’ 하고 알아차려서 화려하게 귀환하는 게 맞지.

    “그래, 기억 때문에 뭐…… 힘든 건 없어?”

    “괜찮아요. 다들 잘해 주셔서요.”

    잡담을 몇 마디 나누었다. 대공은 잘 지내는지, 어떻게 지냈었는지, 뭐 그런. 대화가 끊길 때쯤 되어 벨이 한 말이 문득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대공이 동물을 키운다던데.”

    “동물이요?”

    시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있을 때까지는, 그런 말은 못 들었습니다…….”

    뭐야, 그런 말을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나. 뭔가 더 물으려 했는데 정원의 잔디를 밟으며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은밀한 곳에서 단둘이 뭘 하고 계셨습니까?”

    은밀하긴? 탁 트인 정원이고 주위에 있는 시종과 호위 기사의 수만 해도 수십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자, 아테올은 아무렇지도 않게 직접 의자를 빼더니 내 옆에 앉았다.

    “모처럼 궁을 찾아오셨기에 한달음에 달려왔더니 목적이 달리 있으셨군요.”

    “자꾸 이상하게 말하지 마.”

    “사실만 말하고 있습니다.”

    아니, 사실이 아닌 건 아닌데 말투가 요상하잖아. 말없이 흘겨보았으나 아테올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런 우리를 가만히 보고 있던 시우가 불쑥 말했다.

    “두 분은 사, 사이가 정말 좋으시군요.”

    ……그렇게 보이나? 하기야 이런저런 짓까지 했는데 옆에서 봤을 때 가까움이 전혀 안 느껴지면 그게 더 이상하긴 하겠다. 그런데 시우의 태도가 미묘했다. 아테올이 나타난 순간 갑자기 긴장하고 있다. 나랑 있을 땐 긴장은 해도 저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혹시 아테올이 괴롭히나?

    장차 탑의 주인으로 돌아올 진짜 주인공인데 그렇게 대하면 쓰나.

    “아테올…… 4황자는 잘해 줘?”

    그러자 시우가 퍼뜩 고개를 들며 은근히 아테올의 눈치를 보았다. 역시 편하게 대우해 주진 않는 모양이군. 이따 슬쩍 한마디 해줘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아테올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손님으로서 극진히 대접하고 있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는 대공의 대리인인데.”

    아, 그렇지. 진짜 탑주인 것 이전에 지금 당장은 로아네스 대공의 조카이자 대리인 신분으로 온 것이었다. 대공의 대리인이라는 말에 시우는 약간 얼굴을 붉혔다.

    “대공하고 사이가 좋은 편이야?”

    “아, 전하께서…… 저를 잘 돌봐주십니다.”

    뭐야. 썩 가깝지 않은가 했더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오히려 시우의 반응은, 대공에게 꽤 호감을 품고 있는 것 같은데. 대공한테 마음이 있나?

    “죽어가던 저를 발견해서 조카로 들여주신 대공 전하시니까요. 진심으로 감사하고 또 존경하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해드리고 싶습니다.”

    역시 기본적인 예법이 부족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대공에게 높임말을 써선 안 된다. 그런 건 예법을 오래 배우면 무의식중에, 당연하게 나오는 건데 역시 기억을 잃었다는 말은 사실인 듯했다. 엄청나게 연기를 잘해서 어눌한 말투와 예법까지 꾸며내고 있는 거라면 또 그럴 수도 있지만.

    “대공이 퍽 좋은 모양이군.”

    아테올이 한마디 했다. 농담할 땐가, 생각했으나 그 말에 시우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뭐야. 진짜야? 대공이 좋은데 나한테 호감도는 왜 뜨는 거야?

    [호감도: 시우]

    20%

    시우는 당신의 ■■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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