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저쪽에서부터 이곳으로 길이 연결되더군요. 무사하십니까? 큰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칼레우스가 언제부터 가까이 있었을까. 아테올을 흘끗 보자, 그는 내게만 보일 정도로 작게 고개를 젓더니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온 지 얼마 안 되었다는 뜻인 것 같다.
어쨌든 여기에 더 있기는 싫었다. 등불로 주위가 밝아지자 곳곳에 쳐진 거미줄이며 썩은 나무, 곰팡이, 먼지 따위가 더 잘 보였다. 잠시 잊었던 기침이 올라오는 듯했다.
“유령형이라 마물의 시체는 없어. 하지만 처리는 끝났으니까, 이제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말하며 일부러 아테올을 보았다. 칼레우스가 과장되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테올이 처리한 것인지요? 아테올, 계속 이 형을 놀라게 하는구나.”
“운이 좋았습니다. 탑주님께서 계셨고요.”
아테올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칼레우스는 은근히 의심하는 기색이었으나, 나와 아테올이 둘 다 그렇게 말하자 더 토를 달지는 못했다. 폐병동에서 나와 아까 들어왔던 3병동 통로 쪽으로 들어가니, 원장과 직원들이 길 잃은 개미들처럼 초조하게 복도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무, 무사하신지요!”
우리 얼굴을 보자마자 원장이 소리를 죽여 물었다. 나는 아테올에게 설명을 넘겼다. 유령형 마물이었고(다시 말하지만 마물이다, 마물) 이제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거기에 칼레우스가 폐병동 재건축 허가를 바로 내려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사건은 쉽게 마무리되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움직이기 위해 나와 아테올, 칼레우스는 한 마차에 탔다. 두 마리 말이 끄는 검은색 마차가 어두운 밤거리를 가로질렀다. 먼저 입을 연 건 칼레우스였다.
“내 동생, 아테올. 장난꾸러기였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성장했구나.”
짐짓 감격에 겨운 듯한 목소리였다. 연기 잘하네. 하긴 저 정도 연기는 해야 황태자로 버티고 있지.
“아닙니다. 형님을 도울 수 있어서 기쁩니다.”
아테올도 부드럽게 말했다. 이쪽도 제법이다. 뭐…… 6년, 아니, 유소년기부터 줄곧 존재감 없고 소문 나쁜 망나니 황자를 연기한 사람이니 그 부분에선 이쪽이 훨씬 위였다. 두 형제는 마차가 황궁에 도착할 때까지 하하호호 서로 덕담을 나눴다.
물론 아테올은 끝까지 ‘오늘 일은 형님의 공입니다.’ 같은 말 따위 하지 않았다. 칼레우스가 은근히 그 말을 바라는 티가 났는데도 말이다.
황궁 정문 앞에서 서로의 마차로 바꾸어 탔다. 내가 마차에 타는 모습을 보고 있던 칼레우스는, 마차 문을 닫기 직전에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입술에는 약을 바르시는 게 좋겠습니다.”
“…….”
그제야 입술에 따끔한 아픔이 느껴졌다. 시선이 순간 아테올을 향할 뻔했으나 겨우 눌렀다.
“놀라서 깨물었어. 난 겁이 많거든.”
“예전부터 유령이라면 조금 꺼리시긴 했지요.”
칼레우스가 웃었다. 유리가 그랬군. 나와의 공통점이다.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손으로 입술을 가리고 있다가, 아예 로브 옷깃을 끌어 올려 얼굴을 가려버렸다. 후드와 깃으로 겨우 앞만 보이는 상태가 된 나를 보고 클로든이 잠시 당황했다.
“목욕물을 받아두었습니다, 탑주님.”
“어, 응.”
“마실 것이나 가볍게 드실 것을 준비할까요?”
그 말에 상태창을 흘끗 확인하니 체력이 6이었다. 어쩐지 피곤하더라니. 먹을 걸 준비해 달라고 말하고 탑으로 들어가려는데, 저쪽에서 위병이 다급한 걸음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
“4황자 전하가 방문했습니다.”
“이 시간에? 궁으로 가신 게 아니었나?”
클로든이 미간을 찌푸렸다가 나를 보았다.
“어찌할까요, 탑주님.”
아테올의 이에 걸려 작은 상처가 난 입술이 시큰거렸다. 나는 잠시 머뭇대다가 작은 중얼거림으로 대답했다.
“……들어오게 해.”
얼마 후, 아테올이 탑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전 보았던 차림 그대로에 검만 차지 않은 채였다.
“할 말 있어?”
“여기서 해도 될까요?”
“……아니.”
능글맞은 웃음을 보니 여기서 할 말이 도저히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테올을 데리고 방으로 올라왔다. 익숙하고 편안한 공기가 내 몸을 축 늘어지게 했다. 체력 6의 상태에서 의자를 보자 홀린 듯 다리가 움직였다. 앉은 채로 로브를 벗어 의자에 대충 걸치면서 흐느적흐느적 의자 위로 녹아내렸다.
문득 아테올의 체력은 어느 정도 되는지 궁금했다. 남의 상태창도 보게 해주면 안 되나, 정말. 설마 진짜로 체력도 최대치가 999인 건 아니겠지? 설마. 99겠지. 99 중에 12여도 쓰레기인데, 999에서 12면 인간이 아니고 날파리다. 옆에서 인간이 손뼉만 쳐도 죽는다.
“왜 온 거야.”
“왜 왔을까요.”
아테올이 웃으며 지그시 내 입술을 쳐다보았다. 순식간에 공기가 미묘해졌다. 체력 6 상태에서 뭔가 더 하면 내가 어떻게 될까? 체력이 0으로 떨어져 본 적은 없어서 모르겠지만, 아마 기절하는 거 아닐까. 설마 죽진 않겠지. 죽는다면 너무 서바이벌이다. 공략 못 하면 죽고, 게이지 다 떨어지면 죽고, 피통 다 닳으면 죽고……. 젠장…….
“배고파.”
“이런.”
“클로든이 먹을 걸 가지고 올 거야……. 그리고 씻고 싶고…….”
배가 고픈 데다 체력은 5밖에(그새 1 떨어졌다) 없었고, 아직 코에 칙칙한 냄새가 남아 있는 느낌이다. 내게는 지금 식사와 목욕이 필요했다. 아테올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먹을 걸 드시고, 씻고, 그다음에는?”
“…….”
“그다음엔, 뭘 할까요?”
얼굴이 빨개질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뻐끔거리는데, 타이밍 좋게 클로든이 문을 두드렸다. 음식을 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얼마 후 문이 열리고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클로든을 따라 들어왔다. 크림을 끼얹은 개암 수프, 으깨서 후추를 뿌린 병아리콩, 작은 빵, 꽃잎 모양으로 만든 머랭, 과일 젤리, 푸딩과 케이크 종류가 잔뜩 쌓여 있었다.
테이블에 음식을 보기 좋게 차리고 나가려는 클로든을 불렀다.
“클로든.”
“네, 탑주님.”
“내가 부르기 전까지는 들어오지 마.”
아테올이 고개를 살짝 내리며 웃는 게 보였다. 어이없게도 이 상황에서 특별 호감도가 ‘삐롱’ 소리를 내며 올라갔다. 클로든을 내보낸 뒤 묵묵히 먹을 걸 먹고 따뜻한 물에 몸도 씻었다. 체력이 12까지 채워지자 좀 살 것 같았다.
자신도 좀 씻겠다고 말하는 아테올을 욕실로 들여보낸 뒤, 갑자기 초조해져서 침대 근처를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아테올이 빨리 나왔으면 하는 마음 반, 천천히 오래 씻었으면 하는 마음 반이었다. 아까의 입맞춤이 떠올랐다. 그다음…… 나를 만지던 손길도 떠올랐다.
손톱까지 깨물면서 기다리기를 얼마쯤. 욕실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가까워질 때까지 일부러 외면하고 있었으나, 어깨에 한 손이 올라오자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조심스레 몸을 돌렸던 나는 그대로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악!”
“유령이라도 보셨습니까?”
“네가 벗고 있잖아!”
“입고 있습니다.”
아래만 입고 있잖아! 아직 반쯤 젖은 금발에서 물방울이 톡 떨어져 그의 단단하게 융기된 근육을 타고 흘렀다. 가운을 하체에만 걸친 그의 모습은 정말 그리스 조각상 그 자체였다. 직선으로 뻗은 너른 어깨, 내 두 손으로 다 감싸지지도 않을 것 같은 상완과 힘줄이 선 팔뚝. 보기 좋을 정도로만 튀어나온 가슴과 늘씬한 허리, 골반, 촘촘히 짜인 빗장뼈와 등의 근육…….
무슨 걸어 다니는 테스토스테론도 아니고.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나는 슬슬 뒷걸음질했다. 아테올은 당연히 웃으며 따라왔다. 얼굴이 타들어갈 듯 붉어진 게 느껴졌다.
“그러는 당신은 왜 이렇게 옷을 꽁꽁 싸매고 계십니까.”
“사람은 원래 옷을 입고 살아야 해.”
“가끔은 아닐 때도 있죠.”
다리가 침대에 닿았다. 내가 비틀거리자, 아테올은 기회라도 잡았다는 듯 나를 툭 밀쳤다. 몸이 침대로 푹 쓰러졌다. 동시에 아테올도 내 위로 몸을 드리웠다. 얼굴에 그림자가 지며 늘어진 아테올의 머리카락에서 물 한 방울이 톡, 뺨으로 떨어졌다.
“……분위기를 따지는 편이라며?”
“따지니까 지금 이러고 있는 거죠.”
물방울이 뺨을 타고 흐르는 느낌이 간지러웠다. 아테올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몸을 굽혔다. 따뜻하고 촉촉한 입술이 물방울이 흐른 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이내 귓가에서 떨어진 입술은 조금 내려와 내 입술에 닿았다. 나는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깊은 키스가 이어졌다. 아테올은 내 몸을 안아 침대 위쪽으로 좀 더 밀쳐 올렸다. 침대 이불이 말려 올라가면서 나는 발끝만 침대 밖으로 나온 상태가 되었다. 그 상태로 키스를 이어가며 아테올은 두 손으로 천천히 내 옷을 벗겼다.
매듭이 풀어지고, 장신구가 떨어지고 옷깃이 벌어졌다.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공연히 옷을 죄다 갖추어 입고 있었기에 몇 겹이나 되었다. 아테올은 그 옷을 하나하나 벗기며 작게 웃었다.
“방어가 강하시군요.”
“웃지 마…….”
그 말에 아테올의 웃음은 더 커졌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웃으니 아테올이 조금 어리게 보였다. 조금 전까지 38세 아테올을 보고 와서 그런가. 허리띠까지 풀어지자, 겹겹이 몸을 감싸고 있던 옷이 하나씩 스륵스륵 떨어졌다.
“음, 으응…….”
“소리.”
“읏…….”
“듣기 좋습니다.”
으윽……. 소리를 안 내려 참아보았지만, 아테올은 봐주지 않겠다는 듯이 더욱 거세게 입 안을 핥고 빨아댔다. 도저히 소리가 안 나올 수 없었다. 목을 울리며 낑낑대는 소리를 내 귀로 듣고 있자니 창피해 죽을 지경인데, 참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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