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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36화 (36/93)

36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오래되고 침침한 통로가 보였다. 불을 반만 켜둔 듯했다.

“직원들은 이 통로를 잘 이용하지 않습니다. 다른 돌아가는 길이 있어서요. 한데, 얼마 전부터 통로 가까이 있는 병실에서도 유령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해서…….”

직원도 직원이지만 일반 환자들이 보기 시작했다면 정말 소문이 퍼지는 건 시간문제다. 원장이 거기서부터 우물쭈물했다. 들어가기 싫은 눈치였다. 마물이 있다면 굳이 원장이 들어갈 필요는 없기에 아테올에게 눈짓했다.

“원장은 여기 있도록. 내가 탑주님과 형님을 모시고 다녀오겠다.”

“예, 예!”

원장과 직원들의 얼굴에 단숨에 화색이 돌았다. 그들을 두고 통로로 들어서자 문이 스르르 닫혔다. 끼이익…… 쿵. 공포 영화 도입부 같은 소리였다.

“어두워서 그런지 꽤 음산하군요.”

아테올이 말했다. 문 하나를 두고 정말 병동과 통로의 분위기 차이가 명백했다. 뭐가 나와서 그러는 건지, 나온다는 소문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 나무로 된 통로 바닥은 걸을 때마다 불길한 끼익끼익 소리를 냈다.

얼마쯤 가자 작은 나무 문이 나타났다. 이게 폐병동으로 이어지는 통로인 듯했다. 아테올이 원장에게서 받아 온 열쇠로 문을 열었다. 오랫동안 열리지 않은 자물쇠는 녹슨 소리를 내며 묵직하게 떨어졌다. 문이 열리자 곧바로 계단이다. 앞장서서 걸어가려 하는데 아테올이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제가 등불을 들었으니 앞에 서겠습니다.”

그는 손에 든 등불을 살짝 들어 보였다. 그렇게 아테올이 맨 앞에, 내가 가운데에, 뒤에는 칼레우스가 섰다. 마물, 그것도 유령 마물에 대항할 걸 생각하면 둘은 내 뒤로 숨어야 하는 거 아닌가? 차마 그렇게는 못 하겠지만.

폐병동 계단을 내려오자 분위기가 점점 더 오싹해지기 시작했다. 귀신의 집에서 본격적인 탐사 코스로 내려온 느낌이다. 유령…… 진짜 나오는 건 아니겠지. 마물이겠지. 마물인 편이 훨씬 덜 무섭다. 목을 매고 죽은 사람의 유령은 마법으로 퇴치도 안 될 것 같단 말이야.

이상한 추위가 느껴졌다. 어깨를 움츠리는데 아테올이 갑자기 뒤를 슥 돌아보았다. 의아하게 마주 본 순간, 내가 아테올의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재빨리 손을 떼며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아테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벅, 저벅, 삐걱. 세 사람의 발소리만 어딘가 습하고 서늘한 계단을 울렸다. 두 층을 내려가자 또다시 잠긴 나무 문이 나왔다. 아테올이 이번에는 다른 열쇠로 자물쇠를 열었다. 쿵, 얼마나 무겁게 들리는지 바닥이 쪼개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폐병동 문이 열렸다. 나무 썩은 내와 곰팡내가 훅 풍겼다. 소매로 코와 입을 가리자 아테올이 내 앞에 좀 더 바짝 붙어서 섰다. 그런다고 냄새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앞만 안 보일 뿐이지. 손등으로 팔뚝을 스윽 밀어내자 그가 눈썹을 까딱 움직이고는 옆으로 비켰다.

병동은 두 갈래 길로 나뉘어 있었다. 나는 아테올이 들고 있던 등불을 가져와 칼레우스에게 건네고, 아테올의 머리 위로 등불보다 조금 어둑한 빛 덩어리를 띄웠다.

“탑주님께서는 여기에 계시겠습니까?”

“아테올을 따라갈 거야.”

“……알겠습니다.”

칼레우스가 묘하게 웃더니(웃는 모습도 아테올과 닮았다) 등불을 들고 저벅저벅 한쪽 길로 멀어졌다. 아까부터 꽤나 순순하다. 그게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유령 마물(마물일 것이다. 제발……)을 없애고 빨리 여기서 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아테올이 앞장서면서 문을 하나씩 열어보기 시작했다. 창밖은 어두컴컴했고, 광원이라곤 그의 머리 위에 내가 띄워 놓은 빛이 전부였다. 이곳을 전부 밝히는 것도 가능하긴 하지만, 그랬다가 괜히 마물(제발)을 자극하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작은 병실 몇 개를 지나쳐, 한곳에 여러 환자를 수용하는 병실에 이르렀다. 침상 수를 보니 10인실은 되는 것 같았다. 병원 침대가 침대보도 깔리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어 음산함이 더해졌다. 왜 병원은 이렇게 공포의 대상인 걸까. 유구하게 괴담의 대상이 되는 곳 아닌가? 아니, 그냥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해 보면 병원에서 사람이 죽는 건 당연한 일인데, 사인이 좀 달랐다는 이유로 무시무시한 소문의 대상이 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칼레우스를 위해서는 아니지만, 국립 병원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빨리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무의미한 고찰과 의미 있는 다짐을 연이어 하며 아테올에게 바짝 붙어 걸었다. 나와 그의 발소리, 창밖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 오래된 나무가 비틀리며 나는 끽, 끼긱, 하는 소리…….

……이거, 정말 나무 소리일까.

“…….”

끼긱……, 탁. 끼익……. 삐걱…….

“아테올, 이 소리…….”

내가 뭐라고 말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뭔가가 눈앞을 휙 하고 지나갔다. 기절할 듯 놀라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뻔했으나 다음 순간엔 몸이 딱 굳었다. 스으으, 끼익. 낡아 빠진 옷자락이 나풀거렸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빠르게 이동한 그것은 산발하고 혀를 빼문 반투명한 사람의 형태였다.

“악……!”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입이 막혔다. 아테올의 손이었다. 내 정신이 산란해지자 주위를 밝히고 있던 빛 덩어리도 픽 하고 꺼져, 창밖에서 들어오는 달빛이 전부인 어둠 속이 되었다. 오늘은 신이 달의 모양을 감추는 하현이었기에 더더욱 눈앞이 어두웠다.

어둠 속에서 내 공포는 극대화되었다. 끼익. 다시 그 소리가 들려와 내가 눈을 질끈 감자, 커다란 품이 갑자기 나를 끌어안았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아테올이 내 입을 막았던 손을 떼고 나를 안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수려한 얼굴이 보였다. 반만 넘긴 머리, 어두워서 짙게 보이는 눈동자와 콧날, 턱선, 나를 슥 내려다보는 눈빛까지.

가슴이 쿵 하고 뛰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아테올에게까지 들릴 것 같았다. 이게 흔들다리 효과라는 건가? 정말 나한테도 호감도가 있었다면 이 순간 쑥 올랐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아테올의 호감도만 신경 썼지 내 기분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걸 의식하면 특별 호감도인지 뭔지가 더 오를지도. 상대가 호감을 보이면 마음이 더 기울어지는 게 사람의 심리 아닌가. 가만히 아테올을 올려다보다가 슬쩍 그의 품으로 더 들어갔다. 그의 냄새와 체온이 완전히 나를 감쌌다.

“…….”

아테올이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는가 싶더니, 내 허리에 팔을 감은 채 뒤로 슥 구부렸다. 몸이 기울어지면서 동시에 얼굴이 바짝 가까워진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표정이 확실하게 보였다. 두 눈이 낯선 광채를 띠며 반짝이고 있었다. 번뜩인다는 게 맞을까. 그가 입술을 조금 벌렸다. 이제 가슴이 정말 미친 듯이 뛰었다. 주위의 상황이 한순간 잊혔다.

처음으로 둘 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하는 키스였다.

뒤섞이는 숨결이 낯설었다. 아테올의 심장도 쿵쿵, 빠르게 뛰고 있었다. 질척거리며 엮이는 입술과 혀가 마치 녹아내리는 것처럼 뜨겁고 기분 좋았다. 그대로 여기가 어디인지 잊을 뻔했을 때, 아테올이 움찔했다. 왜 그러나 싶어서 쳐다본 순간 내 등골에도 소름이 쫙 돋았다.

“엄마야!”

뭔가 서늘한 것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엉겁결에 아테올을 밀치며 팔짝 뛰다가 발이 꼬여 휘청거렸으나, 이번에도 넘어지진 않았다. 아테올이 내 허리에 팔을 감은 채 허공을 보고 있었다. 덩달아 시선이 그리로 간다. 아악. 환자복을 입은 반투명한 형체가 공을 튕긴 것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는 중이었다.

“검기로 벨 수 있을까요?”

“내가 하는 게 빨라!”

게이지고 뭐고 생각할 틈도 없이 손이 먼저 나갔다. 응축된 마력 덩어리가 유령의 몸체를 감싸자, 유령은 물속에 집어넣은 설탕처럼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졌다. 챙그랑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진짜 유령인가요?”

아테올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냐, 마물이야.”

“그렇다고 치죠.”

‘그렇다고 치죠.’는 무슨, 마법에 사라졌는데 마물이지. 저건 마물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마물이었다. 마물이 사라지자 주위가 약간 더 밝아진 느낌이 들었다. 역시 유령형 마물은 무시무시하구나. 음. 유령형 마물은 무서워.

어느새 검을 꺼내 들고 있던 아테올이 주위를 한번 크게 돌아보았다. 이제 별다른 건 없는 듯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그에게 말했다.

“마물은 네가 없앤 걸로 해.”

아테올이 ‘어째서요?’ 하고 묻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야 네 인지도가 더 올라가니까. 아직은 부족해.”

“뭐, 저야 좋습니다만. 탑주님께서는 괜찮으시겠습니까? 당신의 공이지 않습니까.”

“공이라고 할 것도 없잖아……. 그리고 내가 지금보다 인지도를 더 올려서 어디에 쓰게.”

“그것도 그렇습니다.”

어깨를 으쓱한 아테올이 다시 슬그머니 팔로 내 몸을 감쌌다.

“그럼 하던 걸 계속…….”

저벅.

갑자기 들린 발소리에 나는 거의 비명을 지를 뻔하며 옆으로 튀어 올랐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홱 돌리자 주홍색의 어슴푸레한 불빛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건 또 뭐야. 긴장하고 바라보는데, 나타난 건 칼레우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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