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무슨 일이야?”
클로든에게 말투 이야기를 듣고 나서 황제와 황후를 제외한 모두에게 거의 반말만 했다. 황태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국에서 나랑 동등한 건 황제와 황후밖에 없으니까.
“우선 자리에 앉는 걸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아, 그래. 앉아.”
나는 가볍게 손짓하며 클로든이 빼준 의자에 앉았다.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칼레우스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나를 마주 보았다. 난 차와 쿠키를 먹었으나 상대는 별로 식욕이 없는 모양이었다.
“여전히 그 과자를 좋아하시는군요.”
그 과자? 쿠키를 씹다 말고 손을 내려다보았다. 파이지 가운데에 잼을 얹고, 굵은 설탕을 뿌려 구운 쿠키였다. 내가 좋아하는 건 맞는데 ‘여전히’라고 하는 걸 보면 옛날부터 좋아한 모양이다. 칼레우스는 유리가 어릴 적부터 보아온 사이였다. 황제와 황후는 자신들의 후계자이자 맏아들이 탑주와 돈독하기를 바랐으니까.
“기억나십니까? 탑주님께서 저를 바깥에 데리고 나가주셨던 적이 있습니다.”
날 리가. 애초에 내 기억이 아닌데. 그리고 유리가 훨씬 어리다. 유리가 칼레우스를 데리고 나간 게 아니라 그 반대겠지. 화법 한번 특이했다. 괜히 헛소리하지 않도록 나는 가만히 쿠키만 먹었다.
“제게는 좋은 기억인데, 탑주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까?”
“글쎄. 오래된 일이라.”
유리는 태어나자마자 탑주가 되었다. 지금 나이가 23세쯤, 칼레우스와는 열두 살 차이. ‘바깥에 데리고 나갈’ 정도의 연령이라면 기억이 안 나는 것도 이상하진 않다. 그러나 칼레우스는 대놓고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탑주님.”
그가 테이블에 한 손을 얹더니 내 쪽으로 약간 몸을 기울였다. 과하지 않을 정도의 향수 냄새가 느껴졌다. 가볍게 눈을 깜빡이자 긴 속눈썹이 나풀거렸다. 흰 얼굴에 금발에 쌍꺼풀까지 있는 눈매. 역시 아테올을 빼다 박은 듯 닮았지만, 아테올이 산뜻한 느낌이라면 이쪽은 조금 무게감이 있었다. 느끼함까지 가지 않는 건 잘생김 덕일 거다.
“어릴 적의 일은 제게만 행복한 추억이었던 건지요.”
“…….”
나직한 목소리. 씁쓸함과 쓸쓸함을 내비치는 눈동자. 내 손에 가까이 다가오려 하는 손끝. 알기 싫었지만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인간은 지금 나를 꼬드기려 하고 있다. 심지어 꼬이면 홀랑 넘어올 거라고 확신까지 하는 것 같다. 하긴, 저 얼굴에 저 신분으로 지금까지 못 꼬인 사람이 있겠느냐마는…… 나는 아니지.
왠지 재수 없다. 뭐라고 하고 싶은데 게이지가 깎일까 봐 차마 못 하는 거다. 쯧, 대체 이놈의 1%는 언제 오르는 거야. 특별 호감도인지 뭔지와 시우의 호감도까지 다 채워야 하는 건가? 아테올 자식은 거기까지 했으면서 얼마나 더 해야 호감도를 올려줄 건데?
재수 없는데 재수 없다고 말도 못 하는 인생. 답답하다, 답답해.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겨우 삼키며 과자를 마저 먹었다. 다 씹고, 차까지 몇 모금 마신 후에야 입을 열었다.
“무슨 용건이야?”
칼레우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내게 똑같은 질문을 두 번이나 하게 했다. 그게 얼마나 무례한 일인지 그도 잘 알 것이다.
“실은, 탑주님께 청이 있어서 왔습니다. 마물에 관한 겁니다.”
계속 해보라는 식으로 보고 있자 그가 말을 이었다.
“요즘 국립 병원에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 같습니다.”
“국립 병원?”
국립 병원은 황태자의 소관으로, 황궁에서 운영하는 자선 기관 중 하나였다. 자선 기관인 만큼 보여주기가 중요한데, 거기에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면 동요가 생기고도 남을 일이다. 그런 중요한 용건을 가지고 왔으면서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낭비하다니……. 쯧쯧.
“입원 중인 환자들이 자꾸만 이상한 것을 목격한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정보를 철저하게 숨기고 있지만, 만약 길어진다면 어찌 될지…….”
아하. 요는 내 도움을 받아서 아테올처럼 공을 세우고 싶다는 거군. 너무 속이 빤한 수작이라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냥 대놓고 말하는 수준이라 오히려 깔끔한가? 아니면, 나를 바보로 취급하나? 어쨌든 굳이 그걸 내가 도와줄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면 나랑 아테올이…….”
챙그랑.
“…….”
잠시 까먹었다, 게이지. 그냥 나랑 아테올이 가서 해결하겠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렇지. 여기서 내가 칼레우스에게 도와주겠다고 하는 게 맞겠지. 직접 해결해 주는 것과 돕는 건 많이 다르다. 칼레우스의 체면을 따졌을 때 말이다.
“……아테올도 함께 갔으면 하는데.”
다행히 이 정도 말에는 게이지가 깎이지 않았다.
“물론입니다. 그 아이가 함께 가준다면 저도 든든하지요.”
싫으면서 말은 잘해. 용건 끝났으면 가라.
“자세한 건 서신으로.”
“알겠습니다. ……탑주님.”
몸을 일으키는데 칼레우스가 얼른 따라 일어났다. 또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쳐다보자, 그는 내게 다가오더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손등에 입을 맞춰도 될까요?”
싫어. 거절.
그러나 손등에 입을 맞추는 예는 흔한 것이었기에 손을 내주는 수밖에 없었다. 내 손등에 키스한 칼레우스가 아테올을 닮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과거에도 지금도 저는 탑주님만을 경애합니다.”
으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아아아악!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비명도 지를 뻔했는데 겨우 참았다. 손을 확 빼서 손수건으로 미친 듯이 문지르고 싶은 걸 인내하느라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나는 헛기침을 한 뒤 조용히 손을 빼내고 돌아섰다. 칼레우스가 뒤에서 “물러가겠습니다.”라고 하는 게 들렸다. 그래, 빨리 꺼져. 빨리빨리. 저벅저벅 발소리가 멀어진 뒤 나는 세르타를 돌아보았다.
“저 자리에 소금 좀 뿌려.”
“예? 소금이요?”
“그냥 뿌려. 아무것도 묻지 말고.”
세르타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테이블의 소금 병을 집어 잔디 위에 촥촥 뿌렸다. 조금이지만 속이 후련한 기분이었다. 방에 돌아와 한참 동안 손을 씻고 나왔더니 클로든이 서신을 들고 서 있었다.
의아하게 보자 그가 대답했다.
“미리 서신을 준비해 왔던 모양입니다. 레이안 경에게 건네고 갔더군요.”
준비성 끝내주네. 속으로 혀를 차며 서신을 받아 확인했다. 국립 병원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자세하게 서술한 내용이었다. 요약하자면, 병원에 유령이 나온다.
무슨 유령 운운에 황태자까지 나서나 싶기도 하지만 이 세계에는 유령 형태의 마물도 있다. 진짜 유령과의 구분은…… 죽었나 안 죽었나 여부 아닐까? 유령인지 마물인지는 가서 봐야 알 수 있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 어느 쪽이든 황태자가 운영하는 국립 병원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게 달갑진 않을 거다. 그걸 나랑 같이 가서 해결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고.
나는 책상에 앉아 답신을 썼다.
***
국립 병원까지는 사뭇 비밀스럽게 움직였다. 성벽 두 개를 지나야 했던 옆 도시와는 달리 수도 안에 있는 곳이었기에 나와 황태자, 황자가 함께 대대적으로 가기엔 일이 너무 커지기 때문이었다. 모르던 사람도 죄다 국립 병원에 무슨 일이 있는지 주목할 것이었다.
시간이 늦어 불이 대부분 꺼진 국립 병원 뒷문에 원장을 비롯한 병원 직원들이 나와 있었다. 그들은 허둥거리며 우리를 안으로 안내했다.
국립 병원에 나타난다는 유령은, 3병동에서 4병동 사이의 통로에서 주로 발견된다고 한다. 사실 그 두 병동 사이에는 다른 병동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하나 있다. 옛날에는 병동으로, 지금은 창고로 사용하는 공간이었다. 창고라는 것도 말뿐이지, 사실 아무도 출입하지 않는 빈 곳이다.
여기에 또 얽힌 일화가 있는데, 환자가 목을 매달아 죽은 이후로 자꾸만 그 환자의 유령이 나타나며 다른 환자가 자살을 시도하고, 간호사들은 기이한 현상을 겪는 바람에 폐쇄를 해버렸다는 것 같다.
국립 병원은 워낙 환자가 많이 몰려들기에 작은 공간 하나도 아쉬운 곳이다. 그런 시설에서 병동 하나를 통째로 폐쇄하고 출입하지 않을 정도라니,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아무래도 4라는 숫자가 불길한 게 아니었을까. 한국 병원처럼 4를 쓰지 말아야 하는데.
어쨌든, 그 이유만으로 폐쇄한 건 아니었다. 국립 병원은 처음엔 목조로 작게 지어졌다가 증축을 거듭해 지금의 모양이 되었는데, 폐쇄된 병동이 가장 처음 지어진 자리다. 그 부분만 노후화되고 위험하기도 해서 재건축을 기다리는 겸 창고로만 쓰고 있다고 한다. 재건축 예산이 언제 나올지 몰라도.
여하튼 유령이 그 폐병동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와 통로까지 나온 게 아니냐는 거였다. 유령은 환자복을 입고 있고, 머리는 길게 풀어 헤쳤으며 혀를 빼문 모양이라고 하니 폐병동에서 목을 맨 그 사람이라는 수군거림이 나오기에 충분했다.
“이쪽입니다.”
원장이 직접 우리에게 길을 안내했다. 직원만 사용하는 통로라서인지 유독 더 낡고 오래되어 보였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불빛마저 음침했다. 긴 통로를 지나 삐걱거리는 나무 문을 열고 나가자 병동이었다. 병실 번호가 다 3으로 시작하는 걸 보니 3병동인 듯했다.
이 세계는 아라비아 숫자 5진법과 10진법을 이용했다. 여기에 아라비아가 있을 리 없으니, 내게 말과 글이 번역되어 보이고 들리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인 거겠지. 하지만 그게 적어도 5, 10단위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12나 13, 이런 단위에 숫자도 이상하게 보였다면 헷갈려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원장은 갑자기 엄청나게 빨라진 걸음으로 3병동을 지나쳤다. 환자가 있는 공간은 빨리 지나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순순히 그 뒤를 따라가면서 흘끗 양쪽 옆을 보았다. 칼레우스와 아테올이 각각 서 있었다. 그들은 처음 만났을 땐 아주 평범하게, 황실의 형제답게 인사를 나눴지만 그 후 서로 단 한 마디도 안 하고 있다. 은은한 신경전이 느껴졌다.
뭐 당연한 거지……. 이 상황에서는 원래 사이좋았던 형제라도 껄끄러울 텐데, 칼레우스와 아테올이라면 서로 칼을 빼 들지 않는 게 이상했다. 정확히는 칼레우스가 일방적으로 칼을 꺼내고 아테올은 그걸 막는 척 쓱싹. 으흠, 아니지. 아무리 아테올이 방해되는 사람은 쉽게 죽인다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이곳으로 들어가시면…… 그 통로가 나옵니다.”
원장이 비장하게 말했다. 어마어마한 공포 앞에라도 선 듯한 표정이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유령 마물 하나 앞에서. 전생의 나도 저 정도는 아닐 것 같다. 실제로 지금 태연하게 행동하고 있는데 게이지가 안 깎인다. 원장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문을 짚더니 천천히 밀어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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