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그는 드물게 말꼬리를 흐리더니 고개를 갸웃하곤 화제를 돌렸다.
“저 마물이 다시 살아나진 않을까요?”
“음……. 완전히 죽었어. 다시 살아나진 않을 거고, 왜 사람 눈에 띄진 않았는지 알겠네. 촉수만 빠르게 움직여서 마을을 탐색했던 거야.”
나한테 다가올 때까지 마력은 느꼈으나 촉수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위장도 능숙했을 거라는 뜻이다. 몰래 탐색하다 괜찮을 것 같다 싶었으면 사람을 하나씩 납치하기 시작했겠지. 촉수의 본체는 거대하고 소라처럼 단단한 덩어리였다. 아테올은 단번에 촉수의 약점을 찾아내고 찌른 것이다.
“네가 검기를 쓴다는 거, 알릴 생각 있어?”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면 숨길 이유가 없지요.”
“하긴…….”
이때부터 검기를 쓸 수 있었는데 숨긴 건, 그가 자기 궁에 틀어박혀 사는 게으른 망나니 이미지를 뒤집어쓴 이유와 비슷하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그가 계획적이고 신중한 사람이라는 걸 다시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나는 로브를 뒤집어서 다시 입었다. 장신구도 바깥 면에 다시 달고 나니 뒤집었다는 티는 전혀 나지 않았다. 혹시 몰라 마력을 조금만 써서 마물 주위에 결계를 만들고 마을로 향했다.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에게도 절대 밖에 나오지 말라고 일러둔 터였기에 나올 때처럼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을은 여전히 고요했다. 하지만 잠든 사람은 많지 않은 듯했다. 전쟁이 터지고 언제 적군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의 겁에 질린 침묵과 같았다. 이미 적군은 죽어서 널브러져 있으니 그럴 필요 없지만, 아침에 영주의 발표가 있기 전까지는 안심을 못 하겠지.
영주성은 불이 환하게 밝혀진 채였다. 말을 몰고 영주성으로 가자, 성문 앞에서 기다리던 세르타가 내 말고삐를 잡았다.
“괜찮으십니까, 탑주님?”
“별것 없었어.”
아차. 말한 순간 게이지가 또 조금 깎였다. 너무 여유롭게 말한 모양이다. 이대로 가면 아슬아슬한데. 어질어질하고 오싹한 느낌이 목 뒤를 타고 올라오는 바람에 가슴이 철렁했다. 이럴 땐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세르타가 고삐를 끄는 말에 타고 조용히 영주성으로 들어갔다.
홀에는 내 기사단과 영주의 기사단, 그리고 초조한 얼굴의 영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아테올이 말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자 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나는 아테올을 슥 보았다. 나는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것 같으니 대신 설명해 달라는 의미였다. 다행히 그는 곧바로 알아들었다.
“마물은 연체동물 종류더군. 그중에서도 두족류에 가까워 보였다. 이미 처리했으니, 내일 시체를 수거해서 영주성의 마법사들에게 분석하게 하도록.”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탑주님, 전하.”
영주는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숙였다.
[이벤트 발생!]
아테올을 칭찬해 주면 어떨까요?
헉, 웬일로 이벤트가 이렇게 적절하게 나왔지? 안 그래도 공을 아테올에게 돌리고 싶은 걸 게이지 깎일까 봐 못 하고 있었는데. 나는 한 걸음 나서 아테올의 옆으로 가서는 말했다.
“마물을 처리한 건 4황자의 공이야. 난 남의 공을 가로채는 건 별로라서.”
“탑주님?”
“4황자가 검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어. 정말 대단하던데. 앞으로도…… 제국을 잘 부탁해.”
영주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우리를 보았다. 그럴 법도 하지. 순식간에 몇 개의 정보가 쏟아진 거야.
[이벤트 성공!]
아테올의 이미지가 급상승합니다!
음, 다행이군. 아주 잘됐어. 처음 생각했던 대로 됐다. 아테올의 이미지 끌어올리기. 분명 이 마물의 출현을 신탁의 내용과 엮는 사람도 있을 거다. 이따금 도시에 마물이 나타나는 건 드문 일도 아닌데, 원래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게 있으면 모든 걸 다 거기에 연관시켜 보게 되는 법 아닌가.
그런데 그 마물을, 마탑주와 함께 나타난 4황자가 검기를 이용해서 처리했다. 검기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마법사보다도 적다. 제국에선 손에 꼽을 정도일 것이다. 거기에 내 ‘제국을 잘 부탁한다’는 말까지. 이제 황제를 향한 양위 압박은 더 거세어질 거고, 4황자파는 늘어날 거였다.
이런 식으로 몇 번만 더 아테올을 부각시키면 그가 황제 자리에 오르는 건 시간문제다. 어디서 또 마물 안 나타나나, 고민하는데 세르타가 다가왔다.
“탑주님, 시간이 늦었습니다. 방으로 모실까요?”
“4황자 전하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테올에게는 벨이 다가갔다. 영주가 방을 준비해 두었다며 호들갑 떨었다. 방까지 안내한다는 명목으로 영주와 영주의 부하들도 따라오려 하기에 세르타에게 눈빛을 보냈다. 세르타가 정중하게 그를 거절하고는 자신이 내 곁에 섰다. 이미 방 위치는 알아둔 모양이다.
나와 아테올의 방은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이름만 ‘방’이지 문을 열면 부엌만 뺀 집 한 채가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구조였다. 스르르 안으로 들어가 침실로 향하자, 세르타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는 곁방에 있겠습니다.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응.”
세르타가 물러가고 난 뒤, 혼자가 된 나는 로브를 벗었다. 끈적거리는 액체는 여전히 온몸에 묻어 있었다. 그나마 냄새가 안 나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점액질에 젖은 옷은 촉수가 나를 휘감았던 모양대로 몸에 달라붙고 말려 올라가서 난리도 아니었다.
“여기서 거울을 보여드릴 수 없는 게 아쉽군요.”
“…….”
어느 정도기에 그러지? 빠른 걸음으로 거울에 다가갔다가 기절할 듯 놀랐다. 이건 진짜……. 아까 아테올이 왜 그렇게 반응한 건지 알 수 있었다. 만약에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공략 대상이었다면 19금 게임에서 반드시 일러스트로 나올 만한 몰골이었다. 내가 공략 대상으로 수요가 있을지는 모르나 어디에든 특이한 취향은 있게 마련이니까. 아무튼 그 정도로 꼴이 말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조금 전까지 촉수한테 엉망진창으로 당하다 탈출한 사람 같았다.
씻자. 씻어야지. 씻고 옷은 당장 태워버리자. 창백하게 질려서 욕실로 가려는데 하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탑주님, 세르타입니다.”
“……왜?”
“4황자 전하가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할 말이 남았다고? 아까 할 것이지, 당장 씻고 싶은데. 으윽. 짜증을 내면서도 하는 수 없이 들여보내라고 말했다. 거울로 내 몰골을 보고 나니 더러운 로브라도 다시 뒤집어써야 하나 싶었지만…… 어차피 아테올은 다 봤는데 뭐.
그런 생각으로 가만히 있었는데, 세르타가 열어준 문으로 들어온 아테올이 그 자리에 딱 서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뭘 봐?”
“일부러 그렇게 하고 계신 겁니까?”
일부러? 뭐가 일부러야, 무슨 뜻이야…… 라고 물을 것도 없이 아테올의 눈빛이 수상쩍어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촉수가 내 몸을 더듬을 때랑 약간 비슷했다. 촉수하고 비교하자니 미안하긴 하지만.
“벗을 틈도 없이 네가 왔잖아.”
“그건 그렇죠. 목욕 시중을 들어드리러 왔습니다.”
“무슨 시중?”
“손을 씻어보니 혼자서는 어려우실 것 같아서요.”
그래서 황자씩이나 되는 인간이 목욕 시중을 들어주러 왔다고?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까딱이더니 말했다.
“침대 시중도 들었는데 목욕 시중이 뭐라고요.”
“…….”
할 말을 잃은 사이 아테올이 나를 휙 안아 들었다. 오늘 여러 번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진다. 버둥거릴 틈도 없이 나는 욕실로 운반되었다. 바닥을 판 형식의 욕조에는 이미 뜨거운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아테올이 나를 내려다보더니 다소 아쉽다는 얼굴로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왜 아쉬운 건데?!’
“촉수 괴물의 체액을 핥는 건 내키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요.”
‘뭐가 어쩔 수 없어! 뭘 어쩔 셈이야!’
하지만 아테올은 속으로 지르는 내 비명을 듣지 못한 채, 끈적끈적하게 젖어 달라붙은 옷을 무슨 양파 껍질이라도 까듯이 쉽게 벗겨내고 나를 욕조에 집어넣었다.
아테올도 옷을 벗었다. 나도 모르게 홀린 듯 그 모습을 쳐다보게 되었다. 겉옷, 셔츠, 바지를 벗을 때마다 팔뚝과 가슴, 허벅지의 돌처럼 단단하게 짜인 근육이 드러났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욕조로 다가오는데 무슨 그리스 대리석 조각상이 걸어오는 줄 알았다.
비루하게 마른 몸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어 물속으로 감춰보았으나 물이 투명해 헛일이었다. 그는 굵직한 팔을 뻗어 물비누 병을 잡더니 해면 위에 듬뿍 따랐다.
“왜 그렇게 숨어 계십니까?”
“숨은 거 아니야.”
조각상 옆에 달라붙어서 웅크리고 있는 게 물론 숨은 걸로 보일 수 있겠지만. 아테올은 나를 끌어당기더니 정말 몸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거품을 낸 해면에 문질러진 체액은 금세 사라져 흐르는 물을 따라 배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어느 정도 몸이 깨끗해지고 나자, 아테올의 손길이 은근히 바뀌기 시작했다. 단단한 손바닥이 살을 꾸욱 누르며 미끄러졌다.
“……앗!”
소리를 내자마자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내가 낸 목소리가 습기로 가득한 욕실을 계속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테올은 그런 내 모습을 즐거운 듯 바라보며 나를 자기 허벅지 위에 등 돌린 채 앉혔다. 마주 보는 자세가 아니라서 다행이라 생각한 것도 잠시, 엉덩이 사이에 닿은 이상한 감촉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떼려 했다.
하지만 아테올이 한 팔로 내 허리를 휘어 감았다. 나는 그의 다리 위에서 몸을 버둥거리는 꼴만 되고 말았다. 꼭 아래를 일부러 문지른 것처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귓가에 아테올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만져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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