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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32화 (32/93)

32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주위의 반응은 난리를 넘어 아수라장이었다. 차기 황제로 4황자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자들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어디에 있느냐며 아우성쳤고, 이제라도 아테올에게 줄을 대보려는 자들은 접근할 작은 틈새라도 찾기 위해 눈을 개구리처럼 뜬 채 근처를 서성거렸다.

이런 경우는 없네, 어쩌네 하며 길길이 날뛰는 인간들을 입 다물게 하는 건 간단했다. 마물을 잡으러 갈 뿐 다른 뜻은 없다고 말하면, 그들은 할 말이 없다.

탑주가 정말로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탑주는 제국을 지키고 보호한다는 의무가 있었다. 딱히 보호할 일조차 안 생길 뿐. 그 의무를 다하러 가겠다는데 말리면 말리는 쪽만 이상한 사람이 되고, 거기에 누구를 동행시키든 그건 내 마음이었다.

즉 정치적인 의도가 빤히 보이긴 하지만, 마물 퇴치라는 큰 목적이 있어서 더 이상 아무도 아무런 말도 못 하게 된 상황이라는 의미였다.

아테올은 그 상황이 제법 마음에 든 듯했다. 루야드로 가는 포털 앞에서도 기분이 꽤 좋은 기색이었다.

“왜. 또 권력의 맛이라도 느껴?”

“감미롭군요.”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포털로 들어섰다. 조도 높은 라이트를 쏜 것처럼 눈앞이 확 밝아지더니, 서서히 돌아온 시야에는 익숙지 않은 풍경이 있었다. 높은 천장과 마탑과는 다른 모양의 창문. 벽에 무수히 걸린 그림. 붉은 융단. 바로 루야드의 영주성이었다.

포털 앞에는 족히 수백 사람이 엎드려 있었다. 그중 앞과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건 세르타와 벨을 비롯한 내 호위 기사단이었다.

영주와 사람들을 대강 일어나게 하고 세르타에게 다가갔다. 그는 내가 묻기도 전에 알아서 입을 열었다.

“마물의 모습을 직접 본 사람은 없으나,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 같은 점액이 여러 군데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몸에 묻어 있었던 사람도 있고요. 점액을 채취해서 확인하니 특별한 독성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달팽이…….”

“크기는 상당하다고 합니다.”

으윽, 끔찍하다. 세르타가 내민 조사 자료를 훑어보았다. 마물을 목격한 자는 없으나 이곳에 거대한 무언가가 나타나고 있다는 건 확실한 듯했다. 자료를 다시 세르타에게 건네고 아테올을 돌아보았다. 이 상황인데 꿔다 놓은 보릿자루로 보이지 않는 건 상당한 재능이었다. 하긴 저 얼굴인데. 남의 가족 칠순 잔치에 데려다 세워놔도 거기서 주인공이 될 거다.

“거대한 달팽이래. 어때?”

“흠……. 흥미롭습니다.”

“비위 강한가 봐……. 난 약한데.”

아테올은 어깨를 으쓱했다. 거대 달팽이가 점액을 남기며 돌아다닌다는데 아테올은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다. 잘된 일이었다. 어차피 마물 처치는 그가 할 테니까.

그날 밤, 나는 아무도 없는 거리를 둥실 날아올랐다. 영주의 명령으로 도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집에서 덧창까지 닫고 숨은 채 숨죽이고 있었다. 신전의 높은 첨탑에 발끝으로 올라서자 고요한 밤의 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바람 소리, 그리고…… 챙그랑…….

“…….”

게이지가 깎였다. 그렇지. 이렇게 마법을 쓰는 게 전생의 나였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재화다, 재화. 딱 절반 깎일 때까지만 쓰자. 후드를 걷고 거미줄을 얇게 치듯이 마력을 흩뿌렸다. 물이 퍼지듯이 마력의 범위가 점점 넓어졌다. 도시 중심으로, 외곽으로, 성벽을 넘어 울창한 숲으로. 숲에 이르렀을 때 마력의 선에 탁, 하고 무언가가 걸렸다.

나는 마법을 거두고 첨탑에서 아래를 보았다. 아테올이 신전 앞에 서서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묘한 표정이다. 발끝을 튕기듯 떼어 아래로 뛰어내렸다. 소리 없이 아테올 앞에 내려서자 그는 여전히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특별 호감도]

40%

왜 올랐지?

정말 알 수 없는 인간이다. 나는 후드를 다시 깊게 뒤집어쓰며 숲 쪽을 가리켰다.

“저기야. 마물의 본거지.”

“바로 갈까요.”

“시간 끌 필요 없잖아.”

바로 옆에 말이 세워져 있었다. 날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내가 아테올을 들고 가야 할뿐더러 굳이 마력을 퍼뜨리며 다가가서 마물을 자극시킬 필요는 없다. 빠르게 말을 달리자 게이지는 또다시 챙강챙강 깎였다. 아테올이 옆에 있다고 해서 무조건 안 깎이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러니까 호감도 마지막 1%가 채워져야 하는데, 대체 언제 되냐고.

괜히 옆에서 달리는 아테올을 흘겨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곧바로 돌아본 그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다분히 지어낸 웃음 같았다는 뜻이다. 이제부터 마물 퇴치에 집중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물은 네가 처리해야 해. 알지?”

“알고 있습니다.”

아테올의 허리춤에는 검이 있었다. 그가 날 죽인 날 들었던 그 검이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애써 고개를 돌렸다. 굳게 잠긴 성문은 내가 다가가자 무게가 없는 것처럼 소리도 없이 열렸다. 이럴 땐 모든 문이 자동문인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지 않다.

성벽을 지나 조금 더 가자 금세 울창한 숲길이었다. 한밤의 숲속은 으스스했으나, 아테올이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이었기에 나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숲보다 내가 더 음침하다고 생각하니 의외로 쉬웠다. 귀신도 내 얼굴 보면 도망갈걸.

흘끗 게이지를 확인했다. 딱 절반. 약간 어지러워지려고 한다. 여기서 더 깎이면 위험하다. 이제 전생의 빙의 한 달 차였던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해야 한다. 나였다면…… 말이 익숙지 않아서 고삐를 꽉 움켜쥐었겠지. 책에서 익힌 대로 다리에 힘을 주고 허리는 약간 굽히고.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아테올이 괴이쩍다는 얼굴을 했다. 어쩔 수 없어. 너도 게이지가 생겨보면 이해할 거야. 영원히 못 하겠지.

조금 더 나무가 우거진 숲 안쪽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문득, 목덜미가 오싹해지는 기운이 확 느껴졌다. 아테올이 나를 돌아보고 나도 이상을 눈치챈 순간, 미끈하고 굵직한 무언가가 어둠 속에서 뻗어 나와 내 몸을 휘감고 홱 낚아챘다.

황당한 얼굴을 한 아테올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그의 표정은 문자로 표현하자면 ‘???????????????’ 정도였다. 물음표가 백 개라도 모자랄 것이다. 나는 내 몸을 휘어 감은 것을 손으로 더듬었다. 우툴두툴하고 엄청나게 미끈거렸고, 그것을 곧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굵기가 제각각인 촉수 다발이었다.

내 허리통만 한 것도 있고, 아테올의 팔뚝이나 내 손목 정도 되는 것도 있었다. 그것들이 내 몸을 온통 휘어 감고 미끌미끌한 그것으로 더듬으며 조여댔다. 게다가…… 이것들의 움직임은 범상치 않았다. 촉수 주제에 의도가 명백히 보였다! 아무리 19금 미연시라도 이건 너무 갔다. 미친 듯이 발버둥 치며 소리 질렀다.

“아테올!”

마법을 써서 한 번에 없앨 수도 있겠지만, 그러자니 게이지가 간당간당했다. 저번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웬만해선 게이지를 더 떨어뜨리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아테올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촉수가 연결되어 있는 만큼 본체는 찾기 쉬웠다. 아테올이 우선 말에서 훌쩍 뛰어올라 나를 옭아맨 촉수의 뿌리 부근을 베어냈다.

하지만 촉수는 본체에서 잘려 나와서도 산낙지처럼 힘을 잃지 않은 채 계속 날 조이며 꿈틀거렸다. 그러는 동안 점점 촉수는 말도 안 되는 부근으로 꾸물꾸물 다가갔다.

“아악! 이것 좀 어떻게 해봐!”

나를 흘끗 본 아테올이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기더니 몸을 낮추며 무언가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이내 그가 어느 한 지점을 향해 달려갔다. 촉수 때문에 이리저리 흔들리느라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심지어 촉수는 다시 찰싹찰싹 저들끼리 달라붙어서 나를 계속 공중에 띄워 놓았다. 굵직한 촉수 하나가 내 입술로 가까이 다가왔다. 입술에 끄트머리가 살짝 닿은 것만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아서 나도 모르게 불을 작게 일으켜 그슬려버렸다. 촉수끼리 신경이 연결이 된 건지, 불에 닿자 촉수들은 마구 날뛰었다.

그러면서 여전히 날 놓지 않는 게 촉수의 정신력이라고 해야 할지……. 이런 것에 정신력이라는 말을 써버린 것에 대해 회의가 들어 머리를 감싸 쥐는데 갑자기 촉수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어떻게 된 건가 싶어 고개를 쭉 빼자, 아테올이 촉수의 어딘가에 칼을 박아 넣고 있었다.

그대로 아테올은 칼날을 비틀며 옆으로 길게 그어냈다. 금발이 찰랑거리고 붉은 벨벳 망토가 펄럭거리는 게 어둠 속에서도 보였다. 그의 검에서 흘러나오는 마력 때문이다. 하, 이때부터 이미 검기를 사용할 수 있었군. 마력이 느껴지기에 검기 수련만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테올의 마력은 칼날이 찌르고 들어간 자리에서부터 푸른 불꽃처럼 타오르며 화르르 번졌다. 나를 옭아맨 촉수가 비명을 지르듯 발광하며 꿈틀대다가 나를 놓쳤다. 땅에 가볍게 착지하려는 나를 아테올이 다가와 받아 안았다.

“……굳이 안 받아줘도 되는데.”

“알고 있습니다.”

촉수의 미끈거리는 체액이 아테올에게도 묻었다. 나는 아테올의 팔에서 훌쩍 뛰어내려 로브를 벗었다. 뒤집어서 다시 입을 생각이었는데 옆에서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말들이 쳐다보는 건 아닐 테니 아테올이겠지.

“뭘 그렇게 봐?”

“글쎄요. 여기서 거울을 보여드릴 수 없는 게 아쉽군요.”

“엉망이겠지. 알아.”

“그냥 엉망이라기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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