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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31화 (31/93)

31화

03. 사실은 무척 간단한데

아니, 모르는 건 맞겠지. 적어도 상태창이 보여주는 호감도와 아테올의 태도는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정말…… 지금의 아테올에게 전생 일을 물어볼 수도 없고 미칠 노릇이었다.

게다가 전생과 지금 사이에는 6년이라는 시간 차가 있다.

어쩌면 시우가 기억을 찾기까지 6년이 걸리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역시 뭔가 특별한 의식이 필요하다거나. 시우가 나타나기는 지금 나타났어도 내게서 마법을 되찾아 가기까지 어쨌거나 6년이 걸린다면 나는 6년을 버는 거다. 그 6년 동안 부지런히 재물을 모아서 평화롭게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안이한 생각 아닐까. 이미 내가 아테올과 가까이 지낸 시점부터 내 주변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전생과 다르게 흘렀다. 그러니 시우의 귀환이 6년 앞당겨진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났고, 마무리를 위해 대공이 시우를 미리 수도에 보내놓은 건지도 말랐다.

하지만 기억 상실은? 굳이 그런, 들킬 수도 있는 설정을 할 필요가 있나? 시우는 말과 예법이 확실하게 어눌했다. 내내 탑의 주인으로 살던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고, 기억을 잃은 사람이라고 하면 그렇구나, 수긍 가능한 정도였다. 그리고 마력 또한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으음, 하지만, 또 하지만……. 머리가 금방 파업을 선언했다. 나는 체념하여 말했다.

“편히 지내. 대공이 보내는 손님은 드무니까, 4황자도 잘 대접해 줄 거야.”

‘그렇지?’라고 하듯 아테올을 보자 그가 가볍게 눈썹만 까딱였다.

“가, 감사합니다, 탑주님. 저…… 이런 부탁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시우가 우물쭈물하며 나를 보았다. 저런 말로 시작하면 대부분 안 되는 부탁이던데. 아테올도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애초 시우의 위치에서 내게 ‘부탁’이라는 말을 쓰는 것부터 무례한 일이었다.

“탑주님을 보면 왠지 안심이 되는 것 같습니다. 자, 자주 찾아와 주시면…… 안 될까요? 탑에는 제가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들어서…….”

봐, 역시 예법에 서툴다. 아테올이 미간을 찌푸렸다. 탑에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함부로 만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 나를 오라 가라 하다니, 괜찮은 배짱이었다. 아테올이 차갑게 얼굴을 굳히고 내 표정도 딱딱해졌다. 분위기가 이상한 듯하자 그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는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송, 합니다. 제가 아직…… 예법을 잘 배우지 못해서.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면…….”

그런데 궁중 예법이고 뭐고 높은 사람을 오라 가라 하면 안 되는 건 동서고금 이 세계 저 세계를 막론하고 당연한 일인 것 같은데. 기억을 잃어서 그런 것까지 잊어버린 걸까. 아테올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는 예의도 모르는 애송이를 대리인이라고 굳이 보낸 건가? 이유가 뭐지? 평소 연회 참여를 많이 하는 편도 아니었으면서.”

노여움이 실린 목소리에 더욱 당황했는지 시우가 찻잔을 엎을 듯 허둥거리다가 겨우겨우 대답했다.

“그건, 사실은 제가 수도에 가고 싶다고 졸랐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나와 아테올이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조, 졸랐다고? 그 대공을? 심지어 대공이 들어줬어?

“책에서 읽기로 수도에는 여름이 있고 태양이 밝고, 아주 화사한 곳이라고 해서. 특히 우기가 끝난 직후에는 하늘이 아름답다기에 꼭 와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시우의 얼굴은 들떠 있었다. 그건 꼭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유럽 어느 도시에 가고 싶어서 꿈만 꾸던 내 얼굴과 비슷했다. 지금은 그 유럽 도시랑 다를 바 없는 세상에 와 있는 나와, 꿈꾸던 아름다운 하늘을 보고 있는 시우. 왜인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어때? 아름다워?”

“네!”

“그러면 됐지.”

[호감도: 시우]

15%

시우는 당신을 ‘ㅈ■■■■■■■■…….’ 라고 생각합니다.

ㅈ…… 뭐? 좆같다고? 이제 가리다 못해 초성만 보여주냐. 참신하게 숨기네. 게다가 길어. 대체 이놈의 해설 왜 붙이는 거야. 열받으라고? 스트레스 줘서 내 수명 줄이려고?

“그래. 그럼 이만 물러가서 쉬도록.”

아테올이 갑자기 자리를 접었다. 시우가 꾸벅 인사하며 물러나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후, 그는 나를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침실로 들어가 꺼낸 첫마디는 이랬다.

“이제 아이는 갔으니 어른끼리 시간을 보내볼까요?”

“…….”

느끼한 건 둘째 치고, 누가 애고 누가 어른이냐.

“나나 시우나 비슷하잖아.”

시우도 많아 봐야 스물서넛일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말에 아테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눈은 뭐야. 확 찔러줄까.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십니까?”

“진심이지.”

“뭐…… 그럴 수도 있죠.”

무슨 뜻이람. 내가 늙어 보인다는 거야? 괜히 자존심이 상해서 노려보자,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내 후드를 휙 걷더니 나를 빤히 보았다.

“확실히 얼굴은 닮은 구석이 있군요.”

닮은 구석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똑같이 생겼잖아. 음침한 것까지.

“얼마 전 탑주님의 측근이 로아네스 대공에게 다녀왔지요. 별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없었어. 다시 물어봤는데 그냥 늘 그렇듯이 바빴다는 말밖에. 그리고 뭐, 동물을 키운다나.”

“동물? 그 얼음덩어리 같은 인간이 별일이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지금 어디 만져?”

“허벅지요.”

“질문한 거 아니야.”

“그럼 뭡니까?”

말하면서 손은 슬그머니 허벅지 안쪽으로 들이밀고 있었다. 이대로 또, 하자고? 하지만 거절하기엔 내 몸이 너무 솔직했다. 슬금슬금 물러나는 척만 하면서 가만히 있는데 문득 아테올이 손을 멈췄다.

“로아네스 대공을 아십니까?”

“그야 알지.”

“어떻게요?”

“어떻게라니?”

아테올이 날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대공은 잘 알려지지도 않은 사람인데, 자칭 가짜 탑주이신 당신이 어떻게 대공을 아는지 궁금해져서요.”

“…….”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테올이랑 있으면 게이지가 안 깎이는 건 이런 점이 문제였다. 내가 전생과 다른 행동을 해도 바로 알 수가 없다. 이때의 나는 로아네스 대공이 누구인지 이름이나 겨우 들어본 상태였어야 했는데. 짧게 고민하다가 재빨리 둘러댔다.

“공부했어.”

“공부.”

“내가 대공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 이상하잖아.”

“흠……. 그렇군요. 나름 열심히 측근들을 속이기 위해 노력하고 계시다고.”

어감이 좀 별로긴 했지만 맞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계속할까요?”

“뭘……!”

내 말에 웃기만 한 아테올이 다시 손을 미끄러뜨리려 했을 때였다. 침실 문을 조급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나와 그가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누구냐.”

“레사입니다, 전하. 급보가 들어왔습니다.”

아테올이 나를 놓고 문으로 다가갔다. 날 발견한 아테올의 수행 기사가 무릎을 꿇었다.

“가장 높은 탑의 주인을 뵙습니다.”

나는 아테올을 보았다. 아테올이 그녀를 일으키고는 급보에 대해 물었다. 레사는 복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국의 모든 신전에 일시에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뭐……?”

“……황제에게, 양위를 명하는 내용입니다.”

실내가 찬물을 뿌린 듯 고요해졌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모르겠습니다. 전하의 말씀대로 정말 갑작스러운 일인지라, 황궁에도 이제 막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나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렇게 갑자기, 아무 전조도 없이 양위라고? 모든 신들이 한 번에? 그건 그 모든 신들이 입을 모아 ‘지금의 황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었다.

아테올이 나를 쳐다보았다. 혹시 내가 개입했나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나라도 신전은 쉽게 건드릴 수 없다.

“우선 탑으로 돌아가야겠어.”

“모시겠습니다.”

탑으로 돌아오니 탑의 분위기 역시 술렁거리고 있었다. 양위라. 내가 아테올을 지지하기 시작하고, 진짜 유리가 나타난 이 시점에. 이건 정말 우연일까?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

신탁의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이곳 사람들에게 신은 종교라기보단 실제로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였다. 그걸 종교라고 부르면 종교긴 한데, 그리스 로마 신화 시대를 생각하면 비슷할 것이다.

그런 세계에서 모든 신전에 똑같은 신탁이 내려왔다. 그것도 한날한시에. 거의 세상 모든 사람이 같은 날에 같은 꿈을 꾼 것과 비슷한 파급력이었다. 게다가 그 내용이 황제에게 양위를 촉구하는 거라니.

탑에도, 황궁에도 벌떼처럼 알현을 청하는 손님이 몰려들었다. 황제의 방에서는 매일같이 온갖 물건과 가구와 시종의 머리통이 깨져 나간다고 하고, 황후는 앓아누웠다. 신하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도 은근슬쩍 황제의 통촉을 갈구하는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 가장 주목받는 건 물론 나였다.

탑으로 구름처럼 사람이 몰려들었다. 클로든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하면서도 침착하게 그들을 모조리 돌려보냈고, 세르타와 벨은 탑의 경비를 강화했다. 철통처럼 닫힌 탑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서신을 받는 것밖에 없었다.

서신도 당연히 전부 들어오는 건 아니었다. 대부분의 정성 들인 서신이 클로든의 손에 걸러져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사실 정성껏 쓴 헛소리들일 거라 그렇게 되어도 쓴 사람에게 별로 미안하지 않았다.

아테올에게서 온 것도 있었다. 시우는 잘 지켜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지금 상황에 내가 아테올을 만난다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기에 서로 거처에 틀어박힌 채였다.

황제와 황후가 각각 보낸 서신은 읽지 않고 클로든에게 넘겼다. 어차피 내용은 예상이 갔다. 한참 동안 서신을 정리한 후에 클로든이 내게 다가왔다.

“탑주님, 이건 다른 건입니다만……. 루야드에 마물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마물?”

안 그래도 정신없는데 갑자기 웬 마물이야. 그것도 루야드처럼 가까운 곳에. 나한테 이야기가 올라올 정도면 상당히 심각한 사태라는 뜻이었다. 인상을 찌푸리려다 퍼뜩 좋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어떻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신전에 황제의 양위를 종용하는 신탁이 내려왔다. 규모가 규모인지라 황제는 이를 무시하기 어렵다. 만약 얼마 전에 이런 신탁이 내렸다면 다음 황좌는 당연히 황태자의 차지였겠으나, 이제 그러지 못했다. 내가 4황자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내가 갑작스럽게 4황자를 지지한 것과 맞물린 타이밍. 이 기회를 잘만 이용하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아테올이 황제가 될 수도 있다. 아테올이 황제가 되기만 한다면야 나는 이제 위험할 게 없었다. 적당히 한 재산 챙겨서 도망만 가면 되는 일이다.

“내가 직접 갈게.”

챙그랑. 이제 익숙해진 소리가 들렸다. 게이지 깎이는 소리. 어쩔 수 없다. 재화다, 재화. 돈을 써야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수 있다.

“예?”

“내가 직접 가겠다고. 아테올이랑 같이.”

“그렇게 되면…….”

똑똑한 클로든은 내 말뜻을 바로 알아듣고는 눈을 슬쩍 좁혔다가 고개를 숙였다.

“4황자 궁으로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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