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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30화 (30/93)

30화

03. 사실은 무척 간단한데

“우선 대공은 제위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뭐 그거야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 거고. 만약 저게 당신이 말씀하시는 ‘진짜’라면, 이런 식으로 보내진 않을 겁니다.”

“이런 식?”

“혼자가 아닙니까. 게다가 로아네스 대공이 지금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시기도 아니고요.”

“그렇긴 하지…….”

우기가 끝난 직후의 나크사벨은 우기에 활발해졌던 마물들이 여름 나기를 위한 마지막 사냥에 나서기 때문에 소란스럽다. 군의 수장인 대공이 함부로 움직일 만한 시기는 확실히 아니었다. 굳이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때에 진짜 유리처럼 중요한 인물을 혼자 몸으로 수도에 보낸다는 건, 확실히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어쩌면 정말 다른 속셈 없이, 아무것도 모르고 인사차 대리인으로 보낸 것일 수도 있다.

끄덕이는 나를 보고 있던 아테올이 자세를 바꾸며 말했다.

“그보다 우선 중요한 걸 여쭙지요.”

그보다 중요한 게 뭔데.

“당신이 스스로를 가짜라고 확신하는 근거가 있으십니까?”

“……그건…….”

순간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테올은 말을 이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까 그자를 만났을 때, 마법을 느끼셨습니까. 제 식견이 부족해서인지도 모르지만 그자는 평범하게 보이던데요.”

“지금은…… 그래. 지금은 내가 유리의 마법을 전부 쓸 수 있어. 하지만 마법을 거둬 갈 방법이 있을 거야. 그리고, 근거?”

여기는 책 속의 세계고, 나는 그 세계에 가짜 악역 캐릭터로 빙의했으니까. 덤으로 너는 책에 나오는 인물이자 내 공략 캐릭터야. 이 말은 당연히 회귀했다는 소리 이상으로 할 수 없었다. 나는 전혀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설명을 하는 대신 뻔뻔하게 나갔다.

“근거 같은 게 어디 있어. 내가 내 입으로 가짜라고 말하는데. 진짜를 두고 사실은 내가 진짜라고 우기는 것도 아닌데 근거까지 대야 해? 마법을 왜 내가 쓸 수 있는 건지는 나도 몰라.”

“…….”

듣고 보니 그럴듯한지 아테올이 미간을 찌푸렸다.

“좋아요. 당신이 가짜라고 합시다. 그럼 정말 마지막으로 묻겠는데…… 제가 아니어도 됐던 것 아닙니까?”

같은 질문을 지금 몇 번째 하는 건지. 아무래도 아테올은 내가 계속 미심쩍은 모양이다. 상태창에 대한 설명 없이 그를 고른 이유를 증명할 방법은 역시 없었다. 해서 이번에도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키스했잖아. 너한테.”

아테올이 딱 굳었다.

“그게 이유야. 더 필요해?”

“하하…….”

헛웃음 비슷한 소리를 들으며 나는 긴장했다. 그런 감정적인 말에 넘어갈 것 같냐면서 비웃는 건 아닐까. 그러나 그에게서 나온 대답은 아주 뜻밖이었다. 그는 휙 몸을 일으키더니 다가와 내게 키스했다.

[호감도: 아테올]

99%

상태창에 ‘특별 호감도’가 추가됩니다.

[특별 호감도]

+30%

가지가지 한다……. 특별 호감도는 또 뭐냐고. 하지만 곧 상태창에 신경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몸이 뒤로 떠밀렸고, 털썩 앉아버린 내 위로 아테올이 한쪽 무릎을 소파에 걸치며 걸터앉았다. 아테올의 두 손이 내 머리를 감쌌다. 그는 입술이 얼얼해질 때까지 내게 키스한 후에야 조금 떨어졌다. 그래도 여전히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럼 제가 뭘 해드릴까요?”

“읏…….”

“당신이 마법을 쓸 수 있는 이상, 그자는 아무것도 못 하는 거겠죠. 그럼, 지금 그자를 죽일까요?”

미쳤다. 역시 마음이 얼음장이야! 하지만 아주 반갑지 않은 것도 아닌 걸 보니 나 역시 남 얘기할 때가 아닌 듯했다.

“주, 죽이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럼 어떻게 합니까?”

“좀 더 평화로운…… 방법이 있을 것 아냐. 나는 도망만 갈 수 있으면 돼.”

“도망이라.”

아테올이 내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 손길이 무척 간지러웠다. 저절로 눈이 가늘어져서 인상을 찌푸리듯이 하자 아테올은 내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추고는 일어섰다.

“일단 그자가 마탑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게 좋겠군요. 하지만 황궁에 머무는 동안 곁에 두는 게 나을 듯하니…… 제 궁으로 초대하겠습니다.”

“네 궁? 초대에 응할까?”

“무언가 생각을 품고 왔다면 응하겠죠. 아니라 해도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고요.”

“그렇다면…….”

마탑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한다는 건 좋은 생각 같았다. 아무래도 진짜 탑주가 마탑에 오는 건 나로선 꺼림칙하니까. 전생에 진짜 유리는 어느 순간 갑자기 마법을 되찾아갔다. 지금은 정면에서 마주쳤는데도 마법이 사라지거나 하는 기색이 없는 걸 보면, 어떤 의식이나 일정 시간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게 무엇일지 아테올이 감시해 준다면 나로선 고마운 일이었다.

“알았어, 그럼 부탁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테올의 말대로 시우는 그 초대에 응했다.

화려하게 차려진 테이블을 앞에 둔 시우는 우물쭈물하며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분위기에 주눅까지 들어 보이는 게 아무리 보아도 화려한 생활과 문화에 익숙한 사람은 아니었다.

“대공 전하의 수양 조카라고 들었다.”

“그, 그렇습니다, 4황자 전하.”

“수도에 오는 건 처음인가? 북부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겠지.”

시우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더워서 깜짝 놀랐습니다. 같은 신들이 태양과 달을 움직이는데 이렇게 기온이 다를 수 있다니.”

“북부 밖으로는 한 번도 안 나가본 모양이군.”

아테올의 말에 시우는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머뭇머뭇 대답했다.

“사실은 제가 기억을 잃어서요. 나크사벨에서 깨어나기 전의 일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뭐?”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나도 모르게 물었다. 기억 상실이라니, 너무 뜬금없어서 오히려 진짜 같다. 흘끗 날 보는 아테올의 시선이 느껴졌다. 시우가 주뼛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정수리에서까지 당황과 어쩔 줄 모르겠다는 기색이 감돌았다. 아무래도 기억을 잃었다는 말은 지어내거나 둘러대는 소리가 아닌 듯했다.

“제가 기억한 건 시우라는 이름, 딱 하나였습니다. 성도 몰랐어요. 하지만 운 좋게 대공 전하께서 저를 발견하셨고 그분의 동생, 후작님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로아네스라는 성까지 줬다니. 이 나라는 작위 앞에 영지명이 아닌 본래 성이 붙었다. 로아네스는 제국이 건국되었을 때 나크사벨 대공으로 임명된 당시 황제의 동생에게 초대 황제가 지어준 성으로, 지금까지도 황실의 피가 진하게 섞이며 줄곧 이어져 왔다. 그런 고귀한 성을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수양 조카에게 주었다? 대공은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항상 말해 온 사람이다. 대공과 시우 사이에 무언가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그럼 너는 어디서 나타난 거야?”

“비 오는 거리에서 죽어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빤히 시우를 보았다. 역시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없다. 내 마력이 빠져나가지도 않았다. 나는 마법을 바닥으로 흘려 가볍게 땅을 진동시켰다. 테이블 위 찻잔의 찻물이 조금 흔들릴 정도로, 약한 진동이었다. 시우가 멈칫하더니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테올만 나를 쳐다봤을 뿐이다.

지진도 강도가 약하면 둔한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시우는 둔한 편인 듯했다. 진동을 멈추고 난 후에도 조금씩 흔들리는 찻잔을 본 후에야 그가 말했다.

“지진이 났던 걸까요?”

“별것 아냐.”

“그,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나는 슬쩍 상태창을 보았다.

[새로운 공략 캐릭터 등장! 이름: 시우]

‘시우’ 공략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예>

<아니요>

아직 예를 누르지 않은 상태였다. 시우를 공략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시우 공략에 성공하면 특별한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냥 공략도 아니고 다른 효과를 얻기 위한 부수적인 루트인가. 어째 약간 미안한 것 같기도. 로브를 고치는 척 슬그머니 허공 위의 <예> 버튼을 스쳤다.

[이벤트 발생!]

시우는 이 자리가 어색합니다. 친근하게 말을 걸어보는 건 어떨까요?

진짜 어색한가? 기억을 잃은 게 정말로 진짜인가. 하지만 밑져야 본전이다.

“시우.”

“넷, 네. 탑주님.”

시우가 바짝 긴장하며 나를 보았다. 순간 걱정이 들었다. 내가 말 건다고 그게 친근하게 들릴까. 더 긴장하는 거 아냐? 먹던 과자 체하겠다.

“북부 생활은 어땠어?”

“아, 저는…… 북부 말고는 기억하는 게 없어서, 좋았습니다. 밖은 춥고 건조하지만 실내는 따뜻했고요.”

“수도에 비하면 어때.”

“솔직히 말하면 북부보다 훨씬 화려하고, 새로운 세계입니다.”

아무래도 극지와 영구 동토에 가까운 나크사벨보다는 수도가 낫겠지. 지금 계절이 후덥지근한 여름이라 해도, 여름이라고 해서 황궁 안이 더워지는 건 아니니까. 다시 입을 열려 했으나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제법 내향적이고 숫기가 없는 편이었다. 이런 자리에서 대화를 주도해 나가는 것에는 영 재능이 없다. 겨우 다음 할 말을 떠올려냈다.

“대공은 잘 지내고?”

“예, 언제나 건강하십니다. 제게 검술을 가르쳐주시다가 포기하셨습니다.”

말한 직후에 시우는 얼굴을 붉히며 후회하는 표정을 했다. 뒤의 말은 괜히 했다 싶은 모양이다. 검술이라니. 마법사가 검술은 배워서 뭐 해. 나도 체력 12에 검 스탯은 상태창에도 없는 채로 잘만 살고 있다. 아직 상태창이 보인 건 한 달 좀 넘은 정도지만, 지난 6년 동안도 그렇게 잘 살았지. 잡아본 칼 중에 제일 날카로운 게 스테이크 자르는 칼이었으니까.

“검이 안 된다면 마법은?”

“그것도…… 전혀 재능이 없는 것 같다고 들었습니다.”

시우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흘끗 아테올을 보자 시우를 응시하고 있다. 그가 하는 말이 진실인지 가늠하려는 것 같았다. 그의 눈에는 어떨지 몰라도 난 감이 안 잡힌다.

대공은 왜 시우를 자기 수양 조카로까지 삼고 수도에 보냈을까. 꿍꿍이 없는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공교롭다. 얼굴을 보고? 아니, 대공은 내 얼굴을 자세히 모른다. 어쩌면 눈앞의 이 남자가 진짜 유리인 건 정말 우연이고 대공과 모종의 관계가 있을 뿐인 걸 수도 있다.

‘…….’

거기서 의문은 전생으로 넘어갔다. 나는 아테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어디서 시우를 찾아냈고, 기억을 잃은 시우가 진짜 유리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지금은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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