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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29화 (29/93)
  • 29화

    03. 사실은 무척 간단한데

    “이, 이름이, 뭐라고……?”

    “시우입니다. 시우 로아네스.”

    다리가 풀렸다. 조금 전의 장면이 머릿속에 다시 재생되었다. 연회장에 들어오고, 황제 부부와 다소 날카로운 대화를 나누고, 그 후 문지기가 늦게 도착한 손님을 소개했다. 뜻밖에도 로아네스 대공의 대리인이었다.

    로아네스 대공은 북부의 일에 집중하고 있기에 중앙에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연회든 무도회든 거의 참여하지 않고, 사람들도 어련히 안 오겠거니 하는 분위기였다. 그랬기에 굳이 대리인까지 보냈다는 것에 놀라고 있는데, 놀랄 일은 그게 아니었다.

    대공의 대리인. 그건 바로, 내가 며칠 전 시장에서 마주쳤던 바로 그. 진짜 유리였다. 심지어 유리는 처음 듣는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시우 로아네스. 얼마 전 대공의 동생에게 양자로 거두어진 사람이라고 한다.

    유리가 나를 골려주려고 이러는 걸까? 어떻게 하면 나를 가장 비참하게 끌어내릴 수 있을지 생각한 끝에 만들어낸 계획일까? 두렵고 막막한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추측이라곤 그따위 것뿐이었다.

    “탑주님.”

    나지막하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더는 못 서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멀쩡히 서 있다. 몸을 무언가가 단단히 받치고 있었다. 아테올의 팔이었다.

    “괜찮으십니까?”

    “…….”

    아니. 괜찮을 리가. 가장 두려워하던, 가장 피하고 싶던 것이 말도 안 되는 형태로 나타났는데. 나는 흘끗 아테올을 보았다. 원래는 그가 찾아냈어야 했던 유리다. 그런데 왜, 어쩌다 로아네스 대공의 곁으로 흘러 들어간 걸까. 대공 또한 본인이 제위에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고는 하나 계승권자였다. 갑자기 황제가 되고 싶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희망적으로 생각하면, 그저 자신의 후계자가 될지도 모르는 수양 조카를 수도에 인사차 보낸 것일 수도 있고.

    “로아네스 대공의, 조카라고.”

    “그렇습니다.”

    그의 예법은 어딘가 어설픈 구석이 있었다. 진짜 유리라면 그럴 리 없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마탑에서 살아온 사람이니 예법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을 터였다. 나조차도 이 세계에 관한 지식은 전혀 없었지만, 몸에 가짜 탑주의 예법이 배어 있어서 그나마 괜찮지 않았던가.

    혹시 얼굴만 같은 다른 사람인 건 아닐까? 눈도 금색보다는 갈색에 가깝고, 마력도 느껴지지 않고, 이름이 다른데. 게다가 저 주뼛거리는 태도는 연기라기엔 너무 자연스럽다.

    하지만 세상에 이렇게까지 비슷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 세 사람이나 있고, 심지어 황궁에서 마주칠 확률? 그게 도대체 얼마나 될까. 세 개 모아서 터뜨리는 게임도 아니고. 아직 둘밖에 안 모여서 안 터지나. 가능하면 셋이 모일 일은 없으면 좋겠는데……. 뭐 이것도 다 그가 진짜 유리가 아닐 실낱같은 가능성이 맞을 때의 이야기다.

    “대공은 잘 지내?”

    “네. 탑주님의 은혜로 무탈하게 영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음, 주입식 멘트. 로아네스 대공은 제국 북부를 다스리는 황족이었다. 대공의 영지인 나크사벨은 영구 동토 프시아와 노벨라 왕국의 접경지로, 동토에서는 신에게 버림받은 마물들이, 왕국에서는 호시탐탐 제국의 영토를 노리는 왕국군이 수시로 침략하는 땅이다. 게다가 영구 동토의 저주에 영향을 받아 땅 자체도 척박했고, 어떤 신이 찾아오는 달에도 항상 추웠으며 마물 때문에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즉, 그림으로 그린 듯한 북부 대공이다. 나도 몇 번인가 밖에 만나지 못했는데, 큰 키에 냉막한 표정, 북부의 차가운 기운을 그대로 두르고 온 듯 차가운 태도와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또 이전부터 자신은 제위에 뜻이 없음을 공공연히 했고, 마탑이나 나에게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예의상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는 것 말고는 엮일 일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대공이 갑자기 황궁 연회에 자신의 대리인을 보냈다. 어쩌면 유리……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몸이 부르르 떨렸다.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는 게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내 얼굴이 창백해진 게 훤히 보였을 테니까. 또 다행히,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내 얼굴을 몰랐다.

    얼굴을 아는 건 황제와 황후, 황태자 칼레우스, 그리고 아테올 정도였다. 로아네스 대공 또한 내 얼굴은 모르니 그 사람이 유리(시우라고 자신을 칭하는)를 보낸 건 기가 막힌 우연일지도, 아니. 그럴 리 있나. 그런 우연이 존재할 리가.

    황제와 황후, 칼레우스도 유리, 아니, 시우라고 해야 할까, 그의 얼굴을 신기하다는 듯 보고 있었다. 살짝 칼레우스의 눈치를 보았다. 그 역시 묘하게만 느낄 뿐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탑주님.”

    아테올이 재차 나를 부르는 게 들렸다. 나는 어느새 그의 팔에 완전히 체중을 싣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았다.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다.

    “탑주님께서 몸이 안 좋으신 듯합니다.”

    대답하지 않는 나를 잠시 보고 있던 아테올이 목소리를 키웠다.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시우, 혹은 진짜 유리가 당황한 듯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손을 뻗으려 했다. 봐, 이런 걸 보면 역시 예법에 능하지 못하다. 아테올이 팔을 들어 그 앞을 막으며 차갑게 내뱉었다.

    “손을 치워라. 아무리 대공 전하의 대리라 해도 무례하다.”

    “아…….”

    시우는 아테올의 냉랭한 반응에 어쩔 줄 몰라 하더니,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잘…….”

    새파래지는 얼굴이 정말 몰라서 그랬던 거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그를 무시하고 아테올이 내게 물었다.

    “탑으로 모실까요?”

    “……응.”

    아테올에게 대답한 뒤 시우를 보았다.

    “넌 황궁에 한동안 머물 거지?”

    “그렇습니다.”

    아테올에게 대답한 뒤 시우에게 물었다. 시우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중에 다시…….”

    말을 맺으려 한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눈앞이 핑 돌았으나 아테올이 내 몸을 단단히 받치고 있어서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좁은 보폭으로 천천히 걸음을 내디디며 나를 부축했다. 시우에게서 완전히 돌아서려고 했을 때였다.

    [새로운 공략 캐릭터 등장! 이름: 시우]

    ‘시우’ 공략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예>

    <아니요>

    뭐, 뭐라고?!

    ***

    “……흐음.”

    내 이야기를 들은 아테올의 반응이었다.

    생각보다 시큰둥했다. 회귀 이야기까지 했으면 좀 더 관심을 가졌을까? 갈등하다가, 반응이 아무래도 좋은 쪽은 아닐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이 정도 이야기했으면 충분하다.

    아테올에게 기대 연회장에서 나온 나는 그대로 그를 탑에 데리고 와서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자세하게는 아니고 일부만. 전에도 말했다시피, 나는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진짜 유리가 아니며 왜 그렇게 된 건지는 나도 모른다고. 아테올은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들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제안했다. 네가 날 도와주겠다고 했으니 진짜 유리를 찾아내서 탑에 데려오고, 나는 몰래 도망치게 해달라고 말이다. 여기서부터 아테올의 몇 가지 의문에 답을 해야 했다. ‘진짜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나타나면 끝이잖아. ‘그럼 절박함이고 뭐고, 가장 확실한 패인 황태자 편에 서서 사실을 털어놓는 게 낫지 않습니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 이미 황태자 자리에 있으면서 탑주(가짜)의 약점을 알아챈 순간 원하는 대로 주무르고 싶어 하는 사람이랑, 제위가 절박해서 그 약점을 자신을 위해 활용하려는 사람 중에 누구를 고를래? ‘흠, 그건 그렇고 당신은 진짜 탑주가 돌아올 걸 미리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좀 위험했다. 사실 내가 미래에 다녀와서 아는데, 6년 후에는 확실히 나타나. 왜냐면 네가 데리고 오거든. 데리고 와서 날 죽여. 그래서 너한테 붙은 건데, 아니 대체 왜 지금 나타난 거지? 상상도 못 한 일인지라 내가 지금 엄청나게 당황했어, 이렇게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내 대답은 ‘이미 나타났다’라는 짧은 한마디였다. 내가 가짜인 이상 어차피 진짜는 어디서든 나타나게 되어 있었다. 너의 능력을 높이 사서 네가 진짜 유리를 비밀리에 찾아내 줄 거라고 믿었는데, 채 말도 하기 전에 나타나고 말았다. 심지어 계승권자인 대공의 사람으로.

    또 계승권자 이야기를 꺼낸 김에 반란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열변을 토했다. 내가 갑자기 너를 선택함으로 인하여 각자 다른 황자 또는 계승권자를 밀던 사람들의 반발이 치솟았을 거고, 그건 반란으로 이어질 수 있고, 반란을 위해 유리를 찾아낼지도 모른다고. 즉, 지금 유리(매우 사실에 가까운 추측)가 나타난 게 어떤 움직임일 수도 있다고 말이다.

    여기에 또 아테올은 의문을 표했다. ‘반발이 생길 걸 알면서 저를 선택한 이유는?’ 정말이지 더럽게 의심도 많은 놈이었다. 하지만 그를 공략……이 아니라 선택한 이유는 확실히 있다. 그건 바로 내가 회귀했기 때문이고, 회귀했더니 상태창이 생겼는데 그 상태창이 그를 공략하라고 했기 때문이고, 상태창이 공략하라고 한 대상이 전생에 진짜 유리를 데려와서 날 죽인 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중 어느 말도 섣불리 꺼낼 수는 없었다. 아테올은 이성적인 편이다. 그 앞에서 미친놈이 되고 싶진 않았다. 세상에 누가 사람이 죽었다 회귀했다는 걸 믿겠는가? 아테올도 회귀를 했다면 모를까. 당연히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으나, 시험해 보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긴 했다. ‘혹시 사후 세계 믿어?’ 아테올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눈이 동그래졌다가 코웃음 쳤다. ‘지금까지 죽은 인간을 전부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정말 신비롭겠군요.’ 명백하게 비웃는 투였다. 사후 세계도 안 믿는데 죽었다가 과거로 돌아오는 건? 그의 귀에 개가 소를 업고 간다는 말처럼 들릴 거다.

    결국 ‘그게 제일 좋은 선택인 것 같았어.’라는 말로 얼버무렸고, 그에 대한 아테올의 반응이 ‘……흐음.’이었다.

    “그러니까……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진짜가 나타나 버렸다는 말씀이시군요. 그것도 로아네스 대공의 조카로요.”

    “그래. 어쩌면 대공이 황제가 되고 싶은 건지도 모르지.”

    “글쎄요.”

    아테올이 턱에 손을 얹더니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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