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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26화 (26/93)

26화

03. 사실은 무척 간단한데

“답신? 벌써?”

연회에 같이 가지 않겠느냐는 편지의 답신은 곧바로 왔다. 메신저로 치자면 ‘읽음’ 표시가 사라지자마자 답장이 온 수준이었다. 클로든이 내민 편지를 읽자 이번에도 내용은 간략했다. ‘어제 장소가 별로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좀 더 좋은 곳 갈까?’ 으흠.

호감도가 그대로인 걸 봤을 때도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기분 역시 상한 티가 안 나서 더욱 다행이었다.

그가 내게 권한 외출 장소는 황궁에서 가까이 있는 큰 시장이었다. 벨과 외출할 때와 비슷하게 평복 차림으로 조용히 나가자는 것이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벨과 함께 외출할 때와는 달리 마차를 타고 황궁 정문을 통해 나갔다. 적당한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를 사람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황궁 앞 대로를 달려 시장으로 향했다.

마차에서 내리자 커다란 시장의 활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빨갛고 노란 과일을 한 무더기씩 쌓아두고 파는 상점, 코를 자극하는 빵과 기름 냄새, 반짝거리는 값싼 액세서리와 옷, 채소, 고기, 주렁주렁 걸린 소시지, 옷감. 사진으로 수없이 본 유럽의 시장과 비슷하다.

“유리 님, 이쪽으로.”

아테올이 나를 골목 쪽으로 이끌었다. 시장의 큰길만 돌아다녀 본 나는 어딜 가나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푸줏간과 절인 생선 가게 사이로 들어서자 생각보다 넓은 골목이 나왔다. 시장 뒤쪽인 듯했다.

울퉁불퉁한 돌바닥을 걸으며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벨과 함께 외출할 때와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었다. 색색의 벽과 계단 사이로 꽃집과 카페, 빵집, 공예품을 파는 작은 가게 같은 게 늘어서 있었다. 아테올은 고즈넉하고 예쁜 골목을 많이 알았다.

“이런 곳에는 잘 나오지 않으십니까?”

“응……. 이런 골목은 처음 와.”

벨은 비교적 사람이 많은 곳을 중심으로 나를 데리고 다녔기 때문에 이런 곳은 와도 잠깐 지나치기만 했을 뿐이다. 가게마다 다 들어가 보고, 음료도 마시고 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런 게 꽤 즐거웠다. 중간까지는.

“…….”

갓 구워 나온 달걀 타르트를 보며 식욕을 느끼고 아테올을 돌아보려 했을 때. 나는 그대로 굳었다. 저 멀리서 후드를 쓴 한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격, 중간 키. 여름 날씨인데도 긴 로브를 입은 그 사람이 빠르게 지나가며 이쪽을 흘끗 돌아보았다. 날 본 건 아니고 주위를 두리번거린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후드가 살짝 젖혀지며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숨이 한순간 멈추었다. 쿵, 날카롭고 요란한 충격이 심장을 차갑게 때리고 지나간다. 발끝에 힘이 풀려 넘어질 것 같았다. 그는, 그 익숙한 얼굴은……. 그 얼굴을 어떻게 잊겠는가. 나와 무서울 정도로 닮은 그를.

아테올이 나를 죽이러 올 때 뒤에 서 있던 그의 얼굴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내가 잘못 본 건 아닐까? 아니.

그 사람은 내가 멍하니 있는 사이 인파 틈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분명했다. 그는 진짜 유리였다. 아테올과 함께 탑으로 돌아온 탑의 진정한 주인.

“……아테올!”

빵집을 보고 있던 아테올이 내 목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를 무작정 끌고 인적이 아예 없는 더 안쪽 뒷골목으로 향했다. 내 힘에 끌려올 리 없는데도 그는 저항하지 않고 끌려와 주었다.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나는 무작정 그의 멱살을 잡아당기고 발돋움해서 키스했다. 호감도를 올려야 했다. 빨리 호감도를 더 올려서 사실 나는 진짜 유리가 아니라 밝히고, 나를 도와달라고 말해야만 했다. 안 그러면 죽으니까. 지난밤 꿈에서 본 여러 차례의 죽음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서툴게 입을 문질러대는 나를 아테올이 휙 떼어냈다. 나는 절박해져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느새 후드가 벗겨진 채였다. 아테올의 표정이 묘해지더니 메시지가 떠올랐다.

[호감도: 아테올]

95%

아테올은 ‘왜?’라고 생각합니다.

왜고 뭐고 빨리 날 좋아해 달란 말이야. 뭔데 이렇게 안 올라? 왜라고 생각할 때가 아니라니까. 호감이나 더 키우라고, 이 종이 캐릭터야! 이상한 짜증을 속으로 부리면서 또 생각했다. 키스밖에 안 해서 그런가? 신체 접촉을 하라고 했는데, 다 큰 어른 둘이서 입술만 비비는 건 이상하긴 하지.

그럼 다른 걸 더 하면 되는 건가? 나는 대뜸 아테올의 손을 잡아 내 뺨에 댔다.

“키스 말고 다른 것도 하면 안 돼?”

“……설마 여기서 하자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여기가 왜?”

아무도 안 오게 생겼는데. 아무튼 나는 급했다. 유리, 유리가 있었잖아. 이렇게 가까운 곳에. 아테올을 빨리 내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아. 아테올도 아테올이지만 유리를 차라리 당장 잡았어야 했을까……. 그럼 어떻게든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왜 아직 내 마법은 그대로 있을까. 유리가 나타난 것만으론 아직 힘이 넘어가지 않는 건가? 유리는, 언제부터 여기 있었을까. 유리는, 유리는. 유리는.

“유리 님.”

“…….”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테올은 내 뺨에 아직 손을 얹은 채 속삭이듯이 말했다.

“함부로 이름을 불러서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안 들리시는 것 같기에. 제 얼굴은 알아보시겠습니까?”

“아테올.”

“다행이군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눈앞에 있는 게 아테올이라는 것 정도는. 그러니까 지금 이러고 있는 것 아닌가. 그의 호감을 사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면서. 아테올이 내 턱을 살짝 쥐더니 짧게 키스했다. 그런 그에게 달려들듯 버둥거렸으나 그는 나를 가볍게 안아서 떼어냈다.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자 아테올은 나를 달랬다.

“어쨌든 여기서는 곤란할 것 같습니다. 어딘가에 들어가기도 뭣하고……. 제 궁으로 가서 이야기하는 건 어떠십니까?”

“조, 좋아.”

궁으로 가서 하자는 건 물론 이야기가 아니라 이 짓의 다음 단계이다. 마차로 걸어가는 동안 계속 손을 잡고 있었다. 시장 입구까지 가는 길이 멀게 느껴졌다.

겨우 마차에 올라타서 아테올이 내 맞은편에 앉으려는 걸, 재빨리 그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황궁에 들어갈 때까지 아테올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머릿속은 온통 유리와 호감도 생각으로 가득했다. 아테올은 의중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이따금 제 옷을 잡은 내 손을 쳐다보았다.

궁에 도착해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머리카락은 로브 속으로 전부 집어넣은 뒤 아테올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평복 차림이었기에 4황자 궁의 시종들은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냥 아테올이 로브 뒤집어쓴 사람을 데리고 왔구나, 할 뿐.

손끝이 차가웠다. 나는 아직도 겁에 질린 채였다. 유리, 유리, 그 이름만 머릿속을 떠돌았다. 또 죽는 건 정말 사절이었다. 유리가 수도에 있는 이상 찾기는 쉽겠지. 그러면 6년이 지나기 전에 빨리 이 황궁에서 도망쳐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아테올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러려면 그가 나를 좋아해야 한다. 호감도는 95%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얼마나 더 올라야 그가 내 말을 무엇이든 다 들어줄까?

마침내 침실이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아테올을 끌고 가 침대로 떠민 뒤 그 위에 올라탔다. 로브를 휙 벗어 던지고 허리끈도 풀려 하는 나를 아테올이 붙잡았다.

“탑주님.”

“왜? ……왜 막아?”

“그야.”

왜 막지? 별로 혼전 순결 주의자로 보이지도 않는데. 이 호감도 혹시 사기인 건 아닐까? ‘사실 아테올이 날 별로 안 좋아하는 건 아닐까?’에 생각이 미치자 막막하기까지 했다. 나는 아테올의 양쪽 뺨을 감싸며 매달리다시피 말했다.

“날 더 좋아해 달라니까…….”

“…….”

[호감도: 아테올]

98%

아테올은…….

아테올은, 뭐! 진짜 이 망할 시스템. 이따위로 알려줄 거면 저 부연 설명 그냥 치우라고. 짜증이 치밀어서 침대 밖으로 뛰쳐나가려 한 순간 팔을 붙들렸고, 그대로 시야가 휙 뒤집혔다. 순식간에 나는 아테올의 아래에 깔려 있었다.

그는 나를 침대에 눕힌 채 그대로 키스했다. 이번 키스는 아까처럼 여유롭거나 부드럽지 않았다. 중간에 숨이 막혀서 버둥거렸으나, 아테올은 틈을 주지 않고 계속 나를 몰아세웠다. 혀끝이 입 안으로 밀려들듯 들어와 목구멍까지 닿았다.

캑캑 기침이 나오면서 입술 옆으로 타액이 주르륵 흘렀다. 그러면 아테올은 잠시 물러났다가 다시 나를 잡아먹을 듯 키스했다. 입 안이 온통 뻐근하니 얼얼하고 산소 부족으로 머리도 띵했다.

간신히 입술이 떨어졌을 때 나는 심하게 헐떡거리고 있었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는 내게 아테올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렇게 보채지 마세요. 좋아합니다. 적어도 당신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싶을 정도로는 좋은 것 같습니다.”

내가 바라던, 절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고백은 아니었다. 나를 달래려고 하는 말에 가까웠다. 호감도 98% 치고는 하잘것없다. 역시 그 호감도 시스템은 이상한 거 아닐까. 하긴, 아무리 책 속 인물을 상태창에 따라 공략하는 거라고 해도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세기의 사랑이 되는 건 이상하지.

“그래서 말인데…… 당신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는 좀 알고 싶은데요.”

“뭘? 좋아하면 당연한 거 아냐?”

“당신의 행동을 돌아보시죠, 당연한가.”

……별로 당연하진 않았다. 유리를 마주치는 바람에 패닉이 와서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으니까. 스스로 자각이 있을 만큼 정신 나간 행동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제정신은 아니다. 기왕 미친 거 좀 더 미쳐볼까.

“기억을 잃었다는 건 거짓말이야.”

“그렇습니까?”

아테올이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흥미롭다는 투였다.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애초에 없었어. 나는 너희가 말하는 탑의 주인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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