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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22화 (22/93)

22화

02. 실존하는 세계의 파편

뒷덜미의 핏기가 싸악 가시는 것 같았다. 몰랐나? 몰랐겠지. 몰랐을 거야. 그냥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서 침실로 부른 거라고 생각했겠지. 아니, 하지만…… 과년한 어른 둘이, 티 룸도 정원도 아니고 하필 은밀하게 밀폐된 침실에서 십여 분 동안 단둘이 있었는데, 한쪽이 사라진 뒤 보니 남은 한쪽의 입술이 부어 있더라?

“으윽.”

내가 생각해도 뭘 했는지 동네방네 티 내는 꼴이었다. 이 세계는 결혼이나 연애에 남녀의 구분이 없었다. 다신교인 세계에서 신들은 무성이자 양성이고, 그 신들의 연애와 갈등으로 인해 세계의 이런저런 것들이 만들어졌다. 거기서 뿌리를 타고 내려온 인간에게도 성애에 있어 성별을 구분하는 건 무의미하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럼 자식은 어떻게 만드는가 하면, 이 세계에는 마법이 있다.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는 마법 같은 존재’에서 ‘마법’을 담당하는. 이런저런 수단을 사용하면 아기는 생겼다. 마치 황새가 물어다 주는 것처럼. 양배추 밭에서 뽑아 오는 것처럼. 다리 밑에서 주워 오는 것처럼.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인공 자궁이다. 부부인 두 사람의 정수(유전자적 의미에서)를 이렇게 해서 저렇게 하면 신비의 나무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아기를 얻을 수 있었다.

아무튼 그렇기에 방에 틀어박힌 나와 아테올이 둘 다 남자라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다 큰 성인 둘이 밀실에 있었다는 게 중요하지. 클로든은 내 입술에 전혀 신경을 안 썼던 것 같지만, 원래 그는 못 본 척하는 게 특기인지라 과연 어땠을지 모르겠다.

휴, 진짜 모르겠다……. 그냥 못 본 거라고 생각하자.

그런 내 생각은 클로든이 내온 차가운 민트 푸딩을 보고 와장창 깨졌다. 봤구나, 이 자식. 젤리 같은 식감의 벌꿀이 듬뿍 들어간 푸딩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것이었지만 목구멍으로 들어가는지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사늘한 푸딩이 부은 입술을 부드럽게 식혀주었기에.

“……클로든.”

“예, 탑주님.”

“내일도 아테올이 올 거야.”

클로든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네, 하며 고개를 숙였다.

“식사나 다과를 준비할까요?”

“아니. 마실 거면 돼. 침실로 부를 거야.”

“알겠습니다.”

나는 침착한 클로든의 눈빛 속에서 민트 푸딩이 코로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

다음 날. 나는 아테올보다 먼저 다른 사람을 만나야 했다. 황제와 황후가 내게 꼭 보여줄 것이 있다며 티타임에 초대한 것이다. 어디서 비밀리에 선전포고라도 한 건가 싶을 만큼 발을 동동 구르고 있기에 거절할 수 없어서 급히 갔는데, 나를 맞이한 건 큰 수정 구슬 속에 담긴 오색구름이었다. 진짜 구름은 아니고, 구름의 생성 방식과 똑같은 원리로 마법을 사용해서 만든 것이다.

“……아름답네요.”

“그렇죠? 별빛까지 담아 만든 구름은 흔치 않다고 해서, 꼭 탑주님께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내일이면 사라질 거라고 하기에.”

“네. 호의에 감사합니다.”

설마 이들이 내가 이런 걸 삼천 개는 만들 수 있다는 걸 모를 리는 없을 테고. 어제 아테올이 탑에 다녀간 것 때문이겠지. 최소한 어디서 공룡 화석이라도 구해다 놓고 부르면 안 되나? 정성이 부족하다. 정성이. 잠자코 차를 마시며 본론이 나오길 기다린 끝에, 겨우 황후가 입을 열었다.

“어제 4황자가 탑에 방문했다고 들었습니다. 혹여 탑주님께 무례를 범하진 않았는지요?”

그렇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겠지.

“전혀요.”

고개를 젓자 황후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얼굴로 이어 말했다.

“혹여나 황자 때문에 탑주님께 괜한 누를 끼치진 않을까 우려됩니다. 탑주님께서도 아시다시피, 4황자는…….”

“아주 좋은 재목이죠.”

황후의 말을 끊은 순간 게이지가 팍 깎였다.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침착하자. 재화, 재화를 많이 사용하는 것뿐이다. 여기서 확실히 해두는 편이 앞으로 아테올과의 관계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저는 4황자에게 마음이 갑니다. 그는 제국의 미래에 도움이 될 거예요.”

“탑주시여……. 제 아들인지라 이런 말씀 드리는 것이 부끄러우나, 아테올은 제왕의 덕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작은 영지 하나 다스리지 못할 녀석에게 황좌라니요.”

“폐하께서는 황자를 꽤나 낮게 평가하시는군요. 저와 관점이 많이 다르신 것 같습니다.”

순간 말투가 공격적으로 나가고, 게이지가 또 깎였다. 아니. 내가 왜 이렇게 발끈했지? 아테올에 대해서 나쁜 말 좀 했다고 그런 건가? 내가 왜. 스스로도 혼란스러웠지만 터진 입은 멈추지 않았다.

“황궁 안에서 4황자의 취급이 안 좋기는 하지요. 그래서 날개를 펼치지 못한 부분이 분명 있습니다. 저는 이미 마음을 정했으니 제 마음을 돌리려고 하지 마세요.”

대놓고 ‘댁들이 애를 그렇게 키워서 애가 지금 그 모양인 거다’라고 말하자 황제와 황후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하지만, 탑주님. 칼레우스의 자질은 어떠한가요? 칼레우스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황제가 되는 것 말고는 상상할 수 없다고 모두가 말하던 아이입니다.”

황후가 말했다. 칼레우스, 황태자. 아테올과 열두 살 터울의 이복형. 책에서도 그를 완벽한 황제의 재목이라고 서술했다. 하지만 6년 동안 이래저래 살펴본 결과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은근히 나한테 치근덕거리기도 했고,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제 앞으로 아테올과 정쟁을 하게 될 테니 더더욱 마음 밖으로 빼 두어야 할 인간이다.

그리고 사실상 가장 큰 적이었다. 만약 아테올이 아닌 누군가가 진짜 유리를 찾아온다면, 그건 칼레우스가 될 가능성이 컸다. 내가 보기에 찜찜했을 뿐 그는 내내 차기 황제로 대우받으며 살아올 만큼의 능력은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황태자도 물론 괜찮지요. 하지만 4황자는 그 이상입니다.”

챙그랑……. 챙그랑……. 게이지 깎이는 소리가 내 마음 부서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으윽, 신경 쓰지 말자. 나 지금 돈 많이 드는 콘텐츠 하는 중인 거야. 나중에 다시 벌면 된다고! 그러나 흘끔 본 게이지가 거의 절반 가까이 깎여 있었기에 신경을 안 쓸 수 없었다.

티 나지 않게 계속 상태창을 흘끔거리는데 티 룸의 휘장 너머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탑주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아니, 애초에 처음부터 저기에서 듣고 있었나?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들며 휘장 밖의 목소리가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칼레우스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아니, 돌아가.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들어와.”

내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휘장을 걷고 들어온 칼레우스가 저벅저벅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금발, 붉은 눈. 올해로 서른여덟의 그는 형제 중에서 아테올과 가장 닮았다. 딱 열두 살 더 먹은 아테올로 보였다.

“가장 높은 탑의 주인을 뵙습니다.”

“일어나.”

칼레우스는 다시 예를 표하고는 자리의 말석에 가서 앉았다. 시종이 차와 찻잔을 내올 때까지 짧은 정적이 이어졌다. 침묵을 깬 것은 칼레우스였다.

“부족한 점이 있다면 뭐든 고치겠습니다. 탑주님께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대뜸? 칼레우스는 공손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었고 말하는 내용도 언뜻 저자세였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나는 마음에 안 드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칼레우스를 보았다.

“부족하지 않은 사람은 없지. 부족함을 다 메울 수 있는 사람도 없고.”

부족한 점을 고치겠다고 말하는 건 자신이 고칠 수 있다고 확신해서 할 수 있는 말 아니겠는가. 내가 부족하게 보는 게 어떤 점인 줄 알고 함부로 확신하는지. 그게 자신이 고치지 못할 점임은 염두에도 두지 않는다. 저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태자는 내가 한순간의 변덕으로 4황자를 선택한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당치 않습니다. 제가 감히.”

이제 챙그랑 소리가 원래 배경음 같다. 배경음 같은 건 없긴 했지만. 게이지가 너무 많이 깎이니까 기분 탓인지 어지럽기까지 하다. 정곡을 찔린 칼레우스가 당황해서 나를 바라보았다.

“말했다시피…… 이미 나는 아테올을 지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뜻이 바뀌는 일은 없을 겁니다. 먼저 물러나죠.”

자리에서 휙 일어나며 확인하니 게이지는 절반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30%는 될까? 일어나서 몇 걸음 걸은 순간 어지럼증이 기분 탓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정말로 세상이 핑핑 돌고 있었다. 비틀거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티 룸을 빠져나와 빠르게 마차에 올라탔다. 회랑 밖으로는 장대비가 쏟아졌다. 빗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웅웅 울리는 듯했다.

문을 열어준 클로든이 놀라서 물었다.

“탑주님? 왜 그러십니까.”

“아니, 좀 어지러워서.”

“탑에 돌아가면 바로 에레토를 부르겠습니다.”

내가 그 말에 대답을 했나, 안 했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현기증은 더욱 심해지며 속까지 메스꺼웠고,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목덜미에 소름이 쭉 끼친다.

아, 미친. 게이지 다 깎이면 죽는댔지. 이런 식으로 죽는 거였냐. 마차의 흔들림과 마차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피부에 따갑게 스며드는 것 같았다. 눈 안쪽과 목뒤가 뻐근하고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이대로 죽는 건가 싶을 무렵, 탑에 도착했다. 비의 기세는 여전했다. 휘청거리며 마차에서 내리는데 코가 시큰해지더니 코피가 왈칵 쏟아졌다.

“탑주님!”

응? 목소리가 뭔가 겹쳐서 들린 것 같은데. 몸이 기우뚱했다. 이대로 넘어지나 했지만, 뭔가가 나를 받쳤다. 클로든인가. 코피를 줄줄 흘리며 눈을 깜빡였다. 흐리멍덩한 시야에 금빛의 무언가가 잡혔다가 이내 암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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