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02. 실존하는 세계의 파편
맞물린 입술이 깊어지더니 혀끝이 내 입술 안쪽을 핥았다. 너무 놀라 움찔거리자 아테올은 또 내가 빠져나가려 한다고 생각했는지 감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동시에 혀가 입 안으로 깊이 밀려 들어왔다. 까끌까끌하면서 말캉한 혀가 얽히더니, 입천장을 간질간질하게 핥고, 치열을 더듬어댔다.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으, 응…….”
나도 모르게 작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아테올은 잠시 멈칫했다가 두 손으로 내 머리를 감싸 쥐고는 더욱 격렬하게 키스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끌려간 몸은 거의 떠오르다시피 해서 발끝으로 바닥을 간신히 디뎌야 했다. 아테올은 고개의 각도를 바꾸어가며 내 입술을 물어뜯을 듯 달라붙고, 혀를 끌어내서는 질척하게 빨았다. 감각이 무뎌지려 할 때면 그는 귀신같이 알아차리고는 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음…….”
나는 내가 느끼기에도 서툴게 그의 입술과 혀를 받아들였다. 점막끼리 맞닿아 문질러지는 감각은 대단히 이상했다. 목에서 자꾸만 앓는 소리가 나왔다. 발이 자꾸만 미끄러질 것 같아 아무거나 붙잡는다는 게 아테올의 허리춤을 잡는 바람에 완전히 그에게 매달린 꼴이 되었다.
민망한 소리를 내며 혀가 계속 입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숨 쉬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겨우겨우, 죽지 않을 만큼만 간신히 숨을 마실 수 있었다. 아테올은 그런 나를 알면서도 놓아주지 않았다.
입술은 한참 후에야 떨어졌다. 나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내 입술을 더듬었다. 부어올라서 느낌이 이상했다.
“…….”
아직도 내 머리를 끌어안은 상태로,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아테올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인 그의 눈동자에 햇살이 비쳐들자, 신기하게도 그 새빨간 눈이 따뜻한 색으로 보였다. 멍하니 눈을 마주 보았다. 이 순간만큼은 아테올이 무섭지 않았다. 독을 내밀던 그 사람과는 다른 사람으로 느껴졌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아테올이 젖고 부은 입술을 느릿하게 열었다.
“……죄송합니다.”
“…….”
키스(혹은 키스만큼 민망한 뭔가)를 하고 나서 미안하다니 이게 어느 나라의 개매너인가.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갔다.
“키스하고 죄송합니다는 좀 아니지 않아?”
“…….”
아테올이 깨달았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그도 그렇군요. ……키스가 죄송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단지 너무 거칠게 한 것 같아서.”
말과 함께 그는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닦아주었다. 혀뿌리가 얼얼하고 입술도 아린 걸 보면 평범한 키스보다 거칠었던 건 맞는 듯했다. 평범한 키스가 어떤 거더라. 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있다. 분명히 있다. 그런데 어떤 게 거칠고 어떤 게 평범한지 물으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꼭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문제처럼. 와중에 상태창을 힐끔 확인했다.
[호감도: 아테올]
72%
앗, 뭐야, 장난하냐! 키스까지 했는데 왜 이것밖에 안 올랐어! 역시 그날 왕창 올랐던 건 최초 버프 같은 거였나? 괜히 분해서 인상을 찡그리자 아테올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말했다.
“화가 많이 나셨습니까? 표정이 좋지 않으신데요. 정말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치솟으려던 짜증이 스르르 가라앉았다. 아테올의 고분고분한 태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눈을 마주 보고 있는 동안 그의 호감도가 실시간으로 쑥쑥 올라갔기 때문이다. 1%씩 착실히 올라가던 호감도는 무려 80%에서 멈췄다.
[호감도: 아테올]
80%
아테올은 당신을 ‘■■하군…….’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장난하냐, 앞 단어 한 글자는 보여줘야 하는 거 아냐? ‘■■하군…….’이라고만 하면 어떻게 알아. 상태창은 세상에 존재하는 ‘■■하다’가 몇 개나 되는지 알까? 나는 모른다. 모를 정도로 많다는 뜻이다.
하지만 검은 네모 칸의 뜻을 모르더라도 호감도가 눈에 띄도록 많이 올랐다. 이렇게 호감도가 빨리 쑥쑥 오르니까 외려 마음이 급해졌다. 뭐라도 더 해야 할 것 같았다. 근데 지금 당장은 아니고. 나는 계속 아테올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내일도 올래?”
“오늘은 여기까지라는 뜻이군요.”
뭘 더 하려고 했나 보네. 키스만으로 내 새가슴은 이미 지나치게 벌렁거리고 있었다. 대충 얼버무리며 그의 품에서 쏙 빠져나왔다. 다행히 이번엔 그도 순순히 놓아주었다. 세 걸음 정도 떨어지자 아테올이 사륵 눈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당신의 이런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뭐, 뭘? 어떻게라니?”
“제게 갑자기 마음이 생기신 건지, 아니면…… 몸으로 회유하려고 하시는 건지.”
“…….”
정곡을 찔린 나머지 눈을 피하고 말았다. 몸으로 회유. 시스템이 시켜서이긴 했지만 크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런 거라면 당신은 굳이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아테올이 한 걸음 다가왔다.
“기억이 없어서 모르시는 거겠지만, 이런 수단을 쓰지 않더라도 당신은 저를 얼마든지 무릎 꿇리실 수 있습니다.”
“……그런, 건 아니야.”
“아닙니까?”
뭐, 정확히 말하면 아니진 않다. 그러나 ‘크게 틀린 말’이 아닌 거지, 아주 회유하겠다는 목적으로만 달려들고 있는 것도 아니다. 더 큰 목적은 접촉에서 오는 호감도 상승이지 않은가. 나는 이 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머뭇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럼 뭐지요?”
“난, 나는…… 네가 날 좋아하면 좋겠어.”
“…….”
아테올의 눈이 커졌다.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얼굴이었다.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면 내가 안전할 테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테올의 표정이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갔다. 아니, 평소보다 좀 더 굳었나?
“그거 정말 굉장한 말씀이시군요.”
말과 동시에 아테올이 성큼 나에게 다가왔다. 얼굴이 확 가까워지면서 향수 냄새가 끼쳤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내게 속삭였다.
“만약 제가 당신을 좋아했다면, 그 말은 엄청난 상처가 됐을 겁니다.”
순간 우리 사이의 공기가 딱 굳는 것 같았다. 잠시 당황했지만 금방 정신이 들었다.
“……아니잖아? 아닌 거 알고 한 말이야.”
“그렇긴 합니다만.”
근데 뭘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고 난리람.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저런 소리야. 한순간 부풀어 올랐던 긴장감이 훅 꺼졌다. 어느새 아테올도 슬쩍 미소를 띠고 있었다. 웃는 입술이 나와 마찬가지로 부어 있는 게 보이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빨개진 얼굴을 고개를 돌려 감추며 그에게 휘휘 손을 내저었다.
“됐으니까 오늘은 이만 가 봐.”
“분부대로, 물러가겠습니다.”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한 아테올이 고개를 들며 덧붙였다.
“내일도 초대해 주시는 것으로 알고요.”
“말 안 해도 그럴 거야.”
“그럼 내일도 키스하실 겁니까?”
“…….”
“싫다고 말씀하신다면 안 할 생각인데요.”
싫다고는 안 했다. 호감도 올리기가 지금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데. 거의 게임 일일 퀘스트와 같다.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지 모를 일정에서 겨우 첫날을 클리어했을 뿐이다. 사실 클리어한 건지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게다가 뭐……. 그, 키스가, 썩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가.”
심경을 감추기 위해 아예 돌아서서 말했다. 등 뒤에서 다시 고개를 숙이는 기척이 나더니 뚜벅뚜벅, 발소리가 멀어졌다. 나는 창가로 다가갔다. 침실 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탑 입구에 아테올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뒤였다.
그는 미궁 바깥에서 기다리던 그의 수행 기사와 함께 멀어졌다. 탑을 올려다보거나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 클로든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내가…….”
챙그랑.
‘내가 왜 아테올을 침실까지 불렀는지 궁금하지 않아?’라고 물으려는데 게이지가 깎였다. 심지어 꽤 많이. 억울하다. ‘내가’ 한마디밖에 안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파르르 떨며 상태창을 노려보다가 결국 얼버무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혼자 있고……, 있어도 될까?”
“탑주님.”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하려다가 또 게이지가 깎일까 봐 말투를 바꿨다. 그러자 뜻밖에도 클로든의 얼굴이 엄청나게 심각해졌다.
“왜?”
“혹시 요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일?”
“예.”
올 게 왔군. 전생에도 클로든은 같은 질문을 했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제부터는 클로든이나 다른 사람들한테 말할 때 말투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테니까.
“혹시 또 실험 중에 문제가 생기셨던 거라면…….”
클로든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때 내가 뭐라고 했더라. 아마 대충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시, 실험. 문제가 있었지. 그러니까……. 좀 소심해졌어. 응.”
“소심……이요?”
“그렇다니까.”
그는 내 말을 곰곰이 곱씹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소심해지는 마법 부작용이라니 어처구니없지만, 마법의 효과 자체부터 황당무계한데 부작용 또한 당연히 그렇지 않겠는가. 지극히 현대인다운 생각을 하며 나도 따라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말투가 이상해지고, 무슨 행동을 할 때마다 주뼛거리고, 불안과 초조함에 시달리며 잠을 못 이루고, 다 극도로 소심하면 나타나는 모습이다.
“슬슬 괜찮아지는 것 같아.”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클로든의 웃음 옆으로 게이지가 조금 차올랐다. 크으, 드디어 말 한마디 할 때마다 게이지가 깎일까 봐 조마조마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원래 이때쯤부터 정신 다잡고 마음을 바꿨거든. 마탑 사람들이 날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 아닐까 해서.
책 속에서 유리가 쓰던 말투는 다행히 평소 내 말투와 비슷했다. 아주 거만하거나 고풍스럽지 않은 게 정말 천우신조였다.
“간식을 준비할까요?”
“응.”
내가 간식을 먹겠다고 하자 클로든은 왠지 안심하면서 금방 준비해 오겠다고 말한 뒤 방을 나섰다. 다시 창밖을 보니 아테올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무심코 입술을 만지다가 퍼뜩 깨달았다.
‘입술 부은 거 티 났을 텐데?!’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