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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20화 (20/93)

20화

02. 실존하는 세계의 파편

마탑의 응접실.

평범한 사람은 평생 들어올 일이 없을 장소다. 이번 대 황제와 황후조차 이곳에는 들어온 적이 없다. 따라서 응접실 안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중 가장 긴장하고 있는 게 누구인가 하면, 아마 나일 것이다.

오히려 초대된 아테올은 여유로워 보였다. 이 자리의 주인이자 한없이 여유로워야 할 나로 말하자면 손이 떨릴까 봐 로브 자락을 움켜쥔 채 꼼짝도 못 하고 있었고.

‘아테올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진짜 유리를 찾아올 가능성’을 생각한 순간부터, 아테올만 어떻게 구워삶으면 될 거라는 내 안이한 계획은 무너지고, 온갖 무서운 상상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미 머릿속에서 나는 앙심을 잔뜩 품은 어떤 무리에 의해 ‘이놈은 가짜다!’라는 말과 함께 광장에 거꾸로 매달려 책형으로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는 결말에까지 이르렀다.

만약에 거기서 또 회귀를 하게 된다면 죽고 또 죽고, 또다시 죽을지도 모르는 위협 속에서 벌벌 떨며 살다가 삐끗하면 또또 죽은 다음에 또또또 죽고……의 반복인 거다. 살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 과제는 단순히 아테올에게 살려달라고 비는 것으로 끝나지 않게 되었다. 아테올이 진짜 유리를 찾게 해야 한다. 그런 다음, 나를 조용히 빼돌려주는 것까지 해줘야만 했다. 진짜 유리 쪽을 처리해 준다면 여기서 계속 꿀 빨면서 사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불가능하니까.

진짜 유리를 찾은 다음 나를 무사히 빼내는 것까지 하게 하려면 아테올이 나에게 상당한 호감을 품고 있어야 했다. 상태창이 시키는 일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그동안 욕해서 미안해, 상태창아.

바로 그 아테올이 눈앞에 있다. 내가 긴장하는 건 당연했다.

어떻게 호감도를 확 올리느냐.

애견 축제에서 했던 것처럼 하면 된다. 접촉. 그것도 밀접한 접촉. 내가 위로 쓰러진 것만으로 호감도가 급상승하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그보다 더 밀접하고 끈적하게 달라붙으면,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냥 대화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올라가지 않을까?

“부족한 몸이 이런 자리에 오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탑주님께 어찌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뭘, 영광까지.”

앗, 떨떠름하게 들린 건 아니겠지. 흘끗 아테올을 보자 그는 정말 감격이라도 했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호위 기사 하나 없이 길고 귀찮은 검문과 심사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왔어야 했을 텐데도.

방문자가 탑에 들어오는 과정은 공항 출입국 심사의 백배쯤 까다로웠다. 심정상으론 청와대 지하 벙커에 들어가는 게 더 쉬울지도 몰랐다. 물리적으로는 확실히 그보다 어렵다. 일단 탑에는 미궁이라는, 탑주인 나를 제외하면 아무도 넘어올 수 없는 방어벽이 있으니까.

그 미궁의 일시적인 통행권을 얻고, 소지품 검사부터 시작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독이나 조금이라도 위험한 물건은 없는지 확인하고, 심지어 옷과 신발도 탑에서 제공한 것으로만 착용해야 한다.

더 옛날에는 위험을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옷도 무슨 거적때기 같은 걸 줬다고 하던데, 그나마 지금은 구색은 갖추었다. 다행이었다. 아테올의 얼굴에 거지 옷을 입혀놓으면……. 음…… 그건 그 나름대로 사연 있어 보이고 괜찮을 것 같지만, 썩 좋진 않다. 얼굴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테올이 거지가 꿈이어서 자발적으로 입는 거라면 모를까.

“그러고 보니, 좀 더 수수한 옷일 거라고 들었는데 아니군요.”

“왜? 아쉬워? ……거지가 꿈이야?”

“예?”

“아무것도 아니야.”

미친, 헛생각만 했더니 헛소리가 나온다. 이상하다는 듯 웃는 아테올을 보며 다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신체 접촉을 할 수 있을까. 뭘 어떻게 해보려 해도 이상하다. 고민에 잠겨 있는데 아테올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가 느리게 자세를 바꾸며 나를 가만히 보았다.

“이곳에 오는 게 처음이 아닌 기분이 듭니다.”

“……전에 와본 적 있었던 거 아니야?”

역시 진짜 유리랑 뭐가 있나! 그 부분을 파고들면 자연스러운 신체 접촉도 가능한 거 아닐까? 하지만 아테올은 고개를 저었다.

“탑주님의 허락 없이 제가 어떻게 이곳에 오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전에 말이야. 내가 기억을 잃었잖아.”

“음……. 당신이 기억 못 하셔도 탑의 다른 자들은 기억하겠지요.”

“아.”

나는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러게. 떠볼 생각이었는데 얘기가 그렇게 되네. 진짜 유리가 아테올을 탑에 불러들인 적이 있다면, 나는 몰라도 탑의 누군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최소한 클로든이라도. 아니. 정말 비밀리에 불렀다면 모를 수도 있지. 그럼 아테올이 나를 떠보는 건가?

정말 모르겠다. 아테올은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 살길은 이 남자밖에 없는데. 우선 호감도를 잔뜩 올려야 한다. 그런 다음에 털어놓는 거다. 내가 진짜 유리가 아니라고.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애초에 없었다고.

“그럼 다른 곳에도 가볼래?”

“다른 곳이요?”

“내 방.”

“…….”

아테올이 눈을 크게 떴다. 드물게 그의 표정에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확실히 놀랐다. 하긴, 침실로 가자는 게 평범한 상황에서 쉽게 들을 말은 아니지. 게다가 이런 한낮에, 문 하나 너머에는 사람이 수도 없이 있는데.

“진심이십니까?”

“진심인데.”

“…….”

“싫으면 마.”

싫다고 하면 어쩌지.

“그럴 리가요.”

“클로든.”

하긴, 여러 가지를 생각해서 그럴 리 없지. 나는 아테올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클로든을 불렀다. 침실로 가겠다는 말을 듣고 클로든은 조금 전의 아테올과 똑같은 얼굴을 했다. ‘내가 지금 뭘 들었지?’ 하는 표정 말이다.

“바로 모실까요?”

그러나 아테올 앞이라는 걸 의식해서인지 그는 금방 놀란 기색을 지우고 내게 말했다. 내가 끄덕이고, 몇 분 후 나와 아테올은 정말 내 침실 앞에 서 있었다. 클로든이 고개를 깊게 숙이고는 문을 열었다. 시종은 응접실에서 그랬듯 모두 자리를 비워 아무도 없는 상태였다.

“다과를 준비할까요?”

“아니, 됐어. 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 물러나 있어.”

“알겠습니다.”

클로든은 마지막까지 아테올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물러갔다. 침실로 들어오면서 수만 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일단 침실까지 온 이상 뭔가 접촉을 할 구실은 엄청나게 생긴다. 응접실이 아닌 내 방, 심지어 서재도 집무실도 티 룸도 아니고 침실 아닌가. 엄청난 초대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뜸 ‘침대 갈래?’ 하면 미친 사람 같겠지. 너무 나갔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가늠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아테올의 상태가 이상했다.

“……?”

내가 고개를 돌린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왜 저렇게 놀란 얼굴이지? 방에 가자고 했을 때보다 더 놀란 얼굴인데.

문득 해가 너무 눈부시다는 생각에 인상을 찌푸리면서 깨달았다. 내가 침실에 들어오며 습관적으로 후드를 젖혀버렸다. 내 얼굴에 뭐라도 붙었나. 아니면 생각한 것보다 더 음울해서 놀랐나. 어느 쪽이건 썩 기분이 좋진 않았다.

“왜 사람 얼굴을 그렇게 빤히 쳐다봐?”

“……평소에 거울을 안 보시는지요?”

“무슨 뜻이야.”

더욱 기분이 나빠져서 얼굴을 찡그리자, 아테올도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죄송합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저…….”

“그저, 뭐.”

“눈동자가 갈색이신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금색이야.”

설정이 그랬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역시 아테올이랑 유리는 별 관계 아니었던 게 맞나 보다. 말하는 게 구렁이를 천 마리쯤 삶아 먹은 것 같아서 통 알 수가 없었는데.

“네. 공들여 세공한 것 같은 금빛입니다.”

금이면 금이지 세공한 금은 또 뭐야. 나는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돌아섰다. 아테올의 시선이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뭐, 그래도 나름 흥미를 가진 건가? 그리 생각한 순간 아주 반가운 효과음이 들렸다. 호감도 상승!

[호감도(아테올): 68%]

이렇게 많이?! 아무것도 안 했는데! 카드 뽑기 게임에서 최상 등급 카드라도 뽑은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홱 돌아서서 아테올을 보았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응.”

이 자식, 호감도가 68%나 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긴. 나는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내 빠른 걸음에 아테올은 왜인지 움찔하면서도 물러나거나 하지 않았다. 아테올의 향수 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서, 그의 가슴에 손을 턱 얹었다.

[아테올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1

+1

+1

뭔데 1씩 올라. 약 올리냐. 더 진한 게 필요하다는 거지? 호감도에 눈이 먼 나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살아야 해. 살려면 호감도가 필요해. 난 아테올의 목을 끌어안고 냅다 발돋움했다. 그러나…… 꼿꼿이 서 있는 아테올에게 입술이 닿지 않았다.

“…….”

“…….”

아테올은 묘한 눈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해?”

이건 아테올이 나한테 묻고 싶겠지만.

“진심이십니까?”

“……그러니까 침실로 데리고 왔지.”

“설마 저를 선택하신 게 이런 이유일 줄은 몰랐군요.”

“뭐? 그게……, 읍.”

‘그게 무슨 소리야?’라고 하려던 말은 끝까지 나오지 못했다.

입술이 꽤 뜨겁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어쩌면 내가 차가운 걸 수도. 고개를 숙여 내게 입술을 겹친 아테올은 한참 동안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눈을 감은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눈을 뜬 채 입술을 맞대고 계속 서로를 마주 보기만 했다.

키스라고도 하기 어려운 접촉에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이 울렁거리는 기분에 눈을 가늘게 뜨며 떨어지려 한 순간, 아테올이 나를 붙잡아 자신 쪽으로 확 끌어당겨 안았다. 커다란 품 안에 갇힌 나는 반사적으로 버둥거리려 했으나 아테올의 팔 힘이 강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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