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02. 실존하는 세계의 파편
세탁실을 통해 탑으로 돌아와서 몸을 씻고, 아까부터 그렇게 있었던 척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빗소리를 들으며 포근한 이불에 싸여 있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잠시 몸이 이불에 보호색처럼 어우러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클로든을 불렀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그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응. 4황자를 탑으로 부를까 하는데.”
그러자 클로든의 미간에 대번에 주름이 새겨졌다. 그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일전부터 여쭙고 싶었습니다만, 탑주님.”
“…….”
“왜 하필이면 4황자입니까?”
[호감도(아테올) 이벤트 종료!]
아테올의 호감도가 많이 올라갔어요. 이제 주위 상황에도 신경을 써볼까요?
뭐야, 아직도 이벤트 중이었던 건가. 사실 이벤트라고 할 만한 내용이 없었던 것 같긴 한데.
아무튼. 클로든은 내가 ‘하필’ 아테올과 손잡은 걸 상당히 걱정하는 듯했다. 거기에 ‘그야……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클로든의 눈빛이 어둑어둑한 게 잘못 답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상태창이 하는 말도 약간 경고 조였고.
사실 클로든의 이런 반응은 생각하면 너무 당연했다. 내가 관심도 안 가지던 4황자를 갑자기 지지한다고 나섰을 때부터 그는 의문이었겠지. 그런데 수많은 단계를 뛰어넘고 며칠 만에 탑 안까지 초대하다니.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을 찾아냈다.
“내가 그러고 싶어.”
……그렇게 말한 순간 게이지가 깎였다. 그래, 이것도 내가 할 법한 말은 아니었다. 클로든을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어색한 상태에서 이런 상황에 직면했을 때 예전의 나라면 아마 이랬겠지. 갑자기 기가 죽은 얼굴로.
“……아, 안 될까?”
라고. 다행히도 ‘내가 그러고 싶어.’에 덧붙인 말처럼 자연스러웠다. 주뼛거리는 내 모습에 클로든이 대경하더니 풀썩 무릎을 꿇었다.
“그럴 리가요, 그럴 리 있습니까. 세상의 모든 일은…… 탑주님의 뜻대로 하시면 됩니다.”
뭘 또 그렇게까지 황공해하나. 나까지 어색해져서 뺨을 긁적이고 있는데 게이지가 도로 회복됐다. 진짜 피곤한 상태창이다. 그나저나 이 게이지가 만약에 다 깎이면 어떻게 되는 거지? 고민하자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안내창이 띵 떠올랐다.
[게이지 소멸 시 죽음 후 회귀. 시점: 1회차 아테올과의 마지막 대면]
장난하냐! 죽고 다시 죽는 장면으로 돌아간다는 거잖아! 거기서 독 선택 안 하면 목 잘려 죽는다고! 독약보다는 목 잘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목 잘려 죽고 싶다는 얘기는 아니었다고! 그리고 호감도 못 올리는 거나 게이지 깎이는 거나 어쨌든 다 죽는 거 아냐, 진짜 장난하냐!? 내적 비명을 지르는 나를 클로든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들여다보았다.
“죄송합니다, 탑주님. 제가 주제넘은 말을 했습니다.”
“아, 아니, 아니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괜찮아.”
그래도 영 찜찜한 얼굴이던 클로든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분명 아시리라 생각하지만…… 탑 내부로 4황자를 초대한다는 건, 탑주님께서 그를 완전히 지지한다는 뜻이 됩니다.”
“응.”
아무리 내 의견이 절대적이라지만, 불만을 가지는 사람은 나올 거다. 내가 보이는 태도 하나로 황좌의 주인이 바뀌는 일이다. 당장 황태자의 친모인 황후는 물론이고, 황제 역시 4황자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
아무리 알력 관계에 무지한 나라도 알 수 있다. 황태자, 2황자, 3황자를 지지하는 세 개의 세력이 내게 반감을 가질 것이다. 설마 반란까지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헉, 잠깐. 반란?’
‘반란’ 하니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4황자의 반란이 가능했던 이유. 그가 ‘진짜 유리’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다른 세력이 내가 4황자를 황제로 만든다 해도 찍 소리 하지 못하는 건 내가 탑주 유리 아이엘레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에 다른 세력 중에 누군가가 유리를 찾아내 데리고 오면, 그때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
지하 통로는 바깥에서 내리는 비 때문에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지고 축축했다. 불빛 하나 없는데도 통로의 이끼 낀 돌바닥을 밟는 아테올의 발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의 우의 끝자락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져 지나간 길에 궤적을 만들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 길을 아는 사람은 그와 그의 측근뿐이기 때문이다.
그 측근, 레사는 지금 졸린 얼굴로 아테올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오늘은 신경 쓰이는 정보가 있어서 밖으로 나갔던 차였다. 그러던 중 어쩌다 보니 강아지 축제인지 강바람 축제인지를 하는 곳으로 흘러들어 갔는데, 거기서 예기치 못한 인물을 만났다. 마탑의 탑주.
후드를 쓰고 있는데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한동안 자리를 비웠었던 호위 기사단의 부단장과 나란히 무슨 개털을 만지려는 줄에 서 있었다. 개 털가죽이나 쓰다듬겠다고 줄을 선 인간들을 보며 기가 차던 차에 줄에서 그를 발견하니 황당하기까지 했다.
이상한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만 황궁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를 옮기려다 갑자기 개떼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그건 습격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라 해도 크고 작은 개 수십 마리가 불시에 온몸으로 달려드니, 마치 거대한 물줄기가 몸을 덮친 것처럼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지자면 동물이 꺼리는 편이었으므로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이 근래 그런 일이 잦다. 골목에 서 있는데 뭔가 이상해서 내려다보니 웬 뚱뚱하고 더러운 고양이가 발목에 몸을 치대고 있다든가, 처음 보는 개가 다리에 달라붙어 안아달라고 난리를 친다든가. 당장 개털을 만지는 줄 앞에서도 초면인 개(말도 안 되는 털 어쩌고 대회의 우승견이었다)가 깽깽거리며 만져달라고 졸라댔다.
주위에서는 동물이 좋아하는 페로몬이라도 뿜게 된 게 아니냐고 놀렸지만 그냥 넘겼는데, 설마 그게 그런 일로 이어질 줄이야. 아테올은 제 몸 위로 쓰러지던 가벼운 체중을 생각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체감상 개 수십 마리보다…… 아니, 그 체구를 생각하면 확실히 가볍겠지.
그 얼굴.
탑주의 얼굴을 아테올은 그때 처음 보았다. 항상 후드를 코끝까지 내려쓰고 다녀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얼굴을 본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기분이 들었다.
새카만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금빛 눈동자에 창백하고 매끄러운 피부, 처진 눈매와 사박사박 소리가 날 정도로 긴 속눈썹. 뺨은 진주 같았으며 입술은 장미 꽃잎 같았다. 다소 서늘하고 음울한 분위기마저 그 얼굴을 꾸미는 장식으로 보였다. 홀릴 정도로, 순간 놀라서 아무런 말도 안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그 얼굴이 아름다운 것과 별개로 마음은 기묘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언젠가 꾸었던 아주 좋은 꿈이 기억이 안 나 안타깝던 중에, 어느 순간 갑자기 그 내용이 떠오른 것 같은. 아주 좋아하던 노래를 잊고 지내다가 불현듯 가사가 떠오른 것 같기도, 아니, 그보다 좀 더 강렬한데.
눈을 가늘게 든 아테올이 뒤의 부관을 향해 물었다.
“레사, 마탑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탑주요? 뭐…….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이 생각하죠. 좀 음침하고 무섭고, 웬만하면 피하고 싶고.”
마탑주 유리의 음침함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연회나 무도회에 나올 때면 화려한 차림이지만, 언제나 후드를 깊게 눌러써서 얼굴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사실상 황제보다 지고한 위치였고, 그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 세상이 바뀔 수 있었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까마득한 옛날 탑의 주인이 처음 등장한 이후, 그의 마법이 사용된 기록은 도서관의 서가 몇 개를 채울 만큼 남아 있다. 그 한 사람이 나서서 수십만의 군대를 대적했고, 물이 마른 땅에 호수를 만들었으며, 바다를 땅으로 바꾸었다. 그는 자연법칙의 위에 있는 존재였다.
그렇게 압도적인 힘을 가졌으니 외경의 대상이 되는 건 당연했다. 두려움을 동반하는 존경. 하지만 대부분 그에게 두려움을 더 크게 느낀다. 아니, 더 크게 느끼는 걸 넘어 기괴하게까지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 후드를 뒤집어쓴 음울한 외형 때문에 더.
항상 아테올은 그걸 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이상하단 말이지. 탑주는 신 같은 존재 아니야? 보통 그런 취급을 받을 위치가 아니잖아.”
“네……? 어…….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요.”
마치 신이 아니라 막대한 힘을 가진 악마를 대하는 것 같다. 완벽한 우방인 절대적 존재를 음침하고 무섭다는 이유로 배척하는 게 기묘하다고 전부터 생각했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옛날엔 안 그랬던 것도 같고. 잘 모르겠네요.”
레사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별 관심 없다는 태도였다. 탑주 이야기를 하려 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듯이. 또는 이따금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자도 있었지만, 이건 이것대로 기이하다.
그 얼굴. 얼굴을 보고도 사람들이 똑같이 반응할까? 얼굴의 문제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흠.”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냐.”
대충 대꾸하며 아테올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먼저 엮여든 건 그였다. 처음 그를 만난 순간 어땠던가. 사실, 아테올은 그를 자신의 미래에서 크게 중요한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 탑주가 있거나 없거나 자신은 성공할 테니까. 쓸데없이 끼어들지만 않으면 그에게 관여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한데 그쪽에서 먼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자신의 편을 들어 주겠다고 나섰다. 그 후로 정말로 그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런 그를 볼 때마다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어쩌면 대단히 흔해 빠진 호감. 아니, 하지만 이건 호감보다는 역시 오히려 뭔가를 떠올리는 느낌에 가까웠다.
잊은 적도 없는 걸 떠올린다는 게 가능한가?
그리고 그 얼굴이 어디 쉽게 잊힐 얼굴인가. 누가 일부러 잊게 한 게 아니라면야. 아테올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비밀 통로 출구가 가까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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