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02. 실존하는 세계의 파편
갑자기 왜 이렇게 오른 거야? 설마 내 얼굴 보고? ……그건 아니겠지. 객관적으로 저승사자 뺨치게 생긴 음침한 얼굴을. 그럼, 설마……. 나는 몸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아테올의 위로 쓰러지는 바람에 나는 지금 그를 깔아뭉개듯 하고 있었다. 신체 접촉이 어쩌고 하던 말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쳤다! 싫어, 이런 19금 게임 같은 전개 싫어!
게다가 좀 깔아뭉갰다고 이렇게까지 올라? 그럼 뭐, 뽀, 뽀뽀라도 하면 순식간에 100% 되는 거 아니야? 그러나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돌아갈 리 없다. 분명히 지금 호감도가 이렇게 오른 건 첫 접촉 기념 보상이라거나, 뭐 그럴 것이다.
하지만 접촉으로 호감도가 오른 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면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해야 한다는 거잖아!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아 호감도를 올리는 것보다는 그쪽이 훨씬 쉬울 테니까!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아테올이 입을 열었다.
“후드를 쓰고 다니시는 이유를 알겠군요.”
“…….”
그래, 나 음침해. 보태준 것도 없으면서 말하지 마라.
이벤트는 무슨 내용인 거지? 흘끗 상태창을 보았으나 진행 중이라는 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눈을 피하시고.”
네 눈 피한 게 아니라 상태창 본 거……, 아니, 사실 아테올의 눈을 피한 것도 맞았다. 시선이 부담스럽다. 차라리 강아지 백 마리가 쓰다듬어 달라고 달려드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호감도가 올라서인지 아테올의 시선 온도가 미묘하게 따스해졌는데, 그게 뭐라 말할 수 없이 부담스러웠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아테올 역시 입을 다물고 날 빤히 보다가, 손을 뻗었다. 손이 다가오는 순간엔 일순 머릿속이 텅 비어 멍하니 있고 말았다. 그러다 손끝이 뺨에 닿은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테올의 손은 역시 따뜻했다. 광대뼈에 닿은 손이 느리게, 아주 느리게, 뺨의 피부가 아니라 솜털을 쓰다듬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가 턱까지 닿았다. 묘한 긴장감이 손이 닿은 부분을 타고 조금씩 퍼지기 시작했다. 입술조차 달싹하지 못하고 있는데, 아테올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안아드릴까요?”
“뭐?!”
백주 대낮에 이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지금 무슨 소리를……!
“다리에 힘이 풀리신 것 같아서요. 힘드시다면 안아서 일으켜드리겠습니다.”
“유리 님!”
다행히 아테올이 말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벨이 달려왔다. 벨은 나를 허수아비 인형 들듯이 번쩍 일으키고는 옆에서 부축했다. 나보다 한 뼘은 작은 벨에게 아기처럼 들린 이 상황에서, 그녀가 보이는 것보다 비상식적일 정도로 힘이 세다는 걸 어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괜찮으십니까? 그리고.”
벨이 아테올을 발견하고는 가볍게 눈인사했다. 여기서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하고 정식으로 예를 갖출 순 없는 일이었으니까. 아테올도 작은 손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희는 먼저…….”
“괜찮으시다면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예?”
순간 벨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아테올을 경계했다. 벨의 입장에서는 그러는 게 당연했다. 두문불출하는 4황자가 갑자기 나타난 것도 이상한데, 한다는 말이 ‘호위를 해주겠다’라니. 엄연히 호위로 따라 나온 자신이 눈앞에 있는데도.
아마 지금 벨의 눈에는 내가 4황자 위로 넘어진 것까지 의심스럽게 보일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그를 공격한 것에 가까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뭔가 사전에 꾸며진 계획이 있지 않았나, 하는 식으로.
벨이 순간 울컥하더니 입을 열려 하기에 재빨리 끼어들었다.
“정 그러고 싶다면 그렇게 해. 나한테 호위가 필요 없다는 건 네가 더 잘 알겠지만.”
“유리 님?”
벨은 매사에 물러섬이 없는 편이었다. 즉, 여기서 아테올에게 대놓고 따지며 덤빌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기 전에 중재하는 게 나았다. 벨은 놀란 얼굴로 나를 보았고, 아테올은 어깨를 으쓱했다.
강아지들은 각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뒤였고 주위에 몰린 사람들은 흘끔대며 우리를 구경했다. 우선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무작정 걸어 사람이 없는 한적한 전시장 쪽으로 오자, 왜 여기서 장사하고 있나 싶을 만큼 파리 날리는 음료수 가게가 보였다. 벨이 얼른 움직였다. 음료를 사러 가며, 그리고 가지고 돌아오는 내내 아테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진기명기를 보여주며.
“내 몫까지 사 온 건가? 괜찮은데.”
“조금 전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4황자 전하.”
“아. 뇌물이야?”
“……그런 건 아닙니다만…….”
벨이 떨떠름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동그란 눈이 말하고 있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친한 척해요?’ 나와 아테올의 관계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갈등하는데, 아테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얼마 전 무도회에서 우연히 탑주님과 가까워질 기회가 있어서 말이야. 그 기회를 지금까지 꽉 붙들고 있지.”
“예에…….”
“원래 무능하고 무지한 놈들은 권력자한테 빌붙는 법이거든.”
“…….”
벨은 더더욱 이상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아무튼 아까는 깜짝 놀랐습니다.”
뭐라 대답할지 망설이는데 다행히도 아테올이 먼저 떠들기 시작했다. 그는 흘끗 아까 강아지들에게 둘러싸였던 놀이터 쪽을 보았다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요즘 왠지 동물들이 제게 자주 다가오더군요. 원래 동물에게 인기가 없는 편이었는데요.”
“어, 그래?”
일말의 영혼조차 안 실린 어조로 답했으나 아테올은 신경 쓰지 않았다.
“설마 그런 식으로 먼저 덤벼들 줄은 몰랐습니다.”
“…….”
벨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속삭인 말에 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개를 지칭하는 척하지만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런 말까지 들어도 되는 건가? 사형감 아니야? 내 표정을 본 아테올이 얼른 두 손을 들었다. 하, 근데 이런 농담에 짜증 낼 때가 아니었다. 몸에 올라타는 정도로 이렇게까지 호감도가 올랐으니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캄캄했다.
“유리 님, 너무 늦기 전에 탑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밀착하다시피 한 우리 사이로 벨이 쑥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아테올이 아주 탐탁지 않은 듯했다. 아테올은 순순히 물러났다.
“저도 돌아가야겠군요.”
“……비가 많이 오는 것 같은데.”
내 입에서 나도 생각하지 않은 말이 흘러나왔다. 아니, 스치듯 생각만 했는데 저절로 입 밖으로 나왔다. 실내에서 바깥의 빗소리가 고스란히 들릴 정도로 밖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나하고 벨은 포털을 통해서 간다지만, 여기서 황궁까지는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였다.
얼마 전 밤비를 맞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던 모습이 떠올라서 그랬나.
아테올은 잠시 묘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슥 웃었다.
“이 정도 비야, 맞고도 다니죠.”
“…….”
“농담입니다. 우산도 있고, 마차도 있습니다. 탑주께서는 심려하지 마십시오.”
아……. 마차. 마차란 말이지.
흥, 마차는 무슨. 그제야 그가 알고 있는 황궁의 무수한 비밀 통로가 떠올랐다. 마차가 아니라 비밀 통로를 통해 나왔겠지. 지하도니까 비를 맞을 일이 없지 않겠는가.
그 생각을 하니 괜히 아테올을 떠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여긴 왜 온 거야?”
……떠본다기엔 지나치게 정직한 질문이었다. 아테올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강아지를 구경하려고 왔습니다.”
“넌 동물한테 관심 없잖아.”
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동물한테 관심이 없다니,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겠는가. 사실 아테올이 동물 애호가에 동물 사랑 협회 회장일 수도 있는 일인데. 그냥 짐작이 뇌를 거치지 않고 입으로 나온 듯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차마 네 인성을 보고 추측해 봤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아서 입을 다물었다. 진짜로 동물 사랑 협회 회장이면 어떡하냐고.
“동물들이 저를 싫어하는 거지, 저는 특별한 감정이 없습니다.”
“특별한 감정이 없다는 게 관심이 없다는 거지.”
“흠…….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럼 황자 전하께서는 별 관심도 없는 강아지를 보러 굳이 여기까지 오신 거군요?”
벨이 다시 끼어들었다. 이미 벨의 머릿속에서 4황자는 나와 가까워지려 개수작을 부린 귀찮은 잡동사니로 분류된 듯했다.
“그것도 듣고 보니 그렇군.”
나는 벨에게 눈짓했다. 더 이상 엮이지 말고 가자. 벨은 재빨리 내 말을 알아듣고 내 뒤로 슥 물러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누가 봐도 ‘잘 가’의 예의 바른 표현이었다.
“여러모로 실례가 많았어. 그럼 우린 이만.”
내 말에 이번엔 아테올도 잡지 않았다. 돌아서서 가려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내딛는 첫걸음에 발이 바닥의 낮은 구조물에 걸렸다. 몸이 앞으로 휘청이는 순간 이건 상태창의 농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중심을 완전히 잃어 넘어질 거라 생각했으나 예상한 충격은 없었다. 대신, 내 몸을 단단한 무언가가 받치고 있었다.
‘상태창 죽이고 싶다.’
나는 일그러진 얼굴로 생각했다. 맞다. 이건 상태창의 농간이 확실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이런 구도로 아테올에게 안겨 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아테올은 한 손으로는 내 후드를 머리에서 벗겨지지 않도록 잡은 채였다.
“얼굴이 드러나는 걸 꺼리지 않으십니까.”
아테올이 말하더니 나를 바로 일으켜 세우며 덧붙였다.
“혼자 보기 아까운 얼굴이긴 하지만요.”
“…….”
놀리는 건가? 개수작도 이 정도 되면 제법이었다. 입을 열까 말까 하다가 결국 열었다.
“……고마워.”
“별말씀을.”
상태창에서 ‘뾰롱! 뾰롱!’ 하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호감도는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하, 이러면 정말 상태창의 농간에 탑승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다. 나는 엄청난 카드를 내밀었다.
“그런 뜻에서, 가까운 시일 안에 초대를 하고 싶은데.”
“초대요?”
“탑 안으로 말이야.”
“유리 님!”
벨이 경악해서 소리쳤다. 내 시선은 아테올의 얼굴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면서 그의 호감도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둥근 원 안에 표시된 숫자는 계속 조금씩 올랐다. 아테올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언제, 어디로든 기꺼이 가겠습니다.”
[호감도: 아테올]
62%
아테올은 당신을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라고 생각합니다.
조짐이 아주 좋네요!
……좋은 거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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