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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17화 (17/93)

17화

02. 실존하는 세계의 파편

졸지에 전생보다 며칠 빠르게 대감이가 되어버린, 다른 이름이 분명 있을 고양이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벨이 나를 이끌며 말했다.

“빨리 가요, 유리 님. 귀여운 물건은 금방 다 팔린대요.”

우리는 서둘러 솔레트 기념관으로 향했다. 기념관은 뒷골목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울퉁불퉁하게 깔린 돌 위로 고인 물이 하수구를 향해 졸졸 흘렀고, 곳곳의 물웅덩이에 빗방울이 떨어져 둥근 파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비 냄새가 짙게 감돌았다.

강아지 축제. 전생엔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뭘 하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강아지 축제에서는 뭘 해?”

“간식이랑 장난감 같은 걸 팔죠. 구경하러 온 강아지와 그 가족도 많고요. 또 강아지 기념품도 팔아요. 아마 다음 달에는 고양이 축제고, 그다음 달은 동물 통합 축제일 거예요.”

간식이랑 장난감이랑 이런저런 물품을 파는…… 역시 애견 페어 같은 거였군. 고양이 축제와 동물 통합 축제도 약간 신경이 쓰였다. 난 동물을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한다니까 그냥 궁금해서. 근데 강아지 간식을 너구리가 먹어도 되나?

“벨, 너구리는 무슨 과지?”

“갯과죠.”

“아. 여우도?”

“네, 아마 그럴걸요.”

다행히 이 세계에도 동물학자는 있었고 자체 번역인지 무슨 강, 무슨 과, 무슨 목이라는 구분법도 거의 같았다. 돌아가는 길에 장난감이나 간식을 좀 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돈 가지고 나와서 다행이다. 우기가 끝난 후에 애들이 온실로 돌아가면 그때 은근슬쩍 다른 사람이 사다 둔 것처럼 넣어 두면 되겠지.

솔레트 기념관은 뒷골목에서 멀지 않았고, 가는 동안엔 빗방울도 가늘어져서 마법을 쓰지 않았는데도 비교적 쾌적한 상태로 도착할 수 있었다. 비가 쏟아붓는데도 불구하고 거대한 기념관은 강아지를 동반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제각각의 귀여움을 자랑하는 강아지가 있다. 눈이 이리저리 돌아갔다. 휴, 털 날리는 동물은 정말 별론데.

“헉, 저기 좀 보세요. 작년 털 결이 부드러운 강아지 대회 우승견의 털이래요.”

“…….”

나도 모르게 경악한 얼굴로 벨을 쳐다보았다. 벨이 가리킨 건 마치 강아지의 일부를 잘라놓은 것처럼 털이 보송보송한 쿠션이었기 때문이다. 털 결이 부드러운 강아지 대회 우승견을 어떻게 한 거야?!

“역시 마법은 대단해요. 저런 것도 만들 수 있고.”

끼아악, 마법으로 박제?! 더더욱 경악하는데, 벨이 두 손을 모아 잡으며 즐거워했다.

“진짜 우승견 털이랑 감촉이 똑같대요. 어, 그 강아지다! 자기 털 보고 짖고 있어요!”

……아니었다. 다행이다. 털 쿠션은 마법을 이용해서 만든 물건인 듯했다. 나도 참,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털 쿠션을 만지려고 길게 줄을 선 사람들 옆에서 쿠션과 똑같은 털을 가진 작은 개 한 마리가 맹렬하게 짖고 있었다. 자신의 분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쌀알처럼 작은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게 제법 위협적이었다.

우리도 털을 만져보기 위해 줄을 섰다. 털을 몇 번 쓰다듬어 보고 떠날 뿐이었기에 순서는 금방금방 줄어들었다.

마법으로 만들고 유지되는 털 쿠션은 그 많은 사람이 손으로 문질러대고 갔는데도 방금 목욕한 강아지처럼 보송보송했다. 손으로 쓸어보니 과연 털 결이 부드러운 강아지 대회에서 우승할 만도 했다.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나에 이어 벨이 털 쿠션을 쓰다듬는 동안 흘끗 오리지널 우승견을 보았다. 강아지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는지, 이빨을 싹 감추고 방긋 웃으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강아지의 가족으로 보이는 남자가 어리둥절하게 자기 강아지를 들여다보았다.

“왜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지?”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가자, 강아지는 아빠의 품을 벗어나 나한테 오려고 버둥거렸다.

“저, 혹시 한 번만 안아주실 수 있을까요? 얘가 고집이 정말 세서. 그냥 가시면 오늘 하루 종일 풀 죽어 있을 거예요.”

“아.”

굳이 안아야 하나. 하지만 또 굳이 안 될 것도 없지. 팔을 뻗자 강아지는 거의 날아오르듯 나한테 다가와 안겨서 손길을 조르며 로브 아래 얼굴과 입술을 핥고 난리 쳤다.

“하하, 왜 이러지. 원래 낯선 사람은 경계하는 성격인데 아까도 한 번 그러더니 또 이러네요.”

전혀 낯선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 것 같은데. 아까도 그랬다면 더 아닌 것 같은데. 강아지 캐 해석 잘못하신 거 아닌가요? 부담스러움에 옆구리와 배와 머리와 목덜미와 엉덩이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고 다시 가족에게 돌려주었다. 그러자 강아지는 왜 벌써 그만두냐는 듯 불만스럽게 낑낑거렸다. 애써 외면했다.

“벨, 다 만졌으면 얼른 가자.”

“네! 와, 유리 님, 저 애 안아보셨어요? 부럽다.”

“응. 가자.”

“털 어때요? 쿠션이랑 똑같아요?”

“응. 똑같아.”

진짜 똑같았다. 온기가 있고 더 말랑말랑하다는 것만 빼면. 쿠션도 그렇게 만들면 어땠을까, 잠깐 생각했으나 쿠션이 뜨끈하고 말랑하면 왜인지 기분 나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넓은 홀은 구경할 것 천지였다. 온갖 재료로 만든 수제 간식과 사료가 몇 백 종류는 되는 것 같았고, 장난감도 어마어마했다. 옆구리에 강아지를 끼거나 업거나 작고 푹신한 수레에 실은 사람들이 눈이 돌아간 채 물건을 쓸어 담고 있었다.

나도 그 틈에 끼어서 간식을 몇 봉지 샀다. 몰래 가져가서 숨겨두었다가 동물들에게 줄 생각이었다. 너구리랑 여우가 먹을 고기 간식에 토끼도 먹을 수 있다는 건조야채 같은 것도 사고……. 잠깐 돌아다녔더니 로브 주머니 양쪽이 물리적으로 두둑해졌다.

나는 동물에 흥미가 아주 있는 편은 아니었으므로 이런 축제를 몰랐던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전생에도 알았다면 한 번쯤 와봤을지도. 말린 방울양배추 봉투를 주머니 속 남은 공간에 어떻게든 욱여넣고 있는데, 벨이 나를 끌어당겼다.

“저기 강아지들 놀이터래요. 저쪽에 한번 가 봐요.”

“우린 강아지도 없잖아.”

“노는 강아지 구경하러 온 사람이 더 많을걸요.”

흘끗 보니 그런 것 같긴 했다. 그쪽으로 막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와아, 하는 탄성이 들리더니 강아지들이 일제히 뭔가를 향해 발사되었다.

강아지들이 달려든 건 사람, 그것도 키가 꽤 큰 사람으로 보였다. 체구도 언뜻 보기에 좋았으나, 대중소 크기를 막론하고 수십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자 주춤하더니 그대로 뒤로 쓰러져버렸다. 뭐야. 온몸에 고구마라도 바른 사람인가. 고구마 싫어하는 강아지는 없지.

“뭐지?”

벨이 기웃거리더니 궁금하다며 나를 끌고 그리로 뛰어갔다. 꼬리를 맹렬히 흔들며 보물섬에라도 온 듯 난리인 강아지들의 모습을 보건대, 사람이 아니라 사람 모양으로 만든 고구마였던 건 아닐까 싶었다. 이벤트를 위해 가져다 놓자마자 강아지들이 달려든 거다.

하지만 내 예상은 틀렸다. 빼곡하게 모여든 강아지들 틈으로 사람의 손이 쑥 하고 빠져나왔다. 고구마를 발랐던 흔적도 없다.

“뭐 하는 사람일까요? 저 강아지들을 다 키우나?”

아닌 것 같다. 주위에서 경악한 가족들이 저마다 자기 집 강아지의 이름을 불러대며 끌고 오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강아지들은 산책하다 누가 묻어둔 생선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쓰러진 사람에게 코를 박은 채 버텼다.

대체 저 사람은 뭐야. 궁금한 나머지 인상까지 찌푸리고 있는데, 곧 답을 알게 되었다. 별로 알고 싶지 않은 형태로.

“앗, 유리 님!”

벨의 비명 같은 목소리와 함께 발목에 뭔가 따뜻한 게 느껴지나 싶더니, 이번엔 다른 강아지 한 무리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뜨끈하고 보드라운 물체들에게 발목을 휘어 감긴 나는 어쩔 도리도 없이 앞으로 쓰러졌다. 공교롭게도 이미 쓰러져 있는 그 사람과 나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이런, 망했다.’

덕분에 나는 대뜸 사람 위로 몸을 내던진 이상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 위에서 무너지는 장애물에 강아지 몇 마리가 깜짝 놀라 옆으로 피했다. 그리고 겹쳐져 쓰러진 나와 그 사람 위를 강아지들이 다시 덮었다. 개들이 헥헥, 낑낑거리며 꼬리를 흔들고 겅중겅중 뛰어대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윽…….”

넘어지는 결에 로브 후드가 살짝 벗겨졌다. 사과고 뭐고 우선 후드부터 고쳐 쓰려는데, 쓰러져 있던 사람이 자기 얼굴을 핥고 있던 중형견 한 마리를 옆으로 쓱 밀어 치웠다.

“…….”

눈이 딱 마주쳤다.

이런 우연이 있어도 돼?

그 사람의 찌푸려져 있던 얼굴이 서서히 펴지더니, 눈이 커졌다. 몸을 누르고 핥아대는 강아지들의 존재가 순간 잊혔다. 새빨간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건 아테올이었다.

대체 아테올이 왜 여기에. 진짜 이런 우연이 있어도 되는 거야?

그의 표정은 좀 낯설었다. 마치 이상한 무언가라도 보는 것처럼 나를 본다. 며칠 동안 나한테 장난스럽고 능글맞게 굴 때도, 가장 강렬한 순간인 죽을 때도 못 보았던 표정. 어떤 감정이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정말 놀라운 무언가를 봤다, 이렇게밖에는.

아, 그보다 로브! 이 각도면 내 얼굴이 아테올에게 정면으로 보였을 것이다. 재빨리 후드를 뒤집어쓰려는데 ‘뾰로로롱! 짜잔!’에 가까운 맑고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누가 들어도 경사로운 효과음이었다. 상태창을 확인하기도 전에 그게 뭔지 알 수 있었다. 아테올의 머리 위에 떠오른 호감도 표시가…….

“……왜 이런 곳에 계십니까?”

무려 56%로 올랐다.

[호감도 급상승! 이벤트가 발생합니다.(자동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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