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02. 실존하는 세계의 파편
아, 여기서부터 전생 내용대로 흘러가나? 나도 모르게 반가움을 표할 뻔했지만 참았다. 지금의 나는 아직 레이안 경, 벨의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상태라고. 전에 편지를 받았을 때도 좀 위험했단 말이지. 메세트는 수도의 바로 옆 도시이니 곧 만날 수 있을 거다.
그 때 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클로든이 직접 문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탑주님, 시종장님, 에레토입니다.”
클로든이 문을 열어주자 들어온 건 4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짧은 머리의 여성이었다. 마탑의 의사, 에레토 미일이다. 그녀는 내게 요즘 불편한 일은 없는지, 악몽 같은 걸 꾸는지 등등 사소한 문진 몇 가지를 하고 수심에 잠겼다.
“아무래도 불면증 기미가 있으신 듯합니다. 업무가 과중하신 건 아닌지…….”
에레토가 힐끗 클로든을 보았다. 봐도 소용없다. 과중은 고사하고 업무라고 할 만한 것도 거의 없는데 무슨. 둘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잠시 나누었고, 난 원하던 대로 수면제와 신경 안정제를 받았다. 두 개 다 반으로 쪼개서 먹으라고 했지만 방에 혼자 남은 후 두 알씩 집어서 입에 던져 넣었다.
효과는 굉장했다. 나는 두려움을 느낄 틈도 없이 누가 머리를 망치로 후려친 것처럼 잠들었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
“레이안 경이 도착했습니다, 탑주님.”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기답게 비가 추적추적 내렸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요 며칠 전생 그대로 내용이 흘러가는 데다 약 덕분에 잠도 잘 수 있어서 마음이 편안했다.
문지기들이 문을 열자 머리를 하나로 높이 올려 묶은 작달막한 체구의 기사가 얼른 안으로 들어왔다. 씩씩하고 경쾌한 걸음에, 주위까지 밝아지게 하는 화사한 표정. 호위 기사단의 부단장, 벨 레이안이었다.
“가장 높은 탑의 주인을 뵙습니다.”
벨은 북쪽의 로아네스 대공에게 날 대신해 인사하러 갔다가 막 돌아온 길이다. 소위 말하는 그 북부 대공 말이다. 황족인 대공과 마탑의 교류는 활발하진 않지만 가늘고 길게 이어졌다.
오가는 길과 현지에서의 일정까지, 아무리 마법 포털을 사용했다고 해도 길고 피곤한 여정이었을 텐데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는 게 그녀다웠다.
“로아네스 대공 전하는 건강했습니다. 선물도 무척 마음에 들어 했고요. 특별히 이상한 조짐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음, 요새 뭘 키운다고 하던데요.”
“키운다고? 뭘?”
원래 이런 말을 들었었나? 그 얼음덩어리 같은 사람이 뭘 키운다니. 마수라도 잡아다 키우는 거 아냐? 하지만 물은 순간 게이지가 깎였다.
하긴, 전생엔 로아네스 대공이 누구인지도 몰랐으니 뭐를 키우건 삶아 먹건 내가 물어보진 않았겠지. 깎이고 채워지고를 반복하며 게이지는 지금 80%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속으로 파르르 떨며 입을 다물었으나 다행히 벨이 알아서 설명을 계속해 주었다.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비 오는 날 대공성 성벽 근처 다리 밑에서 주웠다고 하던데요.”
비 오는 날 뭐 줍는 거 아니랬는데. 부디 그 정체 모를 동물이 로아네스 대공에게 큰 해를 끼치지 않기를 바라며 벨의 보고를 계속 들었다. 신경 쓰이는 내용은 딱히 없었다.
“그리고 이 말은 탑주님께만…….”
흠, 하고 헛기침한 벨이 클로든을 한 번 보았다. 클로든은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내 옆으로 바짝 다가온 벨이 몸을 굽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유리 님, 우리 나갈까요? ……한동안 기분이 별로 안 좋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불면증에 걸렸다는 소문이 벌써 벨에게까지 닿은 모양이다. 그래도, 갑자기 나가자고 하다니……. 뜻밖이었다. 벨이 나한테 외출을 권유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날, 마탑에 처음 그녀가 돌아왔을 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벨은 보고서 작성이며 서류 처리로 한창 바빠서 며칠이 지난 후에야 내게 찾아왔다. 대사 자체는 똑같았으나 상황이 다르다.
전생에도 나는 이 무렵 비실비실했다. 잠을 잘 못 자기도 했고. 하지만 그건 빙의에 적응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아서였고, 벨은 그걸 눈치채 날 밖으로 데리고 나가준 것이었다. 바깥 구경을 시켜주겠다는 말이 너무 반가워서(애초에 감금된 것도 아니었는데 나갈 생각을 못 했다) 냅다 고개를 끄덕였기에 기억한다.
나가자고 말하는 타이밍이 바뀐 건 내 행동 때문인 듯했다. 그때는 그냥 비실비실하게만 있었고, 지금은 아예 불면증 기미다, 우울해한다, 란 소리를 들었으니까. 이래서 시스템이 전생에 할 법한 행동만 하라고 하는 건가.
벨이 ‘어떠세요?’ 하고 묻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긴 머리카락이 옆으로 살랑 흘러내리는 게 귀여웠다.
“솔레트 기념관에서 강아지 축제를 한대요.”
……? 뭔 축제? 6년 동안 그런 축제는 들어 본 적도 없다. 솔레트 기념관은 이런저런 전시 행사나 토론회 같은 걸 여는 대형 홀이었다. 애견 페어 같은 건가? 어쨌든 재미있을 것 같았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벨이 활짝 웃더니 말했다.
“그럼 한 시간 후에 세탁실 앞에서 기다릴게요.”
그렇게 말하고 벨은 물러갔다. 클로든은 우리끼리 속닥속닥 무슨 얘기를 했는지 묻지 않았다. 벨과 내가 둘이서만 몰래 탈출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 이게 분명 작당 모의임을 짐작할 테지만, 내 컨디션을 걱정해서 못 본 척해 주는 듯했다.
한 시간 후 나는 내가 가진 것 중에서 제일 후줄근하게 보이는 두툼한 로브를 둘러쓰고 그 위에 우의까지 걸쳤다. 우기에는 날씨가 쌀쌀하다. 이 정도는 입어야 추위에 덜덜 떨지 않을 것이다. 클로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방을 빠져나와 세탁실로 향했다. 좀처럼 내 곁이나 방 근처에서 떠나지 않는데, 지금은 아예 내 외출을 눈감아 주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내가 감금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밖에 나가려면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다. 그걸 전부 건너뛰고 평복 차림으로 벨과 둘이 탈출했다가 돌아오면, 나는 잔소리를 듣고 벨은 징계를 받아야 했다. 그래도 벨은 굴하지 않고 내게 외출을 권했고, 나는 그녀를 따라갔다. 잔소리와 징계 때문에 포기하기엔 벨과 하는 외출이 너무 즐거웠다.
“유리 님!”
세탁실 옆, 정확히는 세탁물을 쏟아 넣는 바닥의 문 옆에 서 있던 벨이 손을 흔들었다. 여긴 수거한 세탁물을 넣는 지정 시간이 아니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만들어둔 포털이 이 안에 있어서 몰래 빠져나가기엔 적격이었다. 지금이라면 탑 곳곳에서 쓰는 리넨 세탁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것이다.
벨이 바닥의 문을 열고 안을 살피더니 훌쩍 뛰어내렸다. 푹, 하는 소리가 들렸다.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본 벨이 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나도 벨을 따라서 휙 뛰어내렸다. ……게이지가 깎였다. 그래, 처음엔 높이에도 겁먹고 저 세탁물 사이에 뭐라도 있으면 어쩌나, 벨이 나를 납치하는 거면 어쩌나, 세탁물이 충분히 푹신하지 않으면 어쩌나, 온갖 걱정을 다 했었지.
하지만 가득 쌓인 리넨은 고작 한 번 탁자에 깔거나 손님용 침대에 깔았다가 사용하지도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세탁이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깨끗하고 좋은 냄새가 났고, 푹신했다. 이대로 누워서 자고 싶을 정도였다. 잠……. 으, 아냐. 얼른 몸을 일으켜서 벨에게 다가갔다.
포털은 세탁물 보관실 구석에 있었다. 벨이 익숙하게 다가가 주위에 있는 잡동사니를 치우고 바닥을 드러냈다. 복잡한 마법진은 아니었다. 그냥 사람 둘 정도가 설 정도로 긴 직선 하나뿐. 사용 방법도 간단했다. 내가 올라서기만 하면 됐으니까.
벨과 함께 포털 위에 올라서자 눈앞이 반짝거리더니 밝은 조명을 켠 것처럼 새하얗게 물들었다.
빛이 사라지자 눈앞에 보인 건 빗소리가 울리는 작은 집이었다. 사람이 살 수 있도록 기본적인 게 갖추어져 있고, 방금 청소한 듯 깨끗했다. 이 집은 사실 포털을 쓸 때 말고는 사용하지 않는다. 관리하는 사람도 당연히 없지만 마법이란 그런 것이었다. 항상성을 유지하게 해주는 힘 말이다.
여기서 문을 열고 나가면 상점에서 안 쓰는 물건이나 쓰레기를 쌓아두는 으슥한 골목이다. 우의를 고쳐 쓰며 밖으로 나가니 뚱뚱하고 지저분한 고양이 한 마리가 처마 밑에 앉아서 우리를 보고 있었다. 고양이는 우리를 보고도 딱히 놀란 기색 없이 앞발을 핥다가 빗속으로 터벅터벅 사라졌다.
“와, 저 고양이 오랜만에 보네요.”
사실은 잘 아는 얼굴이었다. 이 동네 상인들이 다 같이 키우는 골목의 터줏대감. 옛날에 무심코 벨에게 ‘터줏대감’이라는 말을 했다가 벨이 못 알아들어 잠시 헤맸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 골목 터줏대감인가.”
“네? 터쥬대감? 그게 뭐예요?”
어리둥절한 벨의 얼굴 옆에서 게이지가 조금 차올랐다. 눈물겹다. 이렇게 애써서 겨우 채우고 뭐 하나 잘못하면 와장창 깎이고.
아무튼, 이 세계에는 터주도 없고 대감도 없고 무속 신앙도 없어서 터줏대감을 설명할 길이 막막했었다. 하지만 이제 방법을 안다.
“그냥…… 수호신 같은 거.”
대충 의미가 맞지 않는가. 전생엔 얼버무리려 이렇게 말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적절했다. 뭐든 심플한 설명이 제일인 법이다.
“와, 멋지다. 고대어인가요?”
“아니.”
“그럼 이제부터 쟤를 대감이라고 부를까요?”
대감이면…… 벨이 기사단 부단장이니까 벨보다 높은 거 아닌가? 호위 기사단 부단장이면 관직상 호칭이 영감일 텐데 영감보다 대감이 높잖아. 대감이, 대감이, 하고 막 불러도 되나?
하지만 아무도 대감이 뭔지 모르는데 무슨 상관이겠는가. 전생과 똑같은 사고의 흐름을 거쳐 나는 “좋아.” 하고 대답했다. 또 게이지가 약간 올랐다. 이럴 때 보면 완전 쉬운 것 같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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