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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15화 (15/93)

15화

02. 실존하는 세계의 파편

“…….”

호감도는 물론 제자리다. 하, 진짜 위험한 남자였다. 호감도 시스템이 없었다면 영락없이 지금 나한테 마음이 있어서 이러는 거라고 착각하겠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아테올이 이렇게 가까이서 나를 들여다보니 나는 또 무서워질 수밖에 없다. 지금 이렇게 무해한 척해도 그는 내 사형 선고자이자 집행인이었다고.

“좀 더 말이 되는 핑계를 찾아봐.”

마음을 달래기 위해 레이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테올은 뜻 모를 웃음을 짓더니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흐음.”

그래, 차라리 그쪽이 더 말이 되는 핑계이긴 하지만 여전히 수긍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후드에 가려져서 보이진 않았을 텐데, 마치 보기라도 한 것처럼 아테올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말입니다. 전……, 지금까지의 제가 기억이 안 나실 테니 솔직하게 말씀드리지만, 충동적인 부분이 있는 사람입니다. 가끔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곤 하죠. 이번에도 그런 맥락이라고 이해해 주신다면 기쁘겠습니다.”

“무도회장에 늑대 머리를 들고 들어온 것처럼?”

“네. 아주 비슷합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어째 기분이 미묘했다. 괜히 헛기침만 한 번 하고 홍차로 목을 축였다. 느리게 몇 모금 마신 뒤 잔을 내려놓자, 그걸 기다렸다는 듯 아테올이 입을 열었다.

“제가 새벽에 방문한 것 때문에 심기가 상하셨습니까?”

“내가 기분 상할 일은 아닌걸.”

자기 걱정이나 하시지. 너한테는 지금 너 자신도 모르게 마탑의 동물 살해 미수 혐의가 씌워져 있다고.

“그러면, 비를 맞고 돌아간 제가 불쌍해서 이렇게 불러주신 겁니까?”

“…….”

전혀 다른 이유였지만, 어차피 아테올도 진심으로 묻는 건 아니니 상관없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고 바닥의 로이까지 함께 안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테올의 시선이 따라온다.

“시간을 빼앗았네. 이제 돌아가도 돼.”

“……왜 부르신 건지 여쭤도 될까요?”

“그냥.”

아테올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나도 가끔 충동적이거든.”

그리고 그대로 아테올을 온실에 남겨두곤 밖으로 나왔다. 네가 동물을 죽이려 한 게 아니냐고 묻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이벤트 실패…….]

호감도를 올릴 기회였는데 아쉽네요.

그런 내용이 담긴 고풍스러운 상태창은 기분 탓인지 사람을 놀리는 것처럼 보였다. 고개를 돌려 무시했다.

수선화 정원에서 탑까지는 천장이 높은 회랑으로 이어져 있었다. 넓은 회랑 양쪽 가장자리에 비가 들이쳐 대리석이 다 젖었다. 밖에서 나를 기다리던 세르타는 비가 들이치는 방향을 가늠하더니 내 왼쪽에 섰다. 바람이 왼쪽에서 불고 있었다.

덕분에 털끝만큼도 젖지 않고 탑으로 돌아왔다. 너구리들을 세르타에게 들려 돌려보내고, 나는 씻고 대강 옷을 갈아입은 뒤 침대에 드러누웠다. 푹신한 침대가 온몸을 감싸 안는 것 같았다. 저절로 잠이 온다…….

“…….”

가물가물하게 잠에 빠져들려 하던 나는 번쩍 눈을 뜨고 일어났다. 등줄기가 그새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가쁘고 가느다란 숨이 좁아진 목구멍을 뚫고 간신히 새어 나왔다. 온몸이 뭉개지는 듯한 공포와 무력감, 피로에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또는 울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두려움의 실체를 알기에, 그것으로 가득 차려고 하는 머릿속을 억지로 깨웠다. 무엇이든 다른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잠들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잠들면……, 잠드는 건 너무 두렵다.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아테올이 전생에 내게 주었던 독약.

그건 잠드는 것처럼 어떤 고통도 없이 서서히 죽어가는 약이었다.

가슴이 진정되기를 기다렸으나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침대 위를 이리저리 구르고 벌떡 일어나 방을 돌아다니다가, 욕실로 뛰어 들어가 손을 씻다가, 얼굴에 차가운 물을 끼얹기까지 했다. 잠기운이 가시자 두려움이 조금 발을 빼며 물러났다.

“하…….”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잠드는 것처럼 죽는 건 언뜻 인도적이고 평온해 보인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면 달랐다. 잠이 쏟아진다. 무겁고 무거운 수마. 그러다 잠들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한다. 그 상황에서 계속 졸음이 오는 공포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되살아난 후에도 잠들려 하면 그 순간이 떠오른다. 막연하게 ‘죽기 싫은’ 게 아니다. 서서히 죽어간다는 두려움, 허무함, 막막함, 도망치고 싶은 마음, 후회. 트럭에 치였을 때는 끔찍하게 아팠어도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끝났다. 차라리 아테올이 손에 든 검으로 내 목을 뎅겅 베었다면 나았으리라. 정말, 확실하게, 그편이 훨씬 나았다.

덕분에 지금 나는 불면증의 전조를 보이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죽음이 떠오르고, 그때마다 소스라치며 깨어났으니까. 그걸 한참 반복하다가 간신히 잠들고 얕게 자다 깨어난다. 매일 그러는 건 아니었지만 빈도가 잦다 보니 이제는 아예 졸린 상황이 오는 것부터 조금 무서웠다.

이 몸의 자가 치유 능력은 정신적인 면까지 커버해 주진 못하는 모양이었다. 신경 안정제와 수면제를 듬뿍 먹으면 좋을 텐데, 내가 아직 이런 상태까지 클로든에게 말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을 다 놓지 못해서.

덕분에 안 그래도 음침한 안색이 나날이 더 안 좋아지고 있다. 눈 밑의 검은 그늘이 얼마나 칙칙한지……. 이러다 정말 불면증이라도 걸리는 날에는 원인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침대에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괸 채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탑주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린 목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홱 돌렸다가 내 머리카락에 뺨을 맞았다. 클로든은 슬며시 얼굴을 문지르는 날 보며 놀랐는지 움찔했다.

“제가 너무 갑자기 들어왔습니다. 문을 두드렸는데 답이 없으셔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내가 생각에 빠져 못 들은 탓일 거다.

“4황자 전하는 별다른 말 없이 돌아가셨습니다.”

“그, 그래.”

뭐, 이대로는 못 간다고 강짜를 부리거나 하진 않았겠지만, 조용히 돌아갔다니 다행이었다. 아직 따가운 뺨을 쓸고 있는데 클로든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유리 님.”

나도 모르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나를 이름으로 부르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 흔치 않은 경우에는 내가 무척 걱정될 때가 포함되어 있었다.

“혹시 요즘 고민하는 일이라도 있으신 건지요?”

“고, 고민?”

갑자기 그건 왜. 전생엔 그런 질문 안 했던 것 같은데, 내가 많이 이상했나.

“아무래도 평소와 다르신 듯하여…….”

“아니, 뭐…….”

시선을 피하며 얼버무리자 클로든은 고개를 숙였다.

“괜한 참견이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걱정이 있으시다면 이 클로든에게 말해 주십시오.”

걱정이 가득 묻어나는 말투였다. 클로든은 아무튼 유리를 향한 마음이 지극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유리를 모셔왔으니 가족이나 다름없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응. 고마워.”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게이지가 깎이진 않았다. 이건 전생의 나도 할 법한 행동이었으니까. 이어서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럼 두통이랑 신경 안정에 좋은 걸 준비해 줘.”

“알겠습니다. 차를 올릴까요?”

“아니, 약으로.”

클로든의 미간이 좁아졌다.

“요즘 계속 약을 찾으시는군요.”

“아…… 그랬나?”

아차 싶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잠들면 그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잘 수 없으니까 두통약이나 가벼운 안정제라도 가지고 오게 해서 먹고 있다. 의심받지 않을 정도로만 드문드문, 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잦았던 모양이다. 차라리 술이라도 마시고 잠들 수 있으면 좋겠건만 하필 또 내가 술을 못 마셨다.

클로든의 걱정 어린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아니,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지금이 좋은 기회다. 아예 수면제랑 안정제를 받으면 불안하고 무서울 틈도 없이 기절하듯 잠들 테니까. 아예 이참에 말해 버리자.

“요즘 기분이 안 좋아. 머리도 아프고. 별 이유는 없는데……. 잠도 못 자겠어.”

클로든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물었다.

“잠시 열을 재도 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든이 내 이마에 조심스레 손등을 얹은 순간 게이지가 파삭파삭 깎였다. 마탑주에게는 자가 치유 능력이 있다. 그런데 어디가 아프다는 말을 하다니, 전생에는 이래도 되나 싶어서 입도 벙끗 안 했을 것이다. 아직 클로든을 안 지 한 달도 채 안 되어 의심이 다 안 가시기도 했고.

“미열이 있습니다. 의사에게 진료를 받아보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클로든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마탑에도 의사가 있었다. 다른 사람 말고 나를 전담하는 의사. 자가 치유가 되는데 웬 의사인가 싶었지만, 가짜 탑주의(혹은 유리의) 자가 치유는 정신에서 비롯된 신체 증상은 회복시키지 못했다. 해서 의사가 있다. 지구식으로 말하자면 정신과 의사였다.

“그래, 그렇게 해.”

좋아. 불면증 문제를 털어놔 버리고 편해지는 거야. 불면증이 온 원인이야, 전혀 모르겠다고 하면 그만이고. 클로든이 몸을 일으키더니 밖으로 나가 시종에게 뭔가 전하고 돌아왔다. 그러곤 날 위로라도 하듯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레이안 경이 곧 돌아올 겁니다. 메세트에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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