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02. 실존하는 세계의 파편
마탑은 세상의 누구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보안은 황제와 황후, 황태자의 궁보다 삼엄하면 삼엄했지 덜하지 않았으며 내 경계 마법도 항상 작동하고 있었으니까.
이번에 다친 동물이 있는 곳은 미궁 밖이라 상대적으로 수비가 느슨한 편이었으나, 그래도 감히 누군가 침입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동물들이 다쳤다는 말을 들은 순간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어둠 속으로 사라지던 아테올의 뒷모습이었다. 지금 이 시기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테올이라면 마탑이라도 미궁 밖 정도는 충분히 침범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많이 다쳤어?”
“한 마리는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합니다.”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탑에서 키우는 동물이라고 하나, 실상은 클로든이 마탑 한쪽 구석에 두고 돌보는 녀석들에 가까웠다. 너구리 두 마리, 토끼 세 마리, 여우 한 마리. 마탑 옆에서 마력을 먹고 자라서인지 아주 장수했다. 내가 죽을 때까지도 살아 있었으니까.
……나도 6년 동안 정이 든 애들이라는 뜻이다.
“탑주님?”
“다친 동물들한테 가볼 거야. 작은 온실에 그대로 있어?”
“아니요, 다들 많이 놀란 것 같아서 안으로 들여놓았습니다.”
우기가 되면 클로든은 하루나 이틀쯤 지나 동물들을 전부 자기 방으로 들여놓곤 했다. 동물들의 보금자리는 탑 뒤쪽에 위치한 낮고 넓은 온실인데, 아무래도 내내 비가 오는 우기가 되면 걔들도 우울해하고 겁을 먹었다. 그게 불쌍하다고 한 마리씩 데리고 들어와서는 우기 내내 동물들과 같이 지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우기라서…….’ 하고 데리고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무심한 척 괜히 이런저런 핑계를 대곤 했다. 이번엔 핑곗거리를 생각할 여유도 없이 헐레벌떡 데리고 왔겠지만. 생긴 건 쌀쌀맞게 생겼으면서 정이 넘치는 사람이다.
후드를 눌러쓰고 동물들에게로 갔다. 치료 때문인지 동물들은 손님방에 있었고, 벌써 기본적인 치료는 끝난 듯 세 마리가 붕대를 감은 채 쿠션에 각각 누운 상태였다. 많이 아픈지 바들바들 떨고 있다.
그중에 너구리 한 마리는 정말…… 심상치 않았다. 떨지도 않고 축 늘어져 여린 숨만 색색 내쉬고 있는 게 당장에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나는 손을 들어 너구리 위에서 휙 휘둘렀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눈이 커졌다. 클로든조차 입을 벌렸다. 내 손 주변의 허공이 갑자기 빛을 반사한 각진 유리처럼 반짝거리고, 너구리가 움찔움찔 작은 몸을 떨었다. 이내 두툼한 꼬리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녀석이 동그란 머리통을 들고 발딱 일어나 나를 쳐다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탑주님.”
클로든이 놀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어, 혹시 사고 친 거 아냐? 재빨리 게이지를 확인했으나 다행히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이건 전생에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다. 하지만 전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었다면, 나는 이 동물들을 모르는 상태에서도 똑같은 행동을 했을 것 같다. 어차피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건 황실이 탑주를 황제와 같은 위치, 실상 황제도 접고 들어가는 존재로 모시는 이유 중 하나였다. 어떤 중상도 고칠 수 있는 치유 마법. 하지만 사용은 거의 하지 않았다. 1년에 한두 번이면 많은 정도고, 그것도 황제가 직접 와서 빌고 빌어야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한 번 해주었다.
치유 마법의 위험성은 익히 알려져 있다. 만약 치유 마법을 쉽게 사용한다면, 빈사의 중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각오하거나 각오하게 할 사람이 분명 나온다. 그것 때문에 마탑은 치유 마법의 사용을 제한했다. 또한 내가 치유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도 극비였다.
그걸 지금 너구리한테 사용한 거다.
뭐, 괜찮지 않을까. 너구리는…… 어디 가서 탑주님이 날 치유 마법으로 구해줬다고 떠들고 다니지도 않을 테고. 알려봐야 너구리 친구들한테나 알리겠지.
너구리는 나에게 급격한 호감을 느꼈는지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안길 기세다. 흥, 6년 내내 그렇게 데면데면했으면서 치료 한 번 해줬다고 이렇게 달라지나. 털 날리는 동물을 안는 건 사양이다. 너구리의 통통한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이는 걸 눈으로 좇다가 고개를 돌렸다.
“마탑의 동물이 다쳤다는 사실이 새어 나가선 안 되니까. 저 두 마리의 상태는?”
“금방 회복할 수 있는 정도라고 합니다.”
“어떻게 다친 거야?”
“……자상(刺傷)이었습니다.”
“더더욱 알려지면 안 되겠지.”
클로든이 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구리는 어느새 쿠션에서 뛰어내려 내 발목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한 걸음 물러나자 내 로브 자락을 붙잡고 늘어져 질질 끌려온다.
“……클로든.”
이름을 부르자 그가 마치 말썽 피우는 자식을 데려가듯 너구리를 안아 들었다. 너구리는 왜 자신이 나한테 올 수 없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물에 솜사탕을 씻었을 때랑 비슷한 표정이었다.
“일은 철저히 조사하겠습니다. 사실, 위병이 별것 아닌 일이라 생각하여 기록을 누락해 탑주님께 보고가 들어가지 않았으나…… 4황자 전하가 새벽에 탑을 찾아왔었다고 합니다.”
그렇지. 제일 먼저 의심을 받는다면 아테올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황자가 찾아온 기록을 누락했다고?”
“예……. 사전에 청을 올렸던 것도 아닌지라 또 묘한 일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위병에게는 큰 징계를 내리려 합니다.”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아테올이 무시당하는 황자인 건 정말 맞는 듯했다.
“내일 4황자를 불러. 수선화 정원으로.”
***
아테올과 나는 고상하게 차려진 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그는 여유로웠고, 나도 겉보기엔 여유로웠다. 털이 묻을 걸 각오하고 너구리를 품에 안은 채로. 이 너구리는 어쩌면 어제 아테올의 칼에 죽었을지도 모르는 녀석이었다. 나머지 한 마리는 내 발치에서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며 놀고 있다.
“마탑에서는 동물을 키워.”
“그렇군요.”
“그중에 너구리는 두 마리.”
“……그렇군요.”
보란 듯이 너구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테올의 눈치를 살폈다. 아테올은 너구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었다. 1. 뭐야? 2. 뭐야? 3. 뭐야……?
‘…….’
……아무래도 내 생각이 빗나간 것 같다. 멀쩡한 너구리 두 마리를 보고 아테올이 조금이라도 동요하거나 동요를 잘 감추고 태연하게 굴면 그를 향한 의심이 깊어졌을 텐데, 지금 그의 눈빛은 혼란 그 자체였다.
자신에게 너구리를 보여주는 이유가 뭐냐고 묻고 싶은 게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저게 미쳤나?’도 투명도 10% 정도로 보였다. 그리고 약간 흥미로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너구리는 내게 짧뚱하고 까만 손을 내밀며 안아달라고 보챘다. 뚱뚱한 꼬리가 내 팔을 퍽퍽 때렸다.
온실 창으로 쏟아지는 빗소리가 그나마 배경 음악처럼 우리 둘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달래주었다. 나는 동요를 감추며 너구리를 쓰다듬다가 말했다.
“이름은 레이, 로이.”
“……그렇군요.”
세 번째 ‘……그렇군요.’였다……. 한없이 ‘어쩌라고요.’로 들렸다. 눈썹을 까딱한 아테올이 내 품의 레이를 빤히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동물을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마탑에서 키우고 있는 걸 몰랐다고?”
“아뇨, 그건 알았지만 탑주께서 이 정도로 귀여워하신다는 건 처음 알아서요.”
음……. 몰랐다고 했으면 다시 의심의 끈을 잡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어젯밤 동물들을 습격한 건 아테올이 아닌 모양이다. 그는 지금 순수하게 내가 너구리를 쓰다듬고 있는 사실에만 놀라고 있으니까. 그 때 갑자기 상태창이 깜빡였다.
[이벤트 발생!]
아테올은 어제 차가운 비를 맞으며 돌아갔어요. 위로해 주면 어떨까요?
뭔 소리냐. 왜 찾아왔는지도 모르고, 애초에 문전 박대당할 걸 알고 있었을 텐데 굳이 온 자기 잘못 아냐? 게다가 지금 의심의 눈길을 받고 있는 것도…… 뜬금없이 찾아온 잘못이 조금은 있는 거 아냐?
괜히 화살을 아테올에게 돌려보던 나는 몰래 코를 찡긋했다. 사실 아테올은 별로 잘못한 게 없지. 갑자기 찾아온 이유는 모르겠지만, 4황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위병한테 쫓겨났고, 그 비를 다 맞으며 걸어서 자기 마차나 말이 있을 곳까지 돌아갔고, 지금은 너구리 살해 미수범으로 의심까지 받고.
생각해 보니 좀 미안한 것 같기도 했다.
“어젯밤에.”
아테올이 고개를 들었다.
“왜 찾아왔었어?”
빗소리가 어젯밤 창밖을 내다보며 들은 것과 겹쳐졌다. 그 먼 거리에서 본 아테올의 표정이 마치 가까이에서 본 것처럼 떠오르는 듯했다. 아테올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웃었다.
“갑자기 당신이 보고 싶어졌다고 하면 될까요.”
취소. 아테올 상대로 미안함을 느끼는 건 바보짓이다.
“나는 농담 별로 안 좋아해.”
“그렇습니까?”
“왜 찾아온 거냐니까.”
아테올은 어깨를 으쓱했다. 레이가 과자로 손을 뻗으려 해서 꽉 잡아 제지하는 사이, 그의 시선은 가만히 나를 향해 있었다. 마치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후드 아래로 슬쩍 그를 살폈다.
“사실, 완전히 농담은 아니었습니다.”
“……그럼 뭐야?”
“갑자기 당신을 만나야 할 것 같았던 건 정말이니까요.”
……호감도 올랐나? 아테올의 머리 위와 상태창을 번갈아 힐끔거렸지만 숫자는 22%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갑자기 나랑 풀밭을 뛰노는 꿈이라도 꾸고 내가 좀 좋아졌나 했는데 아무래도 허무맹랑하지.
“왜 그런 생각을 했어?”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이유로 그 새벽에, 그것도 비가 오는데 나를 찾아왔다고?”
“네.”
“왜?”
“글쎄요.”
그가 테이블에 두 팔을 올리더니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웃었다.
“사랑의 시작이라면 그럴 수도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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