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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13화 (13/93)

13화

01.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법은

내가 할 일은 꽃을 뿌리고 축복하는 게 전부였으므로 그 후 얼렁뚱땅 발코니에서 내려왔다. 그러고 보니 나처럼 음침한 사람한테 축복받으면 좋나……. 뭐, 꽃에 준 사람 이름이 쓰여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줬든 다들 즐거워하니 됐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한 뒤 아테올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까는 기억을 잃은 사람으론 보이지 않던데요. 매년 똑같이 하는 행사라, 주위에서 특별히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지 않았습니까?”

“책에서 읽었어.”

전생에는. 클로든이 내게 새로 만든 옷을 입혀보면서 ‘언제나와 같이 잘 해내실 테니…….’라고만 했던지라 도저히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서고를 뒤졌다. 일련의 과정을 설명한 책자로는 부족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탑의 서고에는 당연히 탑주를 찬양하는 내용이 많았고, 오늘 이 행사에 대해서는 아예 거대한 그림책이 따로 있었다. 거의 신문만큼 큰 책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니 거의 화보집이었다. 발코니에 올라가는 장면부터 수행하는 황족의 이마에 입맞춤하는 장면까지, 전부 색칠마저 완벽했다.

좀 오래된 책도 한 권 꺼내서 봤는데, 어느 해나 탑주는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였다. 음침함이 마탑주의 트레이드마크인가 싶을 정도였다. 책에서 읽었다는 내 말을 아테올은 잠시 고민하더니 납득했다.

사실 그는 ‘절박해 보여서’ 자신을 선택했다는 내 말을 아직 완전히 믿지 않는 듯했다. 기억을 잃고 황궁이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뒤 내 눈에 가장 절박해 보이는 4황자를 선택해 도움을 청했다. 언뜻 말이 되지만 깊이 생각하면 의문이 들 수 있다. 사실 그때는 진짜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한 말이기 때문에……, 말하는 동안엔 내가 진짜 천재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되새기니 의심받을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무엇보다 4황자가 제위에 관심이 있어야 절박해질 것 아닌가. 나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인데. ‘어떻게 알았어요?’ ‘나 정도 되면 그쯤은 알 수 있어.’ 뭐 이따위 변명으로 끝낼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그가 반란을 준비하고 있는 증거를 찾아볼까 했는데, 그랬다간 호감은 고사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암살해 낼 것 같았다. 아니면 엄청난 힘을 발휘하여 6년 빠르게 진짜 유리를 데리고 온다거나.

“아테올.”

하여, 전략을 바꿔보기로 했다.

“네.”

“사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믿을 수 없었어.”

“…….”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를 상황에 네가 눈에 띈 거야.”

아테올이 고개를 슬쩍 옆으로 기울이며 나를 보았다. 제법 방자한 태도였다.

“기억을 잃고 주변에 대해 조사도 많이 하셨겠지요.”

“그래.”

“그럼 당연히 아셨을 게 아닙니까, 제가 망나니라는 걸. 무도회 날도 잘 아는 눈치셨고. 몰랐어도 피 묻은 늑대 머리를 들고 황제 앞에 나타난 꼴이 누가 봐도 미친놈이었을 텐데.”

“…….”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때의 피 냄새가 다시 떠오르는 것 같아 몸을 움츠리는데 체온이 훅 가까워졌다. 아테올이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내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한쪽 무릎을 내가 앉은 의자에 대고 있어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깝다. 그가 뿌린 향수 냄새가 훅 밀려왔다. 장미 향이 조금 섞인 어른스러운 향기였는데, 향 자체는 청초한데도 야성적인 아테올에게 잘 어울렸다.

“왜 하필 저였는지.”

“좀 떨어져…….”

“그것만 대답해 주신다면 정말로, 다시는 당신을 의심하지 않고 따르죠.”

“이미 지켜주겠다고 맹세했잖아!”

발끈해서 소리치자 아테올은 잘생긴 눈썹을 늘어뜨리며 안타깝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맹세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도 잊어버리셨습니까?”

정말 속을 알 수 없다. 아니, 일부러 알 수 없게 행동하는 거겠지. 이 인간도 나를 계속해서 의심하며 알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가짜 탑주는 책을 몇 줄 읽은 것만으로 내용을 다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명민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지능은 내 머리 회전에는 선택적으로만 도움을 주는 것 같았다. 지금 도대체 무슨 말로 아테올을 설득해야 이 인간이 홀라당 넘어올지 감도 안 잡힌다.

그러다 번뜩 무언가가 머리를 스쳤다. 호감도! 호감도가 낮아서 내가 무슨 말을 하건 아테올이 꿈쩍도 안 하는 거 아닐까? 지금 고작 22%다. 어떤 사람이 내게 다가왔는데 그 사람을 향한 호감도가 수치로 따지면 22% 정도라고 했을 때, 그 사람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콩 심은 데 콩 난다고 하면 믿겠지만, 딸기로 메주를 쑨다고 하면 개소리한다고 생각하겠지?

즉 아테올은 지금 내가 개소리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를 믿게 하려면 호감도를 더 올려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신체 접촉? 여기서 이마에 뽀뽀라도 또 하라고? 말도 안 된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하지만 호감도를 올리지 않으면 뭣도 안 된다. 고민한 끝에 내 입에서 간신히 나온 말은 이랬다.

“시, 시간이 지나면…… 너도 내 마음을 알게 될 거야.”

“흠.”

아테올이 뜻 모를 소리를 내며 날 좀 더 바라보다가 물러났다. 그때까지 내 심장은 쿵쿵거리며 뛰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호감도가 올라갈 거고, 호감도가 많이 오르면 그때는 내가 ‘자, 지금부터 이 금붙이를 철로 바꾸는 연금술을 해볼 거야!’ 같은 말을 해도 믿겠지. 그 정도는 믿어줘야 목숨을 내맡길 수…….

‘……응? 뭐야, 아니잖아.’

아차. 내가 잠시 착각했다. 목숨을 내맡긴 건 나지 아테올이 아니었다. 아테올이 들어줄 조건은 그냥 내 지지를 받고, 끝까지 내 목숨을 보전해 주는 거였다. 아테올로서는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인 거다. 근데 대체 왜 저렇게 빡빡하게 구는 거야.

“너한테는…… 밑질 거 없는 일이잖아. 그런데 왜 재, 의뭉스럽게 굴어?”

순간 재수 없게 군다는 말이 튀어 나갈 뻔했다. 의뭉스럽다는 것도 충분히 기분 나쁠 말이긴 하지만 재수 없다보다는 낫지.

“밑질 거 없는 일일수록 위험한 법이지 않습니까.”

하긴, 공짜만큼 비싼 건 없다고 하는데……. 근데 그게 내 말에 대한 대답인가? 묘하게 어긋나지 않았어? 지그시 쳐다보자 아테올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이 생각하시는 이유가 맞습니다. 어디까지 참아주실지, 그걸 시험하고 있는 거죠.”

“…….”

역시 재수 없다. 어디까지 참아주느냐고? 네가 날 죽이지만 않으면 다 참지. 근데 ‘■■지 ■은데’가 뭘까. 상태창이 흐름이 괜찮다고 한 걸 보면 부정적인 말은 아닐 거다. 아까 가까이 있을 때 미친 척하고 뽀뽀 한번 해볼 걸 그랬나. 그래서 호감도가 급상승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심란했겠지만.

“없어.”

“없다고요?”

“‘어디까지’ 같은 건 없어. 목숨이 달린 이상 내가 을이고 네가 갑이야.”

“으르……, 값? 그게 뭡니까? 마법 용어예요?”

“네가 내 위에 있다는 뜻이야.”

갑을이란 용어가 없나? 빙의한 후부터 계속 적용되는 듯한 자동 번역 시스템이 그에 해당하는 말까지는 못 찾아낸 모양이다. 나중에 어디 계약서 같은 거라도 훔쳐봐야겠다. 아테올의 입에서 나온 ‘을’과 ‘갑’이라는 발음은 좀 웃겼다.

“아무튼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알려드리지요. 제가 가장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당신의 태도입니다.”

“태도? 내 태도가 왜? 나는 충분히 저자세야.”

“……네. 그래서요. 왜 그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십니까?”

대접을 해줘도 난리야?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자 아테올은 자기가 더 황당하다는 듯 픽 웃었다.

“당신은 꼭, 내 도움으로 위험을 피하고 싶은 게 아니라…… 내가 위험의 주체인 것처럼 굴고 있습니다.”

***

나는 비가 쏟아지는 소리에 깨어났다. 우기의 시작을 알리는 빗방울은 지붕을 톡톡 때리는 듯 떨어지다가 곧 장대비로 바뀌었다. 창밖을 내다보자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다.

높은 탑에서는 구름이 가까이 보였고, 지면으로 떨어지는 비가 아득했다. 내 방에서는 탑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이 내려다보였다. 높은 곳에서 보아도 색색이 선명하도록 꾸며진 정원이다.

세르타가 정원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고 했는데, 전생에나 지금이나 여전히 뭐가 어떻게 바뀐 건지 모른다. 정원은 마음에 드시냐는 질문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기왕 회귀할 거 며칠만 더 전으로 갔으면 바뀌기 전 정원이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있었을 텐데.

어두운 탓에 정원 바깥으로 탑을 빙 두른 꼭 강물처럼 보였다. 작은 주홍색 등불을 띄워 놓은 강물. 저건 여기서 보면 아름답지만, 실은 허락 없이 들어온 사람을 교란해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불빛이었다.

비와 함께 번지는 빛무리를 보고 있는데, 미궁 입구 근처에 작은 점 하나가 오락가락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사람이었다. 그것도 내가 아는 사람. 우산도 없어서 금발이 고스란히 보였기에 알 수 있었다. 아테올이다.

아테올이 이런 시간에 여긴 왜?

그는 미궁 입구의 위병들(매우 형식적인 존재들이다)에게 뭔가 한참 말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발길을 돌렸다. 이 높이에서도 그 행동이 보인다는 게 실로 놀라웠다. 쏟아지는 빗속을 아테올은 저벅저벅 걸어서 가로질렀다. 황궁의 중요한 몇몇 곳과 마찬가지로, 이 근처엔 마차도 말도 허락된 사람만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신기하게도 이 폭우를 맞으며 걸어가는데 그는 처량하거나 불쌍해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그런 말에서 가장 멀리 있는 사람 같고, 평소와 똑같이 당당했다. 그저 춥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걱정? 내가 4황자를 왜 걱정해? 아무튼, 그랬다. 그래도 우산이든 우의든 가지고 오지. 나는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음 날 늦은 오전에 눈을 떴을 때, 마탑은 발칵 뒤집힌 듯 소란스러웠다. 내 방에서도 기척이 느껴질 정도였으니 범상치 않은 일 같았다. 음, 이런 일이 있었던가? 첫날이나 몇몇 굵직한 사건은 다 기억이 난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씻고 나서 잠옷 위에 로브만 걸치고 앉아 있자 곧 클로든이 들어왔다.

“탑주님께 보고드립니다.”

“……무슨 일 있어?”

“마탑에서 기르던 동물 몇 마리가 다쳤습니다.”

세상에. 정말 범상치 않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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