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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12화 (12/93)

12화

01.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법은

재빨리 눈을 돌렸으나 아테올의 시선은 스르르 나를 따라왔다. 후드를 더 깊게 눌러쓰고 머리카락도 앞으로 늘어뜨리자, 그제야 그가 자세를 바로 한다. 한순간이나마 마주쳤던 눈동자는 여전히 새빨갰다. 몸이 얼어붙는 것 같고 등줄기가 바르르 떨렸다. 그 짧은 시간에 느낀 긴장으로 손이 축축했다.

그 후로 축제가 열리는 장소까지는 둘 다 아무런 말도 없이 갔다. 마차의 덜컹거림만이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마탑에서 축제가 열리는 광장의 거대한 발코니까지는 마차를 느리게 달려서 30분쯤. 그 30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 없었다. 1초가 한 시간 같다는 의미에서 내내 플랭크라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정신적으로는 거의 그만큼 지쳤다.

앞으로 아테올이랑 있을 일이 수도 없이 많을 텐데 벌써부터 이래서야……. 아테올이 조금만 호락호락한 성격이었어도 이러진 않았을, 흠. 그건 아닌가. 어차피 난 아테올 본인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거니까.

“도착했습니다, 탑주님.”

나지막한 아테올의 목소리에 나는 눈에 띄게 움찔했다. 누가 보면 죄라도 지은 줄 알겠다. 원래 때린 놈이 발 뻗고 못 자는 법이라는데 다 거짓말이다. 뭐, 아테올이 원해서 기억을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문이 바깥에서 열렸다. 기사단 정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세르타가 옆으로 비켜서 서 있고, 그 곁으로 호위 기사단 단원들이 길게 도열한 게 보였다. 아테올은 소리도 내지 않고 바닥으로 내려섰다. 그 모습만 보면 마차가 지상에서 고작 한 뼘이나 두 뼘 떨어진 정도로 보이지만, 사실 그냥 뛰어내렸다간 발목을 다칠 수 있을 정도로 높았다.

아테올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자 자연스럽게 그에게로 온 체중이 실렸다. 그대로 바닥에 내려서니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세르타를 흘끗 보았다. 그가 도와줄 때보다 오히려 안정적이어서 놀라울 정도였다.

덕분에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고 바닥에 내려선 뒤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후드를 눌러쓰고 앞이 보이긴 하는지 누군가 물은 적이 있는데, 사실 요령만 있으면 다 보인다.

광장 중심부에 자리 잡은 성당 모양의 큰 건물은 황족이 나와서 인사나 중요한 발표를 할 때, 혹은 내가 사람들 앞에 나설 때 사용하는 곳이었다. 광장 쪽으로는 발코니와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창문만 보이고, 입구로 가는 길과 정원은 황궁처럼 봉쇄되어 있다.

높은 건물에 가로막혀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소리는 선명하게 들렸다. 웅성거리고, 벌써부터 환호하고, 웃고 떠드는. 나는 내가 발코니에 나가는 순간 그 분위기가 어떻게 바뀌어버릴지 잘 안다. 후드를 조금 더 깊이 내리며 아테올의 손을 잡고 깨끗한 대리석 길을 걸었다. 양쪽 옆으로 섬세한 모양의 하얀 꽃이 피어 있었다. 이름은 열 번째 달의 이름을 딴 히스체.

저 꽃을 기억하는 이유는, 이 소설의 자잘하면서도 수없이 많은 설정 오류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원래 저 꽃은 건기와 우기가 이어지는 실로니의 달에 짧게 피었다가 져버린다. 하지만 꽃의 개화 시기 따위와 같은 사소한 설정에 별 관심이 없었던 작가 탓에 소설에선 한겨울에도 피고, 봄에도 피고, 여름에도 피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히스체의 가냘픈 꽃잎이 흔들렸다’라거나 ‘여름의 폭우로 하얀 꽃은 푹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같은 표현이 여러 번 나왔지만, 나 말고 딱히 신경 쓰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애초에 이 소설이 조회수가 그렇게 높은 것도 아니었으니…….

아무튼 실제로 본 히스체는 정말 잠깐 피고 져버렸다. 이번 달에 비가 내리면 처량하게 젖어들며 툭툭 떨어져, 달이 바뀌면 매끈한 잎사귀만 남을 것이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발코니를 향해 양쪽으로 둥글게 뻗어 올라간 화려한 계단과 한 칸 한 칸 그림이 들어간 대리석 바닥이 보였다. 사진으로나 보던 유럽의 대성당과 비슷했다. 여행에 별 관심이 없는 편인데도 유럽 성당은 이상할 정도로 가고 싶어서 매일 사진만 들여다봤었는데. 형편이 안 돼서 못 가다가 죽고 말았지만 여기 와서 질릴 정도로 보고 있으니 다행이다. 환생 트럭 만세였다.

계단 첫 번째 칸을 밟자 어느새 가장 위에 도착해 있었다. 다채로운 색상의 색유리로 둥그렇게 둘러싸인 회색 벽과 끝이 뾰족한 돔 형태의 천장, 갖가지 모양이 조각된 긴 기둥.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문득 감회가 새로워서 한 행동이었지만, 어쨌거나 전생과 완전히 일치한 행동이었기에 게이지가 올랐다. 좀 보람 있군.

발코니로 이어지는 문을 지키고 서 있던 기사 둘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아테올이 물었다.

“문을 열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헉. 그러고 보니 여태 손을 잡고 있었다. 슬그머니 빼내자 아테올은 씩 웃기만 하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래도 내 수행을 맡고 있기에 내게서 가깝다. 그보다 몇 걸음 더 떨어져서 세르타와 기사단원들이 서 있었다.

발코니를 열면 광장 가득 모인 사람들이 보이겠지. 짧게 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테올이 문 양옆의 기사에게 손짓하자, 그들이 황금으로 된 문고리를 붙잡고 천천히 당겨 열었다. 두꺼운 문에 막혀 있던 소란이 형태가 있는 것처럼 와락 밀려들었다.

“탑주님이다!”

그 소란 사이에서 선명한 한마디가 귀에 꽂혔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황제, 황후나 황태자를 맞이할 때처럼 선망만으로 가득하진 않았다. 아테올을 대동한 채로 천천히 발코니에 나갔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한순간 광장에는 정적이 흘렀다.

익숙했다. 처음엔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서 당황했었지만, 이들은 그냥 내가 두려울 뿐이다.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후드로 얼굴을 가린 음침한 마법사가. 사실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보면 나도 똑같을 것 같다. 우리 편이라고는 하는데 그게 언제까지고 보장된 것도 아니니…….

그래서 오늘처럼 할 일이 명확하게 있는 날이 아니라면 사람들 앞에 잘 나서지 않는다. 어차피 날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알아서 찾아오니까. 나는 한쪽 손을 슥 들어 올렸다. 한참 아래에 있는데도 사람들의 표정이 명확히 보였다. 내가 손을 든 순간 일제히 움찔거리는 것까지.

높게 뻗은 내 손가락 끝에 허공에서 공기가 부풀듯 생겨난 작은 꽃잎이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그걸 시작으로 옅은 빛의 꽃송이가 막 내리기 시작한 이슬비처럼 소록소록 땅을 향해 내려왔다. 구름이 없는 곳에서 내리는 비, 토양이 없는 곳에서 피어난 꽃이다. 이제 내일부터 열흘 동안 대륙의 북반구 전체에 우기가 이어진다.

신의 항아리에서 흘러나온 빗물은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주지만, 열흘 내내 비가 내리면 아무래도 사람의 마음은 우울해지는 법이다. 그래서 우기가 시작되기 하루 전, 탑주가 이곳에 나와서 꽃비를 내려준다. 사람들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꽃을 가지고 돌아가 집에 장식했다. 빗속에서도 집 안을 밝게 해주는 태양이란 의미를 담아.

이걸 비롯해 탑주가 나서는 행사의 유래가 뭔지, 언제부터 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이것 역시 이 소설의 설정 구멍이었다. 그냥 무작정 탑주가 뭘 했다, 탑주가 나서는 일이었다, 그렇게만 설명되는 게 다였으니까.

빙의한 뒤 궁금해서 찾아보긴 했으나, 어떤 책을 보아도 그 많은 기록에 탑주에 대해서는 몇 대째라든가, 초대가 누구였다든가, 내 바로 전은 어떤 사람이었다든가, 그런 말 없이 그저 ‘탑주가 무엇을 했다’라고만 서술될 뿐이었다. 개개인의 개성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다. 아마 설정하기 귀찮았던 거겠지.

원작의 설정 오류나 구멍은 내가 실제로 생활하면서 메워지는 부분도 있었고 아닌 부분도 있었다. 반반 정도랄까.

“탑주님.”

멍하니 생각하는데 낮은 목소리가 나를 방해했다. 아테올이었다. 그제야 꽃을 다른 때보다 너무 오래 뿌리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손을 내렸다. 발코니 아래 사람들은 모두 품에 한가득 꽃송이를 안고 있었다.

꽃비가 잦아들고 소란도 어느 정도 가라앉자, 그들의 시선은 내 가까이 서 있던 아테올에게 향했다.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그는 황족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편이었지만 이런 자리에 잘 나오는 편은 아니었다. 나를 먼저 보고 내 옆에 있는 게 당연히 황태자일 거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이제야 깜짝 놀란 듯했다. 날 보고 마냥 굳어 있기만 하던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소리를 뒤로하고 아테올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테올이 내 앞에 무릎 꿇었다.

“제국을 대신하여 탑주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두 손으로 내 손을 쥔 아테올이 손등에 이마를 살짝 댔다가 떼고는 손등과 손가락 끝에 입을 맞췄다. 그때까지도 웅성대던 사람들은 내가 그 손을 거두고 허리를 굽혀 아테올의 이마에 키스하자 그제야 환호했다. 이마에 하는 키스는 물론 축복의 의미였다. 제국을 대신해서 감사 인사를 한 그를 내가 축복함으로써 제국 전체를 축복하는…… 그런데…….

[호감도: 아테올]

+10

22%

아테올은 당신을 ‘■■지 ■은데’라고 생각합니다.

흐름이 제법 괜찮은데요?

“…….”

“탑주님?”

아테올의 머리 위에 22%라는 숫자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걸고넘어질 게 많았다. 왜 여태 꼼짝도 안 하다가 이마에 키스하니까 호감도가 올라가는가. 그리고 알려줄 거면 제대로 알려주지 저 까만 네모 칸은 도대체 뭐냐. 상태창 이 ■발 새■야.

내 머릿속에서 정말 알 수 없는 놈으로만 분류되어 있던 아테올은 한순간에 이마에 뽀뽀했더니 호감도 올라간 놈으로 전락했다. 이놈 은근히 파렴치한…… 잠깐. 상태창이 준 팁.

……거기서 그랬지. 신체 접촉이 호감도를 빨리 올릴 수 있는 방법이라고.

파렴치한 건 아테올이 아니라(아테올도 당연히 그렇긴 하지만) 내 상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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