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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11화 (11/93)
  • 11화

    01.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법은

    가짜 탑주와 아테올의 진짜 관계가 궁금했다. 대답을 해줄지 모르겠지만. 역시나 아테올은 팔짱을 풀어 한쪽 손을 자기 허리에 올리면서 웃기만 했다.

    “무슨 사이였다고 말하면, 거기에 맞춰줄 겁니까?”

    “아니.”

    농담과 놀림이 분명한 어조에 나도 기분이 상해 삐딱하게 대답했다. 아테올은 그저 재미있어 보인다.

    “내가 알 바 아니잖아, 내 일도 아닌데.”

    “어떻게 당신 일이 아니에요?”

    “아무것도 기억 안 난다니까. 네가 뭘 알고 있는지 몰라도, 그건 기억을 잃기 전 이 몸의 주인이 했던 일이야.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어.”

    한 점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었다. ‘이 몸의 주인’이 했던 일이 맞으니까. 빙의해 버린 이상 가짜 탑주가 했던 일은 다 내가 한 일이 되는 게 맞지만 상관하고 싶지 않은 것도 진짜고.

    “말씀을 특이하게 하시는군요. 기억을 잃기 전의 탑주님도 탑주님이시지요.”

    “……기억이 없는 이상 그건 내가 아니야.”

    아니다. 그건 가짜 탑주였다. 나는 가짜의 가짜다.

    “그렇게 나오다가, 기억이 돌아왔을 때 어떻게 감당하려고요?”

    “그, 그건…… 기억이 돌아왔을 때 일이지. 원래 기억을 못 할 정도의 심신 상실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는 감형이라고.”

    아테올이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헉, 이 세계의 법전을 본 적이 없긴 한데, 설마 그런 법 없나? 심신 미약, 심신 상실 같은 거? 오늘부터는 법전도 좀 봐야겠다. 한국이나 지구랑 다른 법이 엄청 많을 수도 있을 것 아냐.

    “그런 법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왜……, 왜 없어? 사람이 정신이 나갔을 때 한 일은 좀, 봐주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말도 안 되죠. 그러면 술 마시고 기억이 안 나서 그랬다고 해도 봐줘야 하지 않습니까.”

    “…….”

    그게…… 한국에서는 감형 기준이긴 한데 말도 안 되긴 하지……. 근데 또 법이라는 게 복잡해서, 관두자. 여기엔 그런 법이 없는 모양인데 설명해 봐야 나만 미친놈 되고 아테올에게 이상한 시선을 받을 거다. 괜한 관심 끌어서 좋을 게 없다.

    “뭐, 어쨌든. 우리 사이는 비밀입니다.”

    아테올은 한쪽 눈을 찡긋하며 그렇게 말했다. 의미와 여운이 듬뿍 담긴 말투였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잖아, 그때!”

    정확히는 찌꺼기 황자 나부랭이와 무슨 관계가 있었겠느냐고 했지. 그가 내 쪽으로 슥 고개를 들이밀면서 웃더니.

    “네. 어느 쪽일까요?”

    깝죽거렸다.

    진짜 깝죽거렸다는 말로밖엔 표현이 안 되었다.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서 한숨을 푹 쉬고는 그에게서 한 발 물러났다. 올려다봐야 하는 각도가 조금 낮아진다.

    “됐어, 돌아가. ……왜 온 거야?”

    “그야 물론 권력의 맛을 보게 해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요. 알현을 허락받지 못했지만 이렇게 만나 뵈었으니 다행입니다.”

    “…….”

    결국 나는 그를 쫓아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그는 다른 말 없이 순순히 돌아갔다. 이미 할 말을 다 해서 그런 건지 몰라도. 아니, 분명 할 말을 다 하고 속이 시원해져서 얌전하게 돌아간 거다.

    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우려다 가만히 있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내 발길이 향한 곳은 기사들이 훈련을 하는 연무장이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내가 별안간 나타나자 연무장 전체가 동요로 뒤흔들렸다. 그들의 훈련을 지휘하던 세르타가 칼을 바닥에 쾅 내리찍은 후에야 소란은 가라앉았다.

    “죄송합니다, 탑주님. 아무래도 기사들의 기강이 많이 해이해진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런 건 됐고……. 물어볼 게 있는데.”

    정말 기사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상관없는데 그들을 둘러보는 세르타의 눈이 차가웠다. 내가 돌아간 뒤에 험난한 시간 좀 보내겠구나. 괜히 미안해졌다.

    물어볼 게 있다는 말에 세르타는 가까이 있던 기사들을 모두 물리고 조용한 회랑 안쪽으로 날 이끌었다. 회랑 입구에 서서 힐끔 기사들을 본 뒤에야 나도 입을 열었다.

    “저기, 내가 4황자랑…… 특별히 가까이 지내거나 했어?”

    “예?”

    세르타의 레몬색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빤히 관찰했으나, 그건 순수한 의문만 담긴 눈이었다.

    “글쎄요. 제가 알기로 큰 교류는 없으셨습니다.”

    “정말?”

    그러자 세르타는 정말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네. 제가 언제 당신께 거짓을 말하던가요.”

    아…… 그렇게까지 돈독한 사이였어? 눈이 진심이다. 충성심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음, 6년 동안 그걸 모른 나도 나였다. 마지막에 그냥 나를 좀 동정해 준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간의 정이 또 있었던 걸지도. 한층 씁쓸해지는군.

    “탑주님.”

    “어?”

    세르타가 나지막해진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흠칫 놀라 올려다보자 그는 진지하게 물었다.

    “4황자가 알현을 거절당했지만, 정원에 나가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 아니지요?”

    “아무 일 없었어.”

    좀 풀이 죽은 거 빼면. 세르타는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 말했다.

    “탑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

    음, 이렇게 말할 정도로 나랑 아테올 사이에는 교류가 없었던 모양이다. 지금 이 말은 ‘왜 갑자기 4황자한테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해라.’가 아닌가. 비밀스러운 사이였다 해도 세르타와 클로든 정도는 알고 있을 법도 한데, 정말 아닌 거다.

    어째 어색해진 기분으로 세르타와 헤어져 방으로 오자 클로든이 있었다. 그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클로든도 아테올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 듯했다.

    클로든이 말없이 준비해 준 간식을 먹고 잠시 누워 있자 체력이 회복되었다. 그대로 쉬고 싶었는데 체력 수치가 7, 8, 늘어나는 걸 보자 몇 년 전에 죽은 내 노예근성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좀 돌아다녀 봐야 할 것 같다. 아테올이랑 내 관계가 어땠는지.

    지난번에 호감도를 알아볼 때 그랬던 것처럼 탑 여기저기를 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었다. 호감도와 달리 나하고 어느 정도 가까운 사람이 더 잘 알 것이었기에 전보다는 수월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얻은 건 꽤 많은 양이 깎여 나간 게이지뿐이었다.

    처참한 60%대의 게이지와 다시 5까지 떨어진 체력에 몸이 축축 늘어졌다. 한숨을 내쉬며 발끝까지 가리는 로브를 벗고, 씻고 편안하게 누웠다. 그제야 게이지가 다시 찔끔거리면서 차기 시작했다.

    ‘흠…….’

    누워서 발끝을 까딱거리며 생각했다. 측근들이 다 아무것도 모르는 걸 보면, 정말 4황자는 가짜 탑주와 아무 사이도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설마 한밤중에 담장을 넘어와서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다가 순례자님 어쩌고 하며 열렬히 키스하는 사이는 아니었을 것 아냐.

    애초에 캐퓰렛가의 담장과 달리 마탑은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다. 지상에서 가장 높다고 하는 까마득한 탑,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영원히 헤매게 되는 미궁, 수많은 마법 장치와 그보다 많은 수호 기사와 병사들, 게다가 내 방 발코니 앞에는 무릎 꿇을 공간도 없다. 허공이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테올이 나를 놀리고 있는 게 맞다. 상태창을 확인했다. 아까 따로 알림이 뜨는 것 같진 않았는데 호감도가 약간 올라 있었다. 게다가 호감도 숫자 옆에 눈을 사로잡는 문구가 보였다.

    [호감도를 빨리 올릴 수 있는 tip!]

    이런 게 있으면 진작 알려줬어야지?! 아니, 6년 동안 안 보였던 상태창한테 뭘 바라냐. 재빨리 글자를 손으로 눌렀다. 상태창이 요란하게 반짝거리더니 팝업창이 하나 떠올랐다.

    아무래도 몸이 가까워지면 마음도 가까워지기 마련이죠. 신체 접촉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

    돌았군…….

    미연시인 걸로도 모자라 19금이었다.

    ***

    침대에 누워만 있으면서 이틀을 보냈다. 축제 진행 과정은 익숙했지만, 예의상 일련의 과정을 정리한 책자를 한 번 보았다. 그렇게 찾아온 축제 당일. 아테올은 이른 아침부터 탑 앞으로 나를 마중하러 왔다.

    그가 마차를 등지고 서며 나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치장한 채였는데…….

    ‘어…….’

    심지어 멈춰 서는 결에 로브가 발끝에 걸려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양쪽 옆으로 클로든과 세르타가 있지 않았다면 분명 자빠졌을 거다. 민망함에 흠, 헛기침을 하고 아무 일 없었던 척 똑바로 섰다.

    이렇게까지 동요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요를 안 하기에는 아테올의 비주얼이 지나치게 놀라웠다. 그의 얼굴에는 이제 그나마 익숙해졌으나, 이렇게 마음먹고 꾸민 상태는 한 번도 본 적 없으니까.

    그는 남청색의 황실 제복에 몇 차례 나간 전쟁에서 형식상 얻은 훈장을 달고 있었다. 그러나 훈장 하나하나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내게는 화려하게만 보였다. 금사와 은사로 장식한 황족의 제복에, 제복과 색을 맞춘 푸른빛이 도는 회색 망토. 검은색 구두. 완전히 뒤로 넘긴 금빛 머리카락.

    솔직히 말해서 6년 전 오늘, 훨씬 화려한 훈장에 같은 옷을 입고 나를 마중 왔던 황태자 칼레우스보다 더 황태자 같았다. 아니, 제국의 젊은 황제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는 우아하게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공손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손을, 고귀한 분이시여.”

    나는 조금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내 손등에 입 맞춘 아테올이 손을 잡은 채로 천천히 일어났다. 손등과 손이 간질간질했다. 클로든이 마차 문을 열었다. 나는 아테올의 손에 의지하며 바로 올라탔다. 자리에 앉아 후드 끝을 공연히 만지작거리고 있었더니 나를 따라 탄 아테올이 망토를 정돈하며 자기 자리에 앉았다.

    “…….”

    ……괜히 고개를 들었다가 후드 아래에서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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