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01.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법은
잠시 멍하니 있던 그들은 그래도 금방 정신을 차렸다. 황후가 당황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내 쪽으로 몸까지 내밀었다. 평소 차분한 황후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혹여 제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4황자에게 축일의 수행을 맡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현실을 부정하듯 서로 마주 본 뒤, 이번엔 황제가 말했다. 이쪽은 비교적 침착한 태도였다.
“황실로서는 영광이지만,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태자가 수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황태자가 모시는 편이 탑주님의 격에도 맞을 텐데…….”
내키지 않아 할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격을 따진다면 황태자가 수행하는 편이 낫긴 한데, 사실 황자나 그에 준하는 지위라면 누구든 내게는 똑같았다. 오히려 같은 아들인데 이렇게까지 반응 차이를 보인다는 게 나는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다.
“황족의 수행을 받는 것만으로 충분한 영광입니다. 늘 그랬듯이.”
그러자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여타 사람들처럼 대놓고 서로 눈길을 주고받거나 하진 않았지만, 내 속내를 알 수 없어 불안해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마난의 날처럼 큰 축제에서 나를 수행하는 건 영광이다. 그 자리에 내놓은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던 4황자가 덜컥 들어간다니 당황할 법도 하지. 황태자는 황제에게는 맏아들, 황후에게는 친아들이다.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꺼릴 일인가. 눈 밖에 났다고 해도 아테올 역시 황제의 아들인데. 황후야, 자기 자식이 아니니까 그렇다 쳐도.
말을 고르는 듯하던 황제가 조심스레 물었다.
“탑주님, 재고의 여지는 없으신지요?”
“재고까지 할 일인가요. 축제의 수행일 뿐인데요.”
챙그랑 소리를 배경으로 슬쩍 웃으며 말하자 황제 부부의 얼굴이 약간 하얘졌다. 내 음산한 웃음은 주위 분위기를 차게 식히는 효과가 있었다. 둘 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기색이었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끝까지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하는데.
“그럼, 그리하는 것으로……. 4황자가 무척 영광스럽게 생각할 겁니다.”
“저희 또한.”
“저야말로 영광이지요.”
이렇게 축제의 수행은 4황자가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황제 부부는 그 후로 별다른 맥락도, 영양가도 없는 사담을 좀 나누다가 조용히 돌아갔다. 내가 게이지가 하도 많이 날아가서 더 깎이는 걸 피하려고 끄덕이거나 웃거나 하는 걸로만 대답을 대신했기에 어색한 분위기는 풀어지지 않은 채였다.
손님들이 돌아가자 어깨의 힘이 풀렸다. 체력이 8로 떨어져 있었고 몸이 무거웠다. 게이지도 70% 정도밖에 안 된다. 한숨 돌릴까 싶어서 수선화 정원 안쪽의 휴식 공간으로 들어가려 하자, 또 게이지가 챙그랑거리며 나를 방해했다. 어휴, 그래. 이맘땐 안에 나 혼자 누워서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 따윈 몰랐으니까.
햇볕이 기분 좋게 쏟아지고 수선화에 둘러싸인 안락한 공간이 눈에 밟혔으나 어쩔 수 없이 돌아섰다. 세르타가 나를 수행해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클로든이 다가와 물었다. 고개만 젓고 곧바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잠이 오는 건 아니었다. 눈만 감고 있는 것도 힘드니까. 누워서 그냥 멍하니 있는데 갑자기 상태창이 깜빡거렸다.
[퀘스트 발생!]
정원을 산책하는 건 어떨까요?
<수락>
<거절>
퀘스트……? 웬 퀘스트. 지금은 피곤해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거절 버튼을 누르자 마치 윈도우 경고창처럼 곧바로 다시 창이 부활했다.
[퀘스트 발생!]
노을이 지는 정원은 각별히 아름답습니다. 정원을 산책하는 건 어떨까요?
.˚ * ⊹ • <수락>• ⊹ * ˚.
<거절>
“……미친…….”
이번에는 수락이라는 글자가 마치 바이러스 프로그램의 설치 버튼처럼 요란하게 번쩍거리며 누르기를 유도하고 있었다. 답은 수락으로 정해져 있다. 혹시나 싶어서 다시 한번 거절을 누르자, 곧바로 창이 다시 뜨며 수락 버튼이 더욱 화려해졌다. 이제 네온사인처럼 깜빡거리기까지 한다.
‘그, 그래. 피할 수 없구나.’
어쩔 수 없이 수락을 눌렀다. 평소에는 그냥 허공을 스치는 느낌만 날 뿐인데, 이번엔 경품에 당첨된 것같이 경쾌한 소리와 함께 손가락에 감촉까지 일었다. 일순 끝까지 한번 거절만 눌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럴 기력이 없었다.
수락 버튼을 누르자 퀘스트 안내가 떠올랐다.
노을이 아름다울 시간입니다. 정원에서 노을을 감상합시다.
많은 정원 중에 어딘데. 아, 노을이라는 거 보니까 세르타가 말한 거기인가. 새로 단장해서 노을이 아름답다는 말은 이 퀘스트를 위한 복선이었던 모양이다.
한숨을 푹푹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움직이는 기척을 느꼈는지 클로든이 얼른 들어왔다. 숙련된 시종장은 내가 뭔가 목적이 있어서 움직이는 것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는 것을 잘 구분했다. 아니, 내가 워낙 안 움직여서 두 번에 한 번 정도는 들어와 보는 건가? 아무튼 들어왔으니 잘됐다.
“외부 정원에 좀 나가려고.”
“로브를 준비하겠습니다.”
클로든이 가져다준 로브를 입고 후드를 푹 눌러쓴 뒤, 수행은 거절하고 혼자서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정원에 가면 뭐가 기다리고 있을까. 새로운 공략 캐릭터? 아니면 이벤트? 게이지 오르는 이벤트 같은 건 없나.
정원을 직선으로 쭉 걸어보았으나 별다른 건 없었다. 그렇게 외부로 통하는 출구에 도착했을 때, 나는 미간을 좁혔다.
“…….”
정원 입구에는 훤칠한 금발의 남자가 수상쩍게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래, 이벤트가 맞긴 하네.
여기는 미궁 밖, 수선화 정원보다 더 바깥쪽에 자리한 공간이었다. 찾아오려면 얼마든지 찾아올 수 있는 곳. 아테올은 그곳에 서 있었다. 아마 알현을 청하려 했는데 단칼에 거절이라도 당한 모양이지.
하지만 내쫓기에는 아테올의 신분이 신분이었던지라 위병들도 주위를 맴돌 뿐 다른 대응은 못 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황자니까. 얼쩡대던 그가 내 기척을 알아챘는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딱 마주쳤다.
[퀘스트-노을 진 정원 감상- 달성!]
노을은 무슨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달성이야. 어이없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건 이득이다. 전생에 하던 대로만 행동하면서 어떻게 해야 아테올을 만날 수 있는지 고민하던 나였다. 이렇게 이벤트니 퀘스트니 하는 식으로 떠먹여 준다면 땡큐다.
물론 그런 기색을 티 내지 않고 말했다.
“여긴 어쩐 일이야?”
내가 먼저 말을 걸었지만, 아테올은 침착하게 예를 갖춘 뒤 일어나라는 말까지 기다렸다가 그제야 대답했다.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무슨 소식.”
“저를 축일의 수행 역으로 선택해 주셨다고요.”
빨리도 전해졌다. 어깨만 으쓱하자 그가 내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나는 돌아서서 정원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인 걸 알아들었는지 아테올이 한 걸음 뒤에서 내 뒤를 따랐다. 노을이 한창인 정원은 확실히 아름답긴 했다.
정원의 중간쯤 왔을 때, 아테올이 입을 열었다.
“부황과 모후가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면서 도둑고양이 취급을 하시더군요.”
“도, 도둑고양이?”
이게 웬 막장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단어인가. 멈춰 서서 떨떠름하게 쳐다보자 아테올이 웃었다.
“기분이 꽤 괜찮았습니다.”
“……왜 그런 말에 기분이 괜찮은데?”
“권력의 맛이 이런 건가 싶어서요?”
미친, 알 수 없는 사고 회로였다.
“어릴 적에는 생각도 못 해본 일이니까요. 제가 그 두 분이 제어할 수 없는 이득을 보았는데, 그걸 어쩌지 못해서 제게 화풀이밖에 못 하는 상황. 권력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화풀이도 못 하게 만드는 게 권력 아니고?”
“그것은 차차. 또 그 두 분 앞에서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것도 권력이지요. 아주 달았습니다.”
“……그러면.”
무심코 입을 열려던 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권력을 잡고 싶어서 날 죽인 거야?’
내가 하려던 말은 그거였다. 입을 다문 이유는, 너무 당연한 걸 묻는 것 같아서였다. 차차 얻을 권력을 위해서.
사실 아테올이 나를 죽인 건 그냥 과정에 불과했다. 내 목숨이 아니라 제위에 오르는 게 그의 목적이었고, 권력 없는 황자인 그가 황제 자리를 얻으려면 엄청난 지원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가 찾던 지원자가 바로 진짜 유리 아이엘레스다. 나는 그런 유리의 자리를 차지한 채 아테올에게 멋진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주며, 독자에게는 주인공이 신분을 되찾을 때의 쾌감을 주기 위한 이름도 모를 악역일 뿐이었다. 이유 운운하는 것도 우습다. 내가 뭐라고.
갑자기 조용해진 내가 이상했는지 아테올은 고개를 갸웃했다.
“탑주님?”
시선을 떨어뜨리자 아테올의 손이 보였다. 내게 독약을 내밀던 손이다. 그 번뜩이면서도 무심한 눈이라니. ……아테올과 가짜 탑주 사이의 전사? 정말 그런 게 있었을까. 어쩌면 있었기에 더 그렇게 무심해진 건지도 모르고.
어쨌든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혼자 생각에 잠겨 있던 내 입에서 뜬금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너는 속을 알 수 없어.”
엉……?
말하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아니, 의아했다. 정말 나도 모르게, 생각도 안 했는데 튀어 나간 말이었다. 아니, 물론 아테올이 속이 시커먼 것 같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건 사실인데…… 그게 지금 내가 할 말인가? 굳이? 나랑 이 황자가 무슨 사이라고? 사실, 후회보다는 혼란이 앞섰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했지?
아테올도 황당했는지 헛웃음을 치고 날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건 제가 할 말인 것 같습니다.”
“…….”
“무엄했습니까?”
무엄한 건 맞는데 차마 그 말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그냥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그래도 묻고 싶은 건 물어야겠습니다.”
말 중간까지는 순간 날 묻어버리겠다고 하는 줄 알고 지레 놀랐다.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머리를 까딱했다.
“기억을 잃은 사람 치고 당신은 지나치게 여유로운 듯합니다. 어디까지 알고, 어떤 걸 모르는 겁니까?”
“뭐, 대충……. 내 이름, 마법, 내가 대충 어떤 지위인지 같은 거. 주위 사람이나 과거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공장 초기화한 상태라는 설명이 통한다면 참 쉬울 텐데. 아테올은 감이 잘 안 잡히는지 몇 마디 더 내 기억에 관해 물었다. 몇 살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는지, 탑에 들어오게 된 계기가 기억나는지, 탑에서 내가 무슨 일을 했었는지……. 전부 모르는 것들이었기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대답을 들은 아테올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원인이 뭔지는 아십니까?”
“몰라.”
흠. 아테올이 의미심장한 소리를 내며 팔짱을 꼈다. 이번엔 내가 물었다.
“……너는 나랑 어떤 사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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