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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9화 (9/93)

9화

01.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법은

엄청나게 당황하고 동요했으나 겉으로 티 내지 않기 위해 나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 했다. 다행히 짜증을 참듯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한숨 쉬는 척 내 동요를 표출할 수 있었다. 안 그랬다면 마차 지붕까지 펄쩍 뛰어올랐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상태창이 반짝거리고 있어서였다. 며칠을 통틀어 처음 보는 찬란한 광채였다. 내가 맞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어필이라도 하는 것처럼 테두리에 황금색 띠를 두르고, 창은 특수 효과를 넣은 듯 온갖 색깔로 빛났다. 누가 봐도 ‘YES, 너 맞게 가고 있어! Yo!’라고 외치는 사인이었다.

‘이, 이게 맞단 말이지……. 이게…….’

그래……. 진정하자. 조금이라도 마음의 술렁임을 감추기 위해 창을 보았다. 창밖 풍경을 감상하는 척하려 했는데 젠장, 창문 덧창이 닫혀 있다. 순간 멈칫했으나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닫힌 걸 알고 있었던 척 창을 열고 밖으로 느리게 지나가는 황궁 정원의 풍경을 감상했다. 물론 전부 다 깨진 게임 그래픽처럼 보일 만큼 머릿속에는 상태창 생각뿐이었다.

그 후로 아테올은 말이 없었다. 마차가 느려지나 싶더니 곧 탑 주위를 둥글게 감싼 미궁 입구에 멈춰 섰다. 클로든이 와서 마차의 문을 열었고, 아테올은 먼저 내려 세르타를 대신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순간 이걸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다가 그냥 못 본 척하기로 했다. 그리고 바로 뛰어내렸다. 하지만 마차가 그냥 뛰어내리기에는 너무 높았다. 지면과 부딪친 충격으로 발바닥부터 시작해 다리와 허리까지 찌릿찌릿했다. 아테올이 그런 나를 보더니 클로든 몰래 슬쩍 웃었다.

그제야 내가 아테올의 마지막 말을 무시했었다는 게 떠올랐으나 이도 저도 너무 늦었다.

“저는 이곳까지만 모실 수 있겠군요.”

아테올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는 내가 미궁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한 사람이 아니다. 발을 들이면 마법 장치로 가득한 미궁을 빙글빙글 돌며 영원히 헤매게 될 것이다. 누군가 구해주지 않으면.

“곧 정식으로 초대할게.”

“영광입니다.”

마지못해 한 말에 아테올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언제 한번 밥 먹자!’에 당장 플래너 펼치는 사람처럼. 당장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초대해 줄 건지 묻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클로든도 그에게 인사한 뒤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 미궁에 들어서며 힐끔 아테올을 돌아보았다. 그는 삐딱하게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대로 고개를 돌리려는데 뾰롱, 하는 소리와 함께 아테올의 머리 위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옅은 금색으로 빛나는 동그라미였다. 안에는 숫자가 표시되어 있다. 12%.

‘저게 뭐지?’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보려는데, 동그라미는 나타날 때와 조금 다른 소리를 내며 사라져버렸다. 무심코 상태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새로운 메뉴가 생겨나 있었다.

[호감도: 아테올]

12%

아테올은 당신을 ‘뭐야, 이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분발하세요!

황당함에 입이 딱 벌어졌다.

상태창이…… 연애 시뮬레이션이었다니?!

***

“클로든.”

“예, 탑주님.”

잠시 고민하던 나는 용기를 내 물었다.

“클로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해?”

“……예?”

……얼굴은 왜 붉히냐. 클로든은 귀 끝과 뺨이 약간 빨개진 채로 멍하니 있다가 서둘러 대답했다.

“탑주님은 저의 탑주님이십니다.”

유심히 그의 머리 위를 살폈으나 동그란 창이 떠오르는 기색은 없었다. 반응으로 봐선 썩 나쁘지 않은데도. 적어도 아테올보단 긍정적이고 호의적인 태도 아닌가? 그리 생각하면서 조금 전 챙그랑 소리와 함께 깎인 게이지를 심란하게 보았다.

상태창이 연애 시뮬레이션이라는 걸 알고 나서 이틀. 나는 탑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공략 대상일 법한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클로든부터 시작해 세르타와, 내가 이름을 아는 사람은 다. 심지어 히든 공략캐가 아닐까 싶어서 하인과 하급 기사들까지 싹 훑었는데 게이지만 신나게 깎일 뿐 호감도는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었다.

마지막 시도로 클로든에게 이렇게 대놓고 물어본 건데 역시 이벤트 시작은커녕 또 게이지만 깎이고……. 휴……. 그래도 그렇게 돌아다니는 시간 외에는 전생에 그랬던 것처럼 방에 틀어박혀 누워 있거나 책을 읽을 뿐이었고, 그러면 또 게이지가 찼다.

역시 이건 게임 재화로 생각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오늘은 후식을 올릴까요?”

클로든이 말을 돌리듯 물었다. 기분 탓인지 안경 속 그의 눈매가 살짝 떨리는 듯했다. 고용주한테서 ‘나를 어떻게 생각해?’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대표 새끼로 대입하자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음, 호감도가 안 떠오를 만도 하구나. 내가 아주 진상 짓을 했다. 미안해, 클로든.

아무튼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의 디저트는 맛이 훌륭하고, 난 게이지를 올리기 위해 이곳의 기본예절이니 식습관이니 하는 것에 관한 책을 열심히 읽었다. 전생에도 살아남으려고 우선 정보 수집을 했거든.

6년 전 읽은 책을 또 읽으려니 기억이 새록새록……한 게 아니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이 나서 지겨워 죽는 줄 알았다. 가짜 탑주는 쓸데없이 머리까지 좋았다. 가짜도 이 정도인데 진짜 유리는 어느 정도인 거지? 아니면 진짜 유리의 지능까지 탈취한 건가?

후식을 가지고 들어온 클로든이 내 앞에 장미 꽃잎 모양으로 만든 초콜릿과 얇은 설탕 막 안에 차가운 박하 차를 채운 사탕, 장미꽃 잼과 산딸기 시럽을 얹은 치즈타르트, 깨물면 과즙이 터지는 동그란 젤리, 과일 여러 종류와 쌉싸름한 홍차를 가지고 왔다. 종류는 많지만 각각 양이 적어서 다 하나씩 맛볼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단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원래 몸의 취향 때문인지, 아니면 단데도 불구하고 너무 맛있기 때문인지 항상 후식은 남김없이 비우게 되었다.

식사를 마친 후 클로든이 두 개의 쟁반에 내 앞으로 온 우편물을 들고 들어왔다. 금으로 된 쟁반은 더 중요한 것, 은으로 된 쟁반은 덜 중요한 것이다. 금 쟁반에는 황제가 지난 무도회에 참석해 주어 고맙다고 전하는 편지가 하나 있을 뿐이었고, 은쟁반엔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레이안 경에게서, 하나는…… 4황자 전하에게서 온 편지입니다.”

레이안 경, 벨의 편지라는 말에 순간 반가워서 손을 내밀 뻔했으나 참았다. 벨이 누군지는 그녀가 돌아온 후에야 알게 되었으니까. 벨은 호위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지금은 잠시 내 심부름을 가 있다. 나와는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흠. 벨이 돌아오면 공략캐인지 또 확인해 볼 수 있겠구나.

그런데 다른 하나가…… 4황자? 내 얼굴이 구겨지자 클로든은 자신이 송구하다는 얼굴로 편지를 내게 전했다. 딱히 자기가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페이퍼 나이프를 들었다. 내용은 단순했다.

“……하마난의 날에 나를 수행하고 싶다는데.”

“4황자 전하가요?”

클로든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마난의 날은 성인 하마난을 기리는 축일이었다. 원래 실로니는 30일 동안 건기만 있는 달이었는데, 하마난이 우물의 여신 실로니의 물 항아리를 훔쳐 와 비로 바꾸어서 그중 열흘이 우기가 되었다고 한다. 가뭄을 해결해 주고 여느 성인답게 신들의 벌을 받고 만 사람이기에 지금까지 기리고 있다.

그 축일 행사에서 내가 황궁 앞 광장에 나가 사람들에게 비 대신 꽃비를 뿌린다. 꽃비를 시작으로 반가운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하마난의 날은 이제 이틀 남았다.

황족 중 한 사람이 나를 수행해야 하는 건 맞았다. 보통 황태자나 2황자가 나섰고, 가끔 로아네스 대공이 오기도 했다. 헉. 생각해 보니 진짜로 있잖아, 북부 대공. 아무튼 지금 중요한 문제는 북부 대공이 아니고.

그 수행을 4황자에게 맡긴다면…… 그를 향한 지지의 뜻을 나타내는 좋은 시작이 될 것이다.

일단 그의 편지를 밀어두고 황제가 보낸 편지를 뜯었다. 예의 차린 고맙다는 말 아래, 그날 제대로 이야기도 못 나누었고 어쩌고, 하여 황후와 함께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사실 옛날엔 이 정도로 황제가 내게 저자세인 게 이해가 안 갔는데 살아보니 알겠더라. 아무런 증거도 없이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할 수 있는 초월적 존재가 얼마나 무서운지.

솔직히 나한테는 좋은 일이지.

황제의 편지가 무슨 내용일지 짐작했는지 클로든이 물었다.

“탑주께서 수선화 정원을 보여드리고 싶어 하신다고 전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는 어차피 끄덕이기만 하는 끄덕끄덕 인형이었으니까.

수선화 정원은 마탑 미궁 둘레에 있는 여러 개의 정원 중 하나였다. 유리 온실로, 내가 꽤 좋아하는 공간이다. 황제와 황후를 그리로 오라고 불러내는 것이었다. 황제, 황후와 나는 동등한 관계였으므로 서로에게 알현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티타임일 뿐이다.

“바로 전하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탑주님.”

얼마나 바로 전했는지…… 황제와 황후는 그날 저녁에 허둥지둥 달려왔다.

“무도회에서는 탑주께 험한 꼴을 보였습니다.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중간에 자리를 비워서…….”

흘끔흘끔 게이지가 깎이지 않는지 확인하며 대화를 이어가는데, 갑자기 상태창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아, 지금이야? 지금이 말할 타이밍이야? 친절하기도 하네.

“크흠…….”

나는 괜한 헛기침을 했다. 그에 내가 할 말이 있는 걸 알았는지, 황제와 황후의 시선이 곧바로 집중되었다. 괜히 민망하군.

“4황자는…….”

황제와 황후가 얼굴을 흐렸다. 내가 안 좋은 소리를 할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생각보다, 괜찮은 재목인 것 같아요.”

“……예?!”

의외의 칭찬이니 좀 밝아지겠지…… 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황제 부부는 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서…… 이번 축일에 수행을 맡길까 합니다.”

이어진 말에는 도둑이 집에 불까지 지르고 갔다는 얼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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