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01.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법은
거짓말……! 기가 막혔다. 4황자는 눈을 똑바로 뜬 채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가짜 탑주는 4황자와 친분이 없다. 적어도 내가 읽은 부분까지는.
‘…….’
내가 읽은 부분까지는…… 없었는데. 그 후에 어쩌면 뭔가 나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작가만 아는 서브텍스트가 있었거나. 역시 기억을 잃었다고 말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만약에, 원작 내용과 달리 내가 4황자를 완전히 무시한 게 죽음의 원인이었다면? 내가 상당히 초반에 하차했기에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널 아테올이라고 불렀어?”
“그랬죠.”
“하지만 아까 날 데려올 때 네 태도는…….”
4황자의 태도로 말하자면 그리 친밀해 보이진 않았다. 내가 갑자기 자신을 불러낸 걸 의문스럽게 생각했다면 모를까. 심지어 쥐새끼라고 했잖아. 거기까지 생각하고 내 입이 다물어지자, 4황자는 희미하게 웃더니 갑자기 고개를 내 쪽으로 기울였다.
“그래야지요. 남들 눈이 있는 곳이었잖아요.”
“뭐…….”
“하지만 사실입니다. 우린 아주 친밀하고…….”
그의 입술이 내 귀에 거의 닿을 듯 가까워졌다.
“……비밀스러운 사이였으니까.”
나는 그대로 굳었다.
정말로 그런…… 그런 전사가 있었다고? 가짜 탑주랑 4황자가 그런 사이였어? 그러면 역시 마지막에 4황자가 나를 무참히 살해한 건(다시 말하지만, 인도적인 죽음이긴 했다) 6년 전부터 꼬여버린 연애 관계 때문에? 듣도 보도 못 한 사실이었다. 그 정도로 중요한 사실이면 6년 동안 뭐라도 낌새는 있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다못해 4황자가 몰래 찾아온다든가!
정신을 차리니 귀를 한 손으로 마구 문지르고 있었다. 이 인간 쓸데없이 목소리만 좋아서는! 내가 놀란 마음을 조용히 다스리는 동안, 그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인 채 날 내려다보았다. 짧은 침묵이 흐른 후 먼저 입을 연 건 나였다.
“그게 정말이야?”
“그렇다면요?”
“…….”
그게 정말이라면 나한테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필사적으로 생각하는데 4황자가 갑자기 두 손가락으로 자기 귀를 막았다. 저건 또 무슨 짓인가 싶어 쳐다보니 그가 히죽 웃는다.
“왜 웃어?”
“머리 굴리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요.”
“이, 무례하고 무엄한…….”
6년 동안 떠받들린 몸이다. 도를 넘는 말을 듣자 왈칵 화가 치밀었다. 그러자 4황자는 손을 떼더니 항복 선언이라도 하듯 내게 손바닥을 보였다가 그대로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농담이 지나쳤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위대한 분이시여.”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농담인 거지? 내가 주춤하자 그는 피식 웃었다.
“설마 탑주께서 저 따위 근본도 모를 찌꺼기 황자 나부랭이와 관계를 가지셨겠습니까. 기억을 잃으셨다고 하기에 한번 해본 말입니다.”
관계를 가졌……. 듣기에 몹시 부적절한 말이었다. 다분히 고의적인 단어 선택으로 보였고. 황자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앞으로 충분히 그렇게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4황자라는 호칭은 거리감이 느껴지니 부디, 아테올이라고 불러주십시오.”
“…….”
나는 목숨을 구걸하는 입장이다. 내가 죽음을 피할 선택지야 물론 여러 개 있을 수도 있다. 그중 하나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4황자를 아무도 모르게 쓱싹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다고 내 미래가 바뀔까? 어딘가에 진짜 탑주는 존재한다. 누군가가 갑자기 걔를 데리고 툭 튀어나올 수도 있는 거잖아. 졸지에 다 가진 황좌를 빼앗긴 황태자라든가, 아니면 전혀 예상치 못한 누군가. 예를 들면 황위 계승권이 있는 북부 대공 같은 사람.
그러니 상태창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최선이다. 나는 이쪽을 믿고 가기로 했으니까. 전생의 원수, 아테올과 친ㅇ…… 친분을 맺는 것 말이다. 빠르게 결론을 내린 나는 대답했다.
“알겠어. ……아테올.”
“네, 탑주시여.”
4황자…… 아테올은 능글맞게 웃었다. 내가 이름을 부른 게 썩 맘에 든다는 눈치였다. 속을 알 수가 없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는 내 도움 요청을 수상하게 여기지 않고 기회라 생각하는 듯했다.
기둥에서 손을 뗀 그가 한 걸음 물러났다. 그대로 떨어지나 싶어 안심했는데 웬걸, 그는 몸을 숙이곤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것도 경악스러운데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테올이 내 손을 살며시 붙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기곤, 손등에 키스했다.
이번엔 손등부터 소름이 돋았다. 나도 모르게 손을 홱 빼려 했으나 그 순간, 날 잡은 손아귀 힘이 강해졌다. 아테올은 입술을 손등에 붙인 채 눈동자만 들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살짝 흘러내린 앞머리 사이로 형형한 붉은 눈이 똑바로 날 응시했다. 등줄기를 타고 전류가 흐르는 듯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몸을 관통했다. 아마도 두려움이 극에 달한 것 같았다.
작은 소리를 내며 입술을 떨어뜨린 아테올이 느리게 일어섰다. 왠지 무릎에 풀물이라도 든 모습을 확인하면 희미하게나마 인간미가 느껴질 것 같아 아래를 보았으나, 애석하게도 검은 옷이었고 매우 깨끗했다. 아테올이 피식 웃었다.
“어딜 보십니까?”
“…….”
아니! 오해……, 오해였다. 거기를 본 게 아니다. 그러나 발작하며 아니라고 말하기도 이상한 상황이다. 입만 뻐끔거리고 있자 아테올이 여전히 실실 웃으며 말했다.
“탑까지 모시겠습니다.”
거절한다. 싫어.
“혼자 갈 수 있어.”
“사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으윽…….”
사양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혼자 갈 수 있었다. 무도회장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그 입구에 나를 탑까지 데려갈 안전한 마차가 대기 중이었으니까. 마차가 없다 해도 여기서 탑까지 당연히 혼자서 가도 되었고. 하지만 아테올의 ‘사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는 대표 새끼의 ‘오늘 저녁 어때? 내가 살게.’와 비슷하게 들렸다. 약간 위협조였다는 뜻이다.
나는 슬그머니 돌아서서 주뼛주뼛 걸음을 옮겼다. 발끝이 어색하게 풀잎을 눌렀다 떨어졌다. 아테올은 그런 내 뒤를 여유 넘치는 태도로 따라왔다. 정원 입구, 무도회장 근처까지 온 나는 그를 재차 어색하게 돌아보았다.
“내 마차가 있어. 정말 데려다주지 않아도 돼.”
“탑주님의 마차에 오르는 영광을 주신다면야.”
이제 와서 생각하기에도 늦었지만, 이 인간 말 더럽게 안 통하는 스타일 아니야? 아니…… 그냥 내가 만만해진 건가. 충분히 그럴 법하지. 기억을 잃고 주변에 믿을 구석이 없어서 자기한테 딜을 거는 사람인데. 아니면, 아직 내 진의가 뭔지 간을 보고 있는 걸 수도 있고.
결국 나는 그의 동행을 허락했다.
마차 곁에서 기다리고 있던 클로든이 일순 자신이 뭘 본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며 안경을 천천히 벗었다가 다시 썼다. 내가 손으로 음식을 퍼먹었을 때도 저렇게까지 놀라진 않았는데. 4황자의 뜬금없는 등장이 어지간히 충격적인 모양이다. 잠깐의 동요 후, 가만히 날 바라보는 그를 향해서 말했다.
“동행할 거야. 탑까지.”
“알겠습니다.”
역시 클로든은 숙련된 시종장답게 바로 정신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마차의 문을 열어준 그는 우리가 올라탄 뒤 정중하게 문을 닫아주고는 마부의 옆좌석으로 향했다. 세르타 역시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으나 묵묵히 말을 타고 마차 옆에 섰다.
얼마 후 마차가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발굽과 마차 바퀴가 황궁 통로의 대리석 바닥을 밟는 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아테올은 흥미롭다는 듯 마차 안을 한번 훑은 후로는, 마차가 움직이는 내내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따가울 정도로 느껴지는 시선을 참지 못하고 결국 물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글쎄요.”
‘글쎄요.’는 뭐야. 진짜로 뭐가 묻었나 싶어 후드 아래쪽 얼굴을 더듬는데, 아테올이 고개를 기울이더니 씩 웃었다.
“우수(憂愁)?”
“…….”
올라갔던 손이 어처구니를 잃고 툭 떨어졌다. 뭐라는 거야. 왜 하필 우수야. 은은하게 들리지만 결국 음침하다는 뜻이잖아. 내가 음침한 건 잘 알지만 그걸 대놓고 말하면 안 되지. 내 시선에 짜증이 담긴 걸 느꼈는지 아테올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존안에 수심이 가득하시어 저도 모르게 그만 쳐다보고 말았습니다. 송구합니다. 원하신다면…… 눈이라도 뽑아서 사죄하지요.”
“내 얼굴은 원래 이래. 그리고, 비꼬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말이 없어?”
“이런.”
애초에 후드로 다 가리고 있는데 뭐가 보이긴 하냐. 기분이 상한 걸 숨기지 않고 쏘아붙이자 아테올이 인상을 처량하게 일그러뜨렸다.
“저는 배운 것 없고 되먹지도 못한 찌꺼기 황족 나부랭이라서요. 마음이 많이 비뚤어져 있나 봅니다. 앞으로 고귀하신 분께 배워나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
나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사사건건 배배 꼬이고 빈정거리는 말만 해댈 리가 없다. 아테올은 아직 내 제안을 수락한 게 아닌 거다. 일부러 저런 식으로 지껄이면서 나를 시험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쩌겠는가. 내 유일한 생명 줄은 저 인간인 모양인데. 그 증거로, 상태창을 보았다. 게이지가 여전히 전혀 줄어들지 않았을 것…….
‘……! 뭐……! 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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