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01.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법은
“무…….”
무섭지, 당연히, 라고 말하려는 입을 간신히 다물었다.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거래에 아무 상관도 없잖아.”
“왜 없습니까? 상대가 나를 무서워하면 나는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는데.”
“지금, 나는 너를 말 한마디로 영원히 지하 감옥에서 못 나오게 할 수도 있어.”
“또는 손가락 하나로 영원히 입을 못 열게 하실 수도 있죠.”
나는 잠자코 있었다. 긍정한다는 뜻이었다. 내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건, 가짜 탑주 역시 진짜 유리의 마법을 사용했다는 의미였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물론 그 마법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른다. 대륙을 물리적으로 거꾸로 뒤집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그걸 실험해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튼 확인해 보진 못했으나, 대륙도 주물럭거릴 수 있다니 평범한 인간인 4황자 하나쯤 탑에 거꾸로 매달아 죽이는 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겠다는 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고. 그런데, 그걸 알면서 내가 자기를 무서워한다는 말이 어떻게 나오지? 참 대단한 인간이었다.
4황자가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않고 다시 물었다.
“탑주께서는 무얼 바라십니까? 제가 황제가 된 후에 섭정하는 것?”
“아니.”
섭정은 무슨, 그럴 깜냥도 안 된다.
“그렇다면?”
“내 목숨을…… 지켜줘.”
목숨만 살려달라는 애잔한 매달림이 이렇게 하니 그럴듯한 부탁으로 바뀌었다. 4황자가 순간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가 피식 웃었다.
“이 세상천지에 감히 탑의 주인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존재가 있습니까?”
“……내가 기억을 잃게 만든 누군가.”
“아하.”
이는 상황을 약간 바꾸어 한 말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기억을 잃게 한 게 아니라 나를 이곳에 빙의하게 한 누군가였다. 이 캐릭터는 죽는다. 악역이니까. 그런 악역에 날 빙의하게 한 누군가는 바로 내게 위해를 가할 존재였다. ……뭐야. 그럼 생각해 보니 상태창도 의심스럽네.
아니야. 한 가지 방향으로만 생각하자. 상태창은 좋은 것, 날 빙의하게 한 존재는 나쁜 것. 둘이 별개일 거야. 만약 그놈이 그놈이라도 최소한 이번엔 다른 뜻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안이한 생각인지 몰라도 안이하게 한길만 가는 게 갈팡질팡하는 것보다 낫다.
4황자가 잠시 고민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면, 탑주께서는 어떻게 저를 황제로 만들어주실 겁니까?”
“너를 지지해 줄게.”
“흠.”
“흠?”
탑주가 특정 황자를 지지한다고 하는 건 엄청난 반향을 불러온다. 전생에도 내가 어느 황자를 마음에 들어 할지로 온 세상이 유난 법석을 떨며 묻고 재촉하고 살랑거리고 난리였다. 황태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내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데, 4황자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저는 더 엄청난 걸 기대했는데요.”
뭘 기대한 거야?!
“뭘?”
“뭐 이를테면…… 당신의 그 손가락 하나로 말입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한쪽 손을 들었다가 화들짝 놀랐다. 4황자가 커다란 손으로 내 손을 콱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그의 손은 건조하면서 내 손보다 훨씬 따뜻했다. 손이 차가운 사람은 마음이 따듯하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4황자는…….
그런 생각을 하는데 4황자가 내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하나, 둘, 셋.
“경쟁자들을 모두 없애주시려는 건가…… 했죠.”
“…….”
4황자는…… 마음이 얼음장이다! 얼음장이야! 내 목숨 하나 살려달라고 말하려던 자리가 갑자기 황자 세 명을 죽이자는 살벌한 로비 장소로 바뀌었다. 등골이 서늘했다.
“제일 확실하게 황제가 될 방법 아니겠습니까.”
“마,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
“말이 안 되나?”
그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것만 보면 마치 내가 이상한 소리를 한 듯이 보인다. ‘국민을 위한 봉사 활동을 해서 지지율을 끌어 옵시다’ 같은 타당한 주장에 반박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속아선 안 됐다. 지금 4황자는 저 동화 속 왕자님 같은 얼굴로 제 형제를 싹 다 죽이면 안 되냐고 말한 것이다.
“안 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미간을 찌푸려도 미남은 미남이었다. 중얼거리며 고개를 다시 갸우뚱한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씩 웃었다.
“농담입니다, 탑주시여. 설마 제가 그런 무서운 생각을 할까요?”
한 것 같다. 아니, 했다. 했어. 내가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자 그는 눈을 휘며 웃었다.
“당연히 당신의 지지,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 하나가 충분히 저를 이 제국의 황제로 만들어줄 테니까요.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4황자가 기둥에 짚고 있던 손을 떼더니 그 손으로 내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살짝 쥐었다. 그대로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줄 알고 흠칫 놀랐으나, 다음에 이어진 건 더 충격적인 행동이었다. 그는 내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당신은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
머리카락에서부터 소름이 오스스 돋는 기분이었다. 당장 뿌리치고 기어서라도 도망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나는 그의 말을 재차 확인했다.
“지켜주겠다고?”
“네. 성심을 다해서.”
“……그, 그럴 필요까진 없고. 그냥 목숨만 살려주면 되는데.”
그러자 4황자의 표정이 또 이상해졌다. 뒤의 말은 괜히 했나? 탑주 치고 너무 비굴해 보이나? 하지만 난 지금 기억을 잃었다는 설정이니까 좀 맘이 약해질 수도 있는 거지. 어차피 엎질러진 물, 주워 담을 수도 없으니 그냥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다.
“정말로 목숨만 붙어 있게 해주면 돼.”
“위대하신 탑주님.”
“……왜? 4황자.”
당당해지기로 마음먹은 거 뻔뻔함도 갖추자는 마음으로 마주 부르자, 뜻밖에도 그가 피식 웃었다. “하하하하하…….” 하고 낮은 웃음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왜 이래. 혹시 미쳤나? 죽기 전에 잠깐 본 것 말고는 대화다운 대화조차 나눈 적이 없어 몰랐지만, 광증이 있다는 소문 그거 사실이었던 거 아닐까.
“목숨만 살려달라는 게 얼마나 위험한 부탁인지 아십니까?”
“왜……. 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뭐라고요? 희한한 표현을 쓰시는군요. 고상하신 입에서 나오기엔 좀……. 어쨌든 그건 개똥 위에서 안 굴러봐서 할 수 있는 말 같습니다.”
뭐지……. 그래서 지금 나를 개똥밭에 던지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뒤늦게 알 수 없는 위기감이 들어 내 말을 무르려 했을 때였다. 4황자가 선수 치듯 재빨리 입을 열었다.
“어쨌든 그런 조건을 제시한 건 당신이십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살아 있는 이상, 당신의 목숨은 절대적으로 지켜질 겁니다.”
“네가 살아 있을 때만?”
“…….”
4황자는 이번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이어 정원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뜨렸다. 웃느라 젖혀진 목선이 놀랄 만큼 늠름하게 잘생겼다. 한참 웃은 그가 다시 나를 보았다. 명확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이었으나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부하들에게 명령은 해두겠습니다만, 죽은 뒤의 일을 누가 알겠습니까?”
난 아는데. 사람은 죽으면 책 속 세계에 떨어지기도 하고, 죽기 몇 년 전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나한테 일어난 일이니 다른 사람한테 안 일어나리라는 법도 없지. 어쩌면 내 옆을 지나친 행인 하나가 죽었다 다시 시간을 돌아온 사람일 수도 있고.
판타지 소설 속 세계에 빙의했다가 회귀까지 하는 마당에 무슨 일인들 안 일어날까. ……아니지, 생각해 보니 만약에 4황자가 죽었다가 회귀한다 하더라도 내 시점에서는 상관없는 일이구나. 정말 죽은 뒤의 일은 알 수 없는 거다. 잠시 고민한 나는 대답했다.
“그럼 잘 부탁해 줘.”
4황자의 유려한 입술이 실룩거렸다. 또 웃으려다 참은 것 같다.
“그렇죠, 명령이 아니라 부탁을 하는 편이 더 잘 먹히겠군요. ……지금도 그렇고.”
“지금?”
이건 무슨 소리지. 어디 가서 부탁이라도 하고 왔나. 고개가 저절로 옆으로 기울어졌다. 4황자는 그런 날 보며 씩 웃더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 덧붙였다. 보통은 이런 경우에 아무것도 아니지 않던데. 하지만 그걸 물고 늘어져 무슨 뜻인지 알아낼 용기는 없었다. 막 빙의해서 얼타던 때의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인지도 모르겠고…… 응?
그러고 보니, 상태창. 흘끗 시선만 움직여 허공에 떠 있는 홀로그램 창을 확인했다. 아까부터 챙그랑 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다 했더니, 역시나 게이지는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였다. 황자를 만났을 때부터 계속.
상태창을 흘끔거리고 있는데 4황자가 손가락으로 톡톡, 기둥을 두드렸다. 반사적으로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적어도 한 가지는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알겠네요.”
“뭘?”
“기억을 잃었다는 말.”
“……당연히 진짜지.”
“주의하세요. 그렇게 사람 눈 하나 못 마주치고 허공만 힐끔대다간 온 성안 사람들이 당신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 겁니다.”
“며칠 동안 아무도 몰랐어. 내가 조심하면 앞으로도 모를 거고.”
사실이다. 심지어 6년 후까지 아무도 확실하게 깨닫진 못했다. 원래부터 가짜 탑주는 조용하고 음침한 성격이었고, 공교롭게도 그 점이 나와 비슷했다. 상대방의 얼굴보다 바닥이나 허공을 주로 쳐다보는 것도, 말수가 적은 것도. 또 4황자와 다른 의미로 기행을 벌이거나 마법 실험에 실패해 이상한 상태가 되는 일 역시 다반사였기에 나는 아무런 의심을 사지 않았다. 4황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보다 당신 측근들이 무능한 듯한데요.”
“네가 날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거겠지.”
“기억을 완전히 잃은 본인보다는 가까이서 봐온 사람이 더 잘 알지 않겠습니까?”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4황자, 네가 나에 대해서 뭘 그렇게 잘 안다고?”
“아테올.”
“……뭐?”
“자꾸 4황자, 4황자,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거리감이 느껴지잖아요. 아테올이라고 부르세요. 늘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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