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01.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법은
“미치다니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부황.”
4황자는 산뜻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로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저는 그저 귀한 늑대를 잡아서 모후께 그 가죽을 바치려고 온 것뿐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늑대 머리로 향했다. 늑대는 가엽게도 눈조차 못 감은 채였다. 게다가 아직 피도 마르지 않아 털이 온통 축축하기까지 했다.
원래 이 나라에서 모피를 선물할 때는 우선 잡은 짐승의 머리를 아름다운 쟁반에 받쳐 보여주는 풍습이 있긴 했다. 모피로 손질하는 데 길게는 몇 달까지도 걸리니까 미리 어필해 두는 차원에서. 다만 예고를 하고, 준비된 장소에서, 머리 위에는 덮개를 씌운 채 향료를 피우고 멀찌감치 떨어져 이루어졌다. 지금처럼 대뜸 뜨끈한 늑대 머리를 들고 무도회장에 난입하는 게 아니라.
4황자가 치는 사고라는 건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좀 이해할 수 없다. 반란을 준비한다면 조용히 몸을 수그리고 있어야 할 그가, 왜 이런 짓을 했을까? 물론 전부 선을 지키는 사고이긴 했다.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주목받거나 분노를 사지 않을 선.
이 일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예의도 모르는 망나니 황자가 또 정신 나간 짓을 했다고 수군거렸다. 그렇지만 그뿐이었다. 심지어 황제와 4황자의 계모인 황후조차 혀를 차는 것으로 끝냈다.
가끔은 존재를 드러내고 싶었나. 몸이 근질근질했다든가. 뭐…… 궁금해도 알 도리가 없다. 4황자한테 직접 물어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고, 설마 직접 물을 일은 영영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소란의 중심에 선 채로도 태연하고 약간 어리석게 보이기까지 하는 4황자가 망토를 펄럭이며 인사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최고의 장인에게 모피를 만들게 하지요. ……아.”
4황자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여전히 자신은 아무 잘못 없다는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다. 그가 웃는 표정을 유지한 채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랜만에 존안을 뵙습니다, 가장 높은 탑의 주인이시여.”
이때 나는 원래 꽁꽁 얼어붙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꽁꽁 얼어붙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과는 다른 이유에서였다. 전에는 갑자기 나타난 금발의 미남자가 늑대 머리를 들고 있어서(직접 들고 있진 않았지만) 그런 거였고, 이번엔 그냥, 4황자가 무서웠다.
“마셔.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인도적인 조치다.”
그렇게 말하는 4황자는 지금과 똑같이 웃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독이 든 잔이 들려 있었고, 나는 그걸 마셔야 했다. 마시지 않으면 베겠다는 의지가 그의 왼손에 들린 검에서 뚜렷이 보였다. 목이 잘리는 것보단 나을 거라는 생각으로 나는 독약을 마셨다.
내게 죽음을 종용하던 그 말끔하고 잘생긴 얼굴이 지금과 겹쳐졌다.
“…….”
“그럼, 정말로 물러가겠습니다.”
4황자는 나에게 특별히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던 듯, 휙 돌아서서 성큼성큼 가버렸다. 아차. 이렇게 보내면 안 되는데. 나는 황제와 황후에게 가볍게 인사한 뒤 4황자를 따라갔다. 상태창에서 게이지가 챙그랑 챙그랑 소리를 내며 깎이는 게 보였다.
대놓고 따라가자니 좀 무서워서 복도 구석에 숨어가며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4황자를 수행하던 기사는 무도회장을 빠져나오자 받쳐 든 쟁반이 귀찮아진 듯 한 손에 쟁반을, 다른 한 손에 늑대 머리통을 쥐었다. 무인의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온 늑대의 머리털과 잘린 목의 단면이 섬뜩했다. 기사가 발돋움을 해 4황자 쪽으로 몸을 가까이 하더니 말했다.
“표정 보셨습니까? 자다가 생각나서 웃을 것 같아요.”
“쯧. 아직 무도회장이 가깝다. 그리고…….”
그는 혀를 차면서 짐짓 타이르는 투로 말했으나 낄낄대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예의를 몰라서가 아니라 다 알면서 황제와 황후를 난감하게 만들고 싶어 그랬던 것이다.
저 인간을 상대로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회귀한 날부터 오늘까지 며칠 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하,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이건 도무지……, 이 분위기 뭐야?
나는 순간 싸늘해진 분위기에 움직임을 멈췄다. 황자가 뭐라고 했더라. ‘그리고…….’ 그다음엔? 황자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쥐새끼 한 머리가 우리 말을 듣고 있잖아.”
“오.”
말과 동시에 두 사람이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그들 뒤로 회랑의 입구가 보였다. 달빛을 등진 남녀와 늑대 머리 하나. ……그대로 도망가고 싶었다. 시선이 똑바로 내가 숨은 곳을 향해 꽂힌 게 아니었다면 어떻게든 튀었을지도 모른다. 도망쳐도 소용없고, 오히려 꼴만 사나워진다.
게다가 실눈을 뜨고 본 게이지는 황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이후로 더 이상 깎이지 않았다. 지금이 기회가 맞다는 증거였다.
결국 난 슬그머니 몸을 내밀었다. 타조가 머리 처박듯 어설프게 숨었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기에 드러냈다고 하기도 민망스러웠다. 역시나 4황자와 수행 기사는 다 안다는 듯 히죽 웃음을 지었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런 곳에는 어쩐 일로, 탑주시여.”
나를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는 태도. 그걸 보고 4황자가 숨어 있던 게 나임을 뻔히 알면서 ‘쥐새끼’라고 칭했음을 깨달았지만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왜? 무서우니까. 그래도 태연하려고 노력하며 일단…….
“4황자.”
냅다 부르기부터 했다. 그러면 어떻게든 연결이 되겠지.
4황자가 기품 있게 가슴에 손을 대고 재차 고개를 숙이며 나를 보았다. 그가 나보다 훨씬 키가 커서 거리가 있음에도 자연스럽게 내려다보는 구도였으나, 그걸 인식하지 못할 만큼 그는 공손하고 유순하게 눈을 내리뜬 채였다. 다행히 다음 말이 바로 내 입에서 나왔다.
“저기, 그, 잠깐…… 음…… 걷겠어?”
아무래도 같이 걷는 게 멍하니 서 있는 것보단 낫겠지.
“탑주님께서 귀한 시간을 내어주신다니 다시없을 영광입니다.”
황자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와 달리 기사의 눈길은 기묘한 걸 보는 듯했다. 기사의 반응 쪽이 오히려 당연했으나, 그녀는 금방 표정을 지우고 옆으로 물러났다.
“저는 이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늑대 머리를 등 뒤로 감춘 그녀가 언제 킬킬거렸냐는 듯 절도 있는 자세로 예를 취했다. 4황자가 날 보고 웃으며 말했다.
“이쪽으로, 탑주시여. 늦은 저녁에는 여기 정원의 꽃이 아름답습니다.”
꽃이고 나발이고 나한테는 중요하지 않았다. 상현의 궁에서 연결된 정원이 어디더라? 기억도 안 난다. 나도 모르게 머뭇대자 4황자는 한 번 더 손길을 정원 쪽으로 돌렸다. 꽤나 적극적인 인간이었다.
기사를 지나칠 때 그녀가 슬그머니 눈을 들어 날 보는 걸 느끼며, 황자의 뒤꽁무니를 따라 정원으로 향했다. 사박사박. 융단처럼 깔린 잔디는 밟는 감촉이 좋았고 밟을 때마다 부드러운 소리를 냈다. 얼마나 걸었을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정원 중간쯤 이르렀을 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 뭐가?”
“이곳 말입니다. 종종 나와서 이곳을 산책하시지 않았습니까.”
“…….”
그랬었군, 가짜 탑주…….
“……그걸 어떻게 알아?”
“공교롭게도 제 궁이 이 근처입니다.”
기억하기로 4황자의 궁은 꽤 구석진 곳에 있었는데, 그게 이 근처였나? 그리고 가짜 탑주는 종종 여기를 산책했단 말이지. 4황자는 그 사실을 알고 있고.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나는 모르고 4황자는 아는 사실. 흠……?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럽던 머리에 불이 켜졌다.
“나는 몰라.”
4황자가 가볍게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나한테 문제가 생겼어.”
“어떤?”
“기억을 잃었어.”
“…….”
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종종 여기서 산책을 하곤 했다’는 말이 별 뜻 없는 사실일 수도 있지만, 내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어떤 유도 신문일 가능성도 버리기 어려웠다. 가짜 탑주와 4황자만 알고 있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래서 아예 선수를 쳐버리기로 했다. 내가 기억 상실이라는 말로.
이건 정말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으나 엄청나게 그럴듯했다. 나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속으로 스스로를 한참 칭찬했고, 그동안 우리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4황자가 물었다.
“……그 이야기를 왜 저에게?”
“제일 절박해 보여서.”
“절박하다고요?”
“제위.”
“……하.”
그에게서 미처 감추지 못한 웃음이 툭 튀어나왔다. 어이가 없다는 기색이었다. 천천히 자세를 삐딱하게 하면서도 그의 입술은 계속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마, 맞잖아. 황제가 되고 싶잖아. 내가 네 편에 붙는다면 너는 쉽게 황제가 될 수 있어. 지금의 모든…… 악조건을 다 물리치고.”
“왜 하필 이 망나니에게 그런 제안을 하시느냐, 그게 궁금한 겁니다, 저는.”
“그것도 이미 말했어. 네가 가장 절박해 보여서라고. 절박함은 모든 걸 이기니까. 나는…… 음…… 날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해.”
말이 마치 미리 만들어놓은 것처럼 줄줄 흘러나왔다. 나도 이렇게 훌륭한 핑계가 떠오를 줄은 몰랐다. 나는 기억을 잃었다. 내가 빙의되기 전에 이 가짜 탑주가 어떻게 생활했는지 모르니 기억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나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 기억을 잃었다고 하면 얼마나 위험하겠는가?
탑주가 황제와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그 힘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건드릴 수 없고, 마음만 먹으면 대륙을 뒤집을 수 있는 막대한 힘. 그런 힘의 소유자가 갑자기 기억을 잃었다. 절대적 힘에 파고들 구멍이 생긴 거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제위에서 가장 멀리 있으면서 가장 절박하고, 날 지켜줄 능력이 있는 사람과 거래를 시도하려 한다. 이런 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내가 의도한 바였다. 4황자의 웃음이 천천히 깊어졌다.
“당신을 보호해 주는 대가로 나는 황제가 된다……?”
그는 내 의도를 정확히 알아차려 주었다.
삐딱한 자세로 있던 그가 천천히 팔을 들어 팔짱을 끼었다. 그 눈빛이 나를 향한다. 이번엔 예의를 차리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붉은 눈이었다. 나는 움찔해서 뒷걸음질했다. 4황자가 날 응시할 때마다 가슴이 벌렁거려서 미치겠다.
뒤로 물러났더니, 4황자가 성큼 다가왔다. 한 걸음 더 가자 또 한 걸음 온다. 어느새 나는 지붕 달린 벤치까지 밀려났고, 흰 기둥에 등이 툭 닿자 더는 도망칠 수 없었다. 4황자가 슥 몸을 가까이했다. 체면이고 뭐고 옆으로 게걸음이라도 하려고 했으나, 내가 움직이려 한 방향으로 그가 손을 기둥에 턱 얹었다.
팔을 짚지 않은 반대쪽으로 나가면 될 텐데…… 저체온증 동물이라도 된 것처럼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신은 어째, 제가…….”
“…….”
“무서운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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