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01.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법은
무도회 날은 아침부터 치장을 한다고 바빴다. 이 나라 사람들은 남자고 여자고 자기 몸 꾸미는 것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다. 본인이 아니어도 그 주위 시종들이 가만히 두지 않았다. 나 역시 날 씻기고 빗기고 매만지는 클로든의 손길에 하루 종일 몸을 맡기고 있었다.
물론 그러는 보람은 없었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보았다. 빗어도 부스스한 검고 긴 머리, 음울한 노란색 두 눈과 눈 밑의 그늘, 칙칙한 표정. 어두운 색 옷을 입어서 더 까마귀 같은 음침한 인상. 나름 무도회라고 새로 지은 멀끔한 옷을 입고 장신구도 했으나 그런 반짝이는 것들이 내 분위기를 바꿔주진 못했다.
“후드를 씌울까요, 탑주님?”
내 뒤에 서 있던 클로든이 물었다. 다소 아쉽다는 얼굴이었다. 물을 게 뭐 있나. 아쉬울 건 또 뭐고. 민얼굴로 무도회장에 등장해서 사람들 기절시킬 일 있어?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클로든은 두 번 묻지 않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후드를 씌워 내 얼굴을 가렸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 모습을 확인했다. 후드 아래로 보이는 마른 턱선과 부스스한 긴 머리카락, 안 어울리는 금 장신구. 손을 가리는 긴 소매. 여기에 벨벳으로 만든 녹색 옷이 어우러져 스산하기까지 했다.
특히나 이 긴 머리. 당연히 거추장스럽고 보기 싫었다. 치렁치렁할 정도로 긴 건 아니었지만, 이 부스스한 머리를 처음엔 잘라보려고 했다. 하지만 칼로도 가위로도 잘리지 않았다.
가위에 마력을 담아서 자르면 될까 해서 시도해 보았더니 잘리긴 했는데…… 자르자마자 다시 쑥 자라났다. 그 순간에는 어찌나 황당하던지 비명을 다 질렀다.
놀라서 들어온 클로든이 바닥에 흩어진 내 머리카락을 보고 경악했지만, 나는 나대로 당황망조가 이만저만이 아니라 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무도회가 열리기 전 며칠 동안 나는 게이지가 깎이는 행동과 차는 행동을 반복했다. 6년 전, 전생의 내가 할 법한 행동의 감을 잡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80%까지 떨어지자 위기감이 느껴졌다.
떨어진 게이지를 회복하기 위해서 전생에 했던 것처럼 머리를 잘랐다. 안 잘릴 걸 알면서 평범한 가위와 칼을 머리에 대가며. 그나마 마침 그날 생각이 나서 다행이었다.
숨을 들이쉰 후 마력이 담긴 가위로 머리를 붙들어 싹둑 잘랐다. 당연히 머리카락이 가위질 한 번에 다 잘리지는 않았다. 삼분의 일쯤 뭉텅이로 잘려 나간 머리카락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쑤욱 하며 길어졌다. 이미 알고 있던 일인데도 버럭 비명이 나왔다.
전생과 마찬가지로 놀란 클로든이 뛰어 들어왔다.
“탑주님!”
이번엔 그래도 그의 표정을 볼 여유 정도는 있었다. 내 머리와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번갈아 본 그가 일순 기이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음. 그러고 보면 마지막에 모두들 배신감에 젖은 얼굴을 했으나, 클로든과 세르타는 어딘가 조금…… 미리 예감했다는 느낌도 있었다. 어쩌면 이때부터 이상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진짜 탑주와 가짜 탑주 모두 기행을 자주 한 편이라 6년 동안 크게 의심받은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따금 묘하다는 생각은 했으리라.
아무튼 그렇게 절반만 잘랐다가 다시 길어진 머리는 자르기 전보다 더 지저분해졌다. 6년 내내 아무리 단정하게 정돈해도 항상 좀 후줄근했다. 머리가 아니라 얼굴이 문제인 건지도 모르고.
“마차까지 모시겠습니다.”
세르타가 고개를 숙였다. 탑의 모든 기사와 시종, 하인들이 우르르 탑 밖까지 나와 나를 배웅했다. 세르타와 클로든은 나를 마차에 태운 뒤 마차 곁에 섰다. 문이 닫히자 약간 긴장이 되었다.
오늘 무도회에서 4황자를 만나게 될 거다.
그가 할 짓을 떠올리니 벌써부터 코끝이 비릿해지는 느낌이었다.
마차는 조용히 탑에서 황궁으로 들어가는 길을 지나 오늘의 무도회장인 상현(上弦)의 궁에 도착했다.
멀리서도 소란이 느껴질 정도였으나, 마탑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들어서자 점점 주위가 조용해졌다. 마차가 멈추고, 클로든이 열어준 문으로 세르타의 손을 잡고 내렸다. 순간 북적이며 서 있던 사람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얼어붙더니 홍해처럼 쩍 갈라졌다. 신경 쓰지 않고 그 사이를 지나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세르타의 호위는 거기까지였다. 문지기가 내 입장을 알리자 이번엔 무도회장이 일순 고요해졌다. 이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안 들어도 상관없는 내용일 게 뻔해서 굳이 귀 기울이지 않았다.
후드 아래로 사물을 보는 것에는 익숙했다. 흘끗흘끗, 고개를 돌려 주위를 확인했다. 가까이 있던 몇몇 사람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작게 울먹이는 소리와 그걸 막으며 다그치는 소리도 들렸다.
전생에는 처음 참가한 무도회의 분위기와 시야를 방해하는 후드 때문에 내 옆에 뭐가 있는지조차 몰랐지만, 6년 동안 익숙해지니 이제 돌아다니는 황궁 시종들의 이름과 사용되는 식기의 약력까지 알았다.
내가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다가 느리게 일어났다. 그런 후 슬금슬금 주변으로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했으나 먼저 말을 거는 목소리는 없었다. 전부 서로 눈치만 보며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당연했다. 나는 흘끗 거울처럼 잘 닦인 벽을 보았다. 역시 털 긴 까마귀가 옷을 입고 서 있는 것처럼 음침하다.
이 칙칙하니 음울한 모습을 하고선 눈을 깜빡이는 것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대마법사. 나 같아도 무서워서 말 걸기 싫겠다. 하지만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근처를 벌떼처럼 맴돌기만 하는 것이다.
실제로 내 주위에 몰린 이들은 원형을 이룬 채 무슨 제라도 올리는 것처럼 느리게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혹시 주술 같은 걸 거는 중인가? 자기 안전을 위한 방어 주술?
‘어디로 가야 하더라.’
첫 무도회. 클로든도 세르타도 곁에 없었다. 분명 갈 곳을 찾지 못해서 수상쩍게 어정거렸을 텐데, 그러다 어디로 갔었지? 기껏 채운 게이지가 깎이면 곤란했다. 고심하고 있자니, 저쪽에 유달리 반짝거리는 두 사람이 눈에 띄었다. 황제와 황후였다.
그들 역시 막 나를 발견하고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를 둘러싼 원형의 인파가 흐느적거리며 함께 움직였다. 거대한 해파리의 작은 뇌가 된 기분이었다.
황제와 황후 부부도 나처럼 둥근 막을 가지고 있었다. 두 개의 막은 물방울이 합쳐지듯 느리게 뭉개지며 가운데에 길을 텄다. 그 사이로 나는 이 자리에서 제일 높은 사람 둘을 만날 수 있었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탑의 주인이시여.”
두 사람이 나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나 역시 똑같이 인사했다. 이때의 대화 내용은 당연히 기억 안 나지만, 그냥 대충 끄덕이거나 네, 하고 대답하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전생에도 그랬을걸. 황제가 막 입을 연 그 순간이었다.
“꺄아아아아악!”
“…….”
나와 황후는 동시에 황제를 쳐다보았다. 입을 벌린 황제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몇 초쯤 지난 후에야 우리는 그 소리가 황제의 입에서 나온 게 아님을 알아차렸다.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무도회장 입구에서부터 비명이 점점 가까워지며 사람들이 우왕좌왕 길을 트고 있었다.
아. 대화 내용이 기억 안 날 만도 하다. 무도회가 시작하자마자 이 일이 터졌었지, 참. 황제가 입을 뻐끔거리다가 버럭 소리쳤다.
“이게 무슨……!”
정말로 ‘이게 무슨……!’이었다. 기적이 일어난 바다처럼 쩍 갈라진 사람들 사이로, 망토 달린 예복을 입은 장신의 사내가 서 있었다.
‘…….’
겉모습만 보면 그저 감탄만 나오는 남자였다. 깨끗한 금발, 보석처럼 붉은 눈, 흰 피부. 긴 속눈썹과 섬세한 이목구비. 발그레한 입술. 그럼에도 여리거나 부드러워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의 분위기와 표정, 체구 때문일 것이다.
일단 그는 키가 나보다 거의 머리 하나는 컸다. 체격은 전신이 탄탄한 근육으로 들어차 있어 거의 내 체중의 두 배는 나가지 않을까 싶었다. 직각으로 뻗은 어깨, 척추뼈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곧은 자세. 몸에 살짝 달라붙은 예복 바지의 선을 따라서 늘씬하고 탄력 있는 다리가 드러났다.
또한 그가 두른 분위기는 명백히 기사의 그것이었고, 표정은 언뜻 허술한 듯하지만 단호함이 묻어났다.
내게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당연하다. 전생의 마지막 순간에 저 인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시선을 똑바로 받았으니까.
산속에서 호랑이를 마주치면 꼼짝도 할 수 없게 된다는데, 내가 그걸 간접적으로 체험한 것 같았다. 그의 눈빛은 정말 짐승처럼 형형했다. 붉은색이 형광처럼 보일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지금 슬쩍 곁눈질로 본 그의 안광은 생각보다 칙칙한 편이었다. 하긴, 사고를 칠 때마다 그 눈빛을 드러내고 다녔다면 그는 진작 제거당했을 것이다.
그의 뒤에는 금 쟁반을 든 기사 하나가 서 있었다. 잠시 남자의 얼굴에 정신이 팔렸던 나는 훅 밀려든 비린내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기사가 반듯이 든 쟁반 위에 단정하게 올라간 건…… 눈을 희번덕하게 뜬 늑대의 머리였다. 황후가 비명을 질렀다. 황제는 버럭 소리쳤다.
늑대 머리를 들고 무도회장에 난입한 남자는 다름 아닌…….
“황자, 네가 미쳤느냐!”
4황자였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