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01.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법은
게다가 6년이나 지난 일이라 내가 이때 누워 있었던 거 말고 뭘 했는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뭐 대부분 그냥 누워만 있었지만. 그러다 손님이 오면 맞이하고, 스케줄은 클로든이 알려주었고.
‘…….’
잘 생각하자. 내가 능동적으로 뭘 했을 리 없다. 왜냐하면 나는 기본적으로 게으른 데다, 그때는 지금보다 멍한 편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4황자랑 만나서 뭘 하라는 거지?’
생각이 뒤늦게 근본적인 방향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친해져서 뭘 하라는 거지? 죽이지 말아달라고 손바닥이라도 비비라는 건가?
응?
“……!”
눈이 번쩍 뜨였다. 그거다! 4황자는 제위에 오르기 위해서 내……가 아니고 이 몸의 주인, 그러니까 가짜 악역 탑주 손에 쫓겨난 진짜 탑주를 찾아내 데리고 왔다. 그 과정에서 나는 사형을 당한 거고.
즉, 내가 진짜 탑주 대신 미리 그를 제위에 올려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러면 그는 굳이 진짜 탑주를 찾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어진다. 혹시 이미 찾는 중이라 해도, 제위로 꼬여서 약속을 받아내면 되잖아. 내가 널 황제로 만들어줄 테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날 죽이지 않겠다 신에게 맹세하라고.
물론 수상쩍게 생각하겠지만 무작정 맹세부터 시키자.
좋아, 그렇게 하자! 드물게도 의욕이 넘쳤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계속 생각했다. 내가 만나주는 것만으로 지금의 황자에게는 엄청난 영광이다. 그런데 내가 대놓고 널 황제로 만들어주겠다고 한다? 심지어 그 대가는 악역 하나 안 죽이는 거다? 솔직히 4황자한테는 엄청 남는 장사 아닌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책상 앞으로 가서 쌓여 있는 책과 서류를 하나씩 훑어보았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가 전생에 같은 행동을 했었는지 게이지가 약간 올랐다. 예상치 못한 소득이었다.
책상에는 상장 비슷하게 생긴 얇은 책자가 있었다. 펼쳐 보자 옷의 디자인화였다.
와. 역시 일이 하나 풀리기 시작하면 술술 꼬리를 무는 법이라더니. 나도 모르게 손으로 디자인화를 팍 내리쳤다. 감탄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물론 옷 디자인에 감탄한 건 아니다.
옷 그림을 보고 나서야 기억난 건데, 빙의하고 나서 거의 곧바로 무도회가 열렸다.
거기에는 당연히 4황자도 참가했는데, 그 방식이 평범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하게 은둔하긴 했으나 때로 한 번씩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곤 했다. 완전히 선을 넘지는 않는 정도에서 사고를 쳤다고 해야 할까. 그가 6년 동안 친 몇 번의 사고 중 한 번이 바로 그 무도회에서 있었다.
그게 어떤 사고였는가 하면…….
“탑주님.”
이번엔 진짜로 깜짝 놀라서 몸을 파르르 떨었다. 죽느냐 죽느냐의 기로에서 결연하게 고민하던 사람 치고 좀 꼴사나웠다. 이번에도 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원래 나도, 내가 빙의한 가짜 탑주도, 클로든을 포함하여 누군가의 노크에 대답을 안 하는 편이었다. 때문에 클로든은 잠시 후 자연스럽게 내 침실 문을 열었다.
“곧 손님을 만날 시간이십니다.”
“아, 손님. ……이임?”
맞다, 손님. 첫날 손님이 찾아왔었다. 떠오른 기억에 자연스럽게 대꾸하다 말고 급히 말투를 바꿨다. 어미를 어색하게 끌어 올리자 클로든이 살짝 눈썹을 치켜떴다. 거기서 나는 한술 더 떴다.
“……이요?”
“……예?”
클로든의 얼굴이 이상해지는 것과 동시에 게이지가 올랐다. 전생에 클로든에게 손님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 반응은 ‘네? 손님이요?’였다. 게이지를 올리기 위한 내 피눈물 나는 노력이 가상해서 클로든의 당황한 얼굴은 쉽게 모르는 척할 수 있었다. 다행히 클로든도 나를 모르는 척했다.
“크로일러 경이 이미 도착해 있습니다. 들라고 할까요?”
가짜 탑주가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클로든의 평정심이 보통이 아닌 건지, 그때도 이렇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넘어갔었다. 오늘 찾아온 손님은 크로일러 경, 세르타 크로일러였다. 내가 눈알을 굴리다 끄덕이자 클로든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조용히 나갔다가 얼마 후, 묘한 인상의 사내를 데리고 들어왔다.
“가장 높은 탑의 주인을 뵙습니다.”
붉은 머리에 느슨한 듯하면서 꼬리만 치켜 올라간 눈매, 노란색 눈. 흐린 눈웃음. 어딘가 은은하게 수상한 분위기를 휘감은 기사. 그는 탑주를 호위하는 직속 기사단의 기사단장 세르타였다. 이 소설에서 내가 본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이 중에 흑막을 하나 고르시오.’ 한다면 단연코 나는 그를 골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얼굴과 분위기만 보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세르타는 정말 오해를 사기 좋게 생긴 흑막형 얼굴이었으나, 사실 그냥 자기 자리에서 제 할 일을 다 하는 충직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적어도 내가 죽을 때까지 본 바로는 그랬다. 청렴하고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오는 데다 내가 비록 가짜였을지언정 악한 짓을 하진 않았다고 날 변호해 주기까지 했다.
차와 다과를 준비해 주고 클로든이 나간 뒤, 세르타는 곧바로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요새 식사를 많이 남기신다고 들었습니다.”
이 근래에 가짜 탑주가 그랬던 모양이다. 아까 나도 갑자기 네발로 기려고 하다 보니까 제대로 못 먹었고.
“그, 살이 좀 찐 것 같아서…….”
누가 들어도 대충 얼버무리는 말에 세르타의 얼굴엔 더더욱 걱정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전생의 나는 이쯤에서 내 지위를 파악하고 경어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였다. 민망하기도 했다.
빙의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어허, 여봐라! 여기 물을 대령하거라!’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아니었다. 나는 보통 사람 수준의……, 아니, 보통 사람보다 좀 숫기가 없는 편이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세르타가 넌지시 말했다.
“혹시 몸이 무거우시다면 제가 대련을 해드리겠습니다.”
“아니?”
전엔 뭐라고 했더라. 순간적으로 너무 지금의 내가 할 법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아마 세르타와 대련을 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몰라서 눈을 끔뻑거렸었겠지. 그래도 다행히 게이지 변화는 없었다.
몸이 좀 무겁다고 세르타와 대련? 동물이랑 소통하고 싶으니 냅다 코뿔소에 올라타겠다는 거랑 똑같은 말이었다. 대련할 때 그는 자비가 없다. 내 거절에 세르타가 걱정스럽게 찌푸린 얼굴로 나를 보았다.
“탑주께서 정적인 걸 좋아하시는 건 알지만, 그래도 조금은 몸을 움직이셔야 합니다. 대련이 싫으시다면 저와 함께 산책은 어떠하십니까?”
“……나중에.”
그러자 세르타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나중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영원까진 아니지. 산책 정도야 할 테니까. 계속 그 화제를 물고 늘어지면 내가 싫어할 거라 생각했는지, 세르타가 말을 돌렸다.
“남쪽 지방에서 좋은 과일이 들어와 클로든에게 건네두었습니다.”
고맙다는 말도 없이 고개만 까딱였지만, 세르타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또 지난번에 말씀하신 고서도 전부 구해 서고에 비치했고요. 사서가 이미 정리를 끝냈을 테니, 언제든 시종을 보내시면 됩니다. 지금 필요하시다면 제가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것도 나중에.”
“예.”
그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장이라는 직위에 있으나 세르타가 하는 일은 내 보모에 가까웠다. 가까이서 시중을 드는 게 클로든이라면, 내가 필요하다고 말한 걸 구해 오거나 바깥일을 책임지는 게 세르타였다. 사실 내가 빙의한 몸에 호위 같은 게 필요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호위……. 탑주, 유리 아이엘레스는 한 번도 그런 걸 필요로 해본 적이 없는 몸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천둥과 번개로 세상을 뒤덮는 것도 가능한 마법사. 오로지 가지고 있는 힘만으로 황제와 동등한 권력을 보장받으면서 어떤 책임도, 의무도 없는 존재.
모든 마법사들의 정점이자, 그들의 왕이며, 그들 모두가 힘을 하나로 합쳐도 대항할 수 없는, 사람이라기보단 마법의 탑 그 자체. 말하자면 신. 그게 가장 높은 탑의 탑주였다.
당연히 그 주위로는 무수한 사람이 모여들었다. 유리를 경애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이용하려 하거나, 빌붙으려 하거나. 대부분 간신배였지만 클로든과 세르타를 포함해 몇몇은 정말로 ‘유리’를 사랑하는 이들이었다.
내가 가짜라는 게 밝혀진 순간 그들의 표정을 떠올리면 지금도 입맛이 쓰다.
“산책은 해 질 무렵에라도 꼭 가십시오. 어제 가지치기를 해서 한동안 정원이 조금 다르게 보일 거고, 오늘은 노을도 아름다울 거라더군요.”
배신감으로 굳어졌던 딱딱한 얼굴이 지금의 평온한 얼굴과 겹쳐진다. 나는 오묘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이 내가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넘어갈 수는 없을까? 끝까지 말이다.
4황자의 성격을 잠시 추측해 보았다. 그가 진짜 유리를 찾아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황제가 되기 위한 수단? 아니면, 가짜 탑주를 가만히 둘 수 없다는 정의감이었을까. 가능하면 전자이길 바란다. 그래야 내 계획대로 그가 날 순순히 놓아줄 확률이 높아지니까.
후자라도 괜찮긴 했다. 그 정도로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니 한 약속은 지키겠지. 그러면 나와 진짜 유리를 자연스럽게 바꿔치기해서 내가 이들의 그 표정을 다시 볼 일이 없게 될 거다. 그러면 좋은 거지…….
“물러가겠습니다.”
세르타가 돌아갈 때까지 나는 끄덕이는 것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해 질 녘에 산책은 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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