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01.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법은
전생, 전생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 1회차라고 해야 하나? 아니. 그러면 3회차, 4회차도 있을 것 같아 불길하니까 전생이라고만 해두자. 그때 내가 아무렇게나 산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진짜로 죽을죄는 지어본 적이 없다. 학살을 자행한 적도, 백성을 착취해 세금을 떼어먹은 적도 없단 말이다.
죄라면 내가 설마 가짜에 악역일 거라고 생각도 못 한 것 정도인데, 그건 이 재미없는 소설을 다 읽어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즉 끝까지 안 읽은 게 죄다. 근데 판타지 소설 하나 하차한 게 죽을죄란 말인가? 진짜로 더럽게 재미없었는데. 이건 객관적 평가다. 연재란 조회수나 댓글도 암전이었으니까. 나만 안 읽은 것도 아니란 말이다. 진짜 다시 곱씹을수록 너무하다.
아무튼, 회귀하고 나서는 이렇게 상태창이 생겼다. 상태창은 좋게 말해 심플하고, 대놓고 말하면 초라했다. 체력, 마력, 진행 중인 미션이 전부였다. 마력은 999+, 거의 무한이라는 뜻인 것 같다. 그에 비하면 체력 12. 설마 체력도 풀 스탯이 999인 건 아니겠지. 999에 12면 나는 거의 식물이다. 어쩐지 뭘 해도 체력이 달리고 무기력하더라니, 12여서였나. 그렇다면 수긍이 가지.
진행 중인 미션……. 4황자를 만나서 친해지는 것. 그럼 아무래도 이대로 따라가면 전생 같은 결과는 나오지 않을 거라는 뜻 아닐까? ‘두 번째는 좀 더 나의 상황을 알아가며 죽어요♥’도 아니고 일부러 상태창까지 만들어서 고생시킨 다음에 또 죽이겠다는……, 아냐, 아냐.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안이한 건지 몰라도, 내가 뭐라고 이 세계가 나한테 그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굳이 트럭으로 들이받아 끌고 오면서까지. 아닐 거다.
나는 끄트머리가 희미하게 깎인 게이지를 노려보았다.
‘전생이랑 다른 행동을 하면 이 게이지가 깎인다 이거지.’
내가 지난 6년 동안 익숙해진 대로 자연스럽게 하인을 대하자 게이지는 미세하게 깎였다. 깎여 나간 가장자리가 조금 덜 칠해진 그림처럼 눈에 거슬렸다.
시계를 한 번 보았다. 슬슬 시종장이 식사를 가지고 올 시간이었다. 전생과 행동을 다르게 했을 때, 이 게이지가 어떤 식으로 얼마나 깎이는지 일단 시험해 볼 필요가 있었다.
“…….”
옷도 안 갈아입고 침대에 가만히 앉아서 문만 노려보았다. 전생 첫날엔 분명히 옷을 갈아입을 생각조차 못 한 채 그대로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후에는 귀찮아서 실내복에 아무거나 하나만 걸친 채로 지냈고.
그렇게 붙들어 매인 듯 안 흘러가는 시간을 20분 정도 버텼을 때, 드디어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단 나는 깜짝 놀라는 척해 보았다. 전생에 그랬으니까. 너무 작위적이었나? 흘끔 상태창을 보자 게이지는 그대로……였다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1픽셀 정도! 일부러라도 똑같은 행동을 하면 이렇게 올라가는 건가. 쉬운데?
“탑주님, 클로든입니다. 조식을 들이겠습니다.”
클로든, 내 시종장이었다. 나는 조금 더 기다렸다가 그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이 나라에서 아침에 주로 먹는 음식 냄새가 솔솔 풍겼다.
이곳의 음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주 맛있었다. 이국적인데도 마치 태어날 때부터 먹었던 것처럼 익숙하고 입에 맞았다. 뭘 어디에 발라서 먹어야 하는지 가끔 헷갈릴 때도 있었지만, 주위 사람들 눈치를 보면서 금방 감을 잡았다.
테이블에 금으로 테두리를 두른 접시들이 하나둘 차려졌다. 마지막으로 작은 물그릇이 놓이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양배추와 닭고기를 넣은 토마토 수프에 동전만 한 크기의 작은 빵과 치즈를 떨어뜨려 넣고, 숟가락을 들어 한입 머금은 순간.
챙채래쟁챙챙챙챙그랑…….
마치 게임에서 무기 터질 때 나는 것 같은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게이지가 왕창 깎였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멍청한 얼굴로 숟가락을 든 채 굳었다.
“…….”
“왜 그러십니까?”
식사 시중을 들려고 가까이 서 있던 클로든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혹시 식탁에 모자란 게 있는지 얼른 살피기 시작했다. 문제는 식탁이 아니라 나한테 있었으므로 그는 당연히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다.
‘깎이는 기준이 대체 뭐야?!’
이 정도면 투명한 확률 공개가 필요했다. 아니, 이건 확률이 아니겠지? 아무튼 뭐라도 공개할 필요가 있었다.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애석하게도 이 시스템에 CS 메뉴는 없었다.
심지어 무시하기에는 너무 엄청난…… 엄청난 수치가 깎였다.
거의 20%쯤 깎여버린 피통을 멍하니 보다가 결심했다.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되었으니, 6년 전 했던 행동을 그대로 하는 수밖에. 나는 눈을 딱 감았다.
클로든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야 당연했다. 나는 숟가락을 담그는 물에 손끝을 씻고, 콩 페이스트에 조금씩 섞어 먹으라고 나온 짠 소스를 한 스푼 떠서 먹은 뒤, 식사 마무리에 미지근해졌을 때 마시는 차를 뜨거운 그대로 벌컥벌컥 마셨다.
“타, 탑주님……?”
클로든이 당황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못 들은 척 손으로 하나씩 집어 먹는 작은 빵을 숟가락으로 한꺼번에 세 덩이를 떠서 먹었다. 두 발로 걷다가 갑자기 네발로 기는 기분이었다. 불쌍한 시종장은 경악한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애써 안경 너머 흔들리는 시선을 무시하며 문명에서 급격히 멀어진 식사를 마치고 나자, 게이지는 다행히 거의 회복된 뒤였다.
“후식을 들여오겠습니다.”
그사이 클로든은 감출 길 없던 황망함을 수습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말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식사 후에는 단것을 싫어하는 나도 반길 만큼 맛있는 디저트가 나오지만, 전생에 거부했으므로 지금도 거부해야 했다.
식사한 테이블이 깨끗하게 치워지고 클로든과 시종, 하인들이 모두 나갔다. 나는 밀려드는 정신적 피로감에 침대로 가서 드러누웠다. 먹고 바로 누워도 이런저런 질병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전생처럼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려 덮자 잘했다고 칭찬하듯이 게이지가 또 조금 올라갔다.
‘장난하냐?’
그런 짓까지 했는데도 게이지는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았다. 급하게 깎였으면 급하게 차야지, 대체 기준이 뭐냐고. 눈알이 빠지도록 상태창을 꼬나보다가 베개에 머리를 푹 묻었다.
상태창이 하는 짓은 열받지만 어차피 소통할 길도 없는 거, 상대 없는 싸움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상태창이라는 놈이 이렇게 피도 눈물도 없다는 걸 안 이상 내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하나였다. 이놈이 제시한 미션. 4황자와 친……, 일단 만나기.
어떻게?
빙의 초반, 그러니까 나한테만 6년 전일 때 나는 4황자에 대해 쥐꼬리만큼도 몰랐다. 그는 자기 궁에만 틀어박혀 있는 사람이었고(사실 틀어박혀 있었던 게 아니라 비밀 통로로 부지런히 궁 밖을 드나들며 반란 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거지만), 나는 뚝 떨어진 이세계에서 뭘 해야 할지 몰라 침대에 누워 있기만 했다.
당연히 4황자를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다. 가끔 그가 사고를 칠 때나 잠깐씩 얼굴 보는 게 다였다. 딱히 대화도 한 적 없다. 물론 아예 안 만난 게 아니기 때문에 얼굴도 목소리도 알긴 하나, 그게 다였다.
전생에는 그래도 괜찮았다. 누워만 있어도 시간은 멋대로 흘러갔고 내가 해야 할 일은 전부 시종과 하인들이 해주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찾아오는 사람이나 만나고 가끔 마법을 쓰고, 뭐 그 정도로 꿀만 쪽쪽 빨면서 살았지만…… 이젠 아니다.
4황자와의 미션을 해결하지 못하면 높은 확률로 일이 전생과 똑같이 흘러갈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 내가 죽는다는 거였다. 그런데 4황자를 만나려면 전생과 다른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러면 게이지가 깎이겠지. 이 게이지가 다 깎이면 뭔지 몰라도 나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상황을 뭐라고 부르지? 햄릿인가?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아니다. ‘죽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였다. 뭘 해도 죽는다. 그럼 살 확률이 높은 쪽을 고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게 고른다면 역시 황자를 만나는 쪽이었다. 황자를 못 만났을 때의 결과는 확실하게 죽음이다. 하지만 게이지가 다 깎여서 받는 페널티는 적어도 죽는 것보단 나을 거다. 그리고 게이지는 다시 채워지기도 하니까.
다시 채워지는 것. 이게 중요했다. 어차피 6년 전의 하루하루를 상세히 기억하는 게 아닌 이상 게이지가 안 깎일 방법은 없다. 그러면 차라리 재화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게임도 스테이지에 진입하려면 돈이든 뭐든 써야 하잖아.
그렇게 생각하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6년 동안 뭘 했는지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해도 굵직한 사건은 그래도 떠오른다. 거기에 더해서 그 무렵 내 행동 패턴을 기반 삼아 유추하면 어떤 일에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하는 것도 썩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안 되면…… 안 되면 또 죽는 거지, 뭐.
“좋아, 그럼 황자를…….”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를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하.”
두 팔을 벌리고 누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몸의 가장 좋은 점은 자연 치유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내 원래 몸은 불규칙한 생활과 과로에 전 운동 부족 직장인 그 자체였기 때문에, 처음 이 몸에 빙의했을 땐 신세계였다. 역류성 식도염과 만성 피로가 없는 몸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감동이다. 비록 체력이 12였지만.
그렇게 누워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휴대폰이 있으면 뉴스라도 무한히 새로고침했을 텐데 당연히 없었고, 뭘 손에 들고 꾸물거리는 것조차 귀찮았다. 누워서 자거나 멍하니 있는 게 그저 최고였다. 그러면 시종과 하인들이 알아서 나를 먹이고 입히고 사람을 만나게 해주었다. 정말 너무나 좋은 인생이었다. 죽기 전까진.
“참 좋았는데…….”
드러누운 채 천장의 무늬를 세기 시작했다. 무늬 하나에 방법 하나를 생각하는 건 어떨까 싶었다. 하나, 둘, 셋…….
젠장.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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