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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2화 (2/93)
  • 2화

    01.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법은

    「제국에서, 대륙에서 가장 높은 탑에는 고귀한 마법사가 살았다. 그의 이름은 유리 아이엘레스. 지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였다. 그의 존재는 신과 비슷했다. 모두가 그를 섬기며 존경하고 두려워했다.

    (…중략…)

    탑의 주인이라는 존재가 있었으므로 제국은 대륙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다. 탑의 주인은 세계의 열두 달, 첫 번째 달 아르타의 달에서부터 말리, 프라에, (…중략…) 니에베의 달까지 존경을 안 받는 날이 없었다. 신을 섬기는 신전도 모두…….」

    가장 높은 탑의 마법사는 대충 이런 식으로 서술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책을 초반에 하차했다. 설정 구멍이 너무 많고 재미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초반엔 구멍투성이인 설정 설명만 미친 듯이 해대서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짐작도 안 갔다.

    그러니 알 리가 없지 않은가. 내 정체가 ‘진짜’ 유리 아이엘레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세상에. 그의 마법을 훔쳐 무려 6년이나 그 행세를 한 악역 나부랭이였다.

    6년 동안 그런 꿀을 빨면서 한 번도 의심하지 않다니. 내 인생에 그렇게 좋은 일이 일어날 리 없는데 말이다. 이래서 책은 완독해야 하는 모양이다. 알았다면 뭐라도 대책을 세웠을 텐데.

    아니, 대책을 세울 수 있었을까? 나는 악역의 이름조차 모른다. 그 소란 속에서 악역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도 없었기에 끝까지 몰랐다. 소설 어딘가에서는 서술되었겠지만 나는 알 길이 없었다. 끝까지. 그래, 죽을 때까지.

    군사들은 순식간에 탑을 올라왔고 내 마법은 이미 ‘진짜’ 유리에게 넘어간 뒤였다. 나는 순식간에 그냥 마탑을 차지하고 있던 악역 1이 되고 말았다.

    진짜 유리를 데리고 온 군대의 선봉에 있는 건, 내가 빙의했을 무렵 비중 없는 캐릭터 1로 넘기고 관심을 껐던 황자였다. 황자와 그 뒤에 선 진짜 유리의 얼굴을 본 순간 직감했다. 아, 저쪽 분들이 진짜 주인공급 주요 인물이구나.

    황자는 나를 탑에서 끌고 내려가서 무자비하게 죽였다.

    뭐, 어떻게 보면 그건 인도적인 죽음이었는데…… 나한테는 끔찍했다. 트럭에 치여 죽어가던 순간이 짧아서 기억도 안 나기에 더 그런 것 같다.

    아무튼 내 두 번째 죽음은 그러했다. 죽고, 눈을 떴더니 다시 익숙한 이 방이었다. 나는 처음엔 황자가 나를 죽이는 척 안 죽이고 살려준 건가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 없다. 사실 내가 가짜인 줄 알았는데 가짜가 아니어서 극적으로 목숨을 부지하게 된 걸까? 그렇게 온갖 생각을 다 하다가 상태창을 발견한 거다.

    그럼 이제, 상태창의 날짜 이야기로 돌아가서…….

    [마법력 1230년 실로니의 달 12일]

    내가 황자의 습격을 받고 죽은 건 1236년 포레의 달이었다. 이 실로니니 포레니 하는 건 이 세계의 달 이름이다. 대충 12개월과 비슷했고 실로니는 6월, 포레는 9월이었다.

    달이 다른 건 그렇다 치고 연도가 달랐다. 무려 6년 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날짜는 내가 맨 처음 빙의했던 그달, 그날이다. 매해 이맘때쯤 되면 감상에 젖었기에 잘 알았다.

    6년 3개월 전으로 날짜가 표시된 상태창.

    허…….

    상태창은 옅은 갈색 톤에 디자인도 고전적이라 역시 약간 촌스러웠다. 폰트도 16비트 게임처럼 미묘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게 아니라 아무래도 이 날짜였다. 날짜가 잘못 표시된 걸까, 아니면…….

    그 때 마침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 하인이 들어올 시간이었다.

    “들어와라.”

    익숙하게 말하자 하인은 고개를 숙인 채 쪼르르 들어와 씻을 물과 수건이 올라간 쟁반을 내려두었다. 이 하인은 바지 정장 차림에 머리를 짧게 자르고 앳되게 생겨 꼭 소년처럼 보이지만, 사실 나보다 연상인 스물네 살의 여성으로 열두 살과 열네 살 된 동생들이 있다. 별로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다. 앞으로 중요해질지 어떨지는 몰라도.

    “물러가겠습니다.”

    “잠깐.”

    나는 돌아서려는 말리를 불러 붙잡았다. 말리가 의아한 얼굴로 다가와 고개를 더 깊게 조아렸다.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되지?”

    “실로니의 12일입니다.”

    “……연도는?”

    말리는 잠시 움찔했다. 당연했다. 보통 ‘올해가 몇 년이지?’라는 질문은 잘 안 하지 않나. 게다가 나 같은 사람이. 그러나 프로 하인답게 그녀는 바로 대답했다.

    “1230년입니다, 탑주님.”

    “알겠다, 나가 봐라.”

    아무래도 내가 이상해 보였는지 말리는 머리를 갸우뚱하고는 부리나케 자취를 감췄다. 뜨거운 물에서 김이 살짝 가실 때까지 나는 상태창과 눈싸움을 계속했다. 지금은 1230년이 맞았다. 상태창은 돌아온 걸 환영한다고 말한다. ……6년 전으로 말이지.

    “……하.”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러니까 그거다.

    빙의해서 회귀까지 한 거다.

    이게 말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이미 내가 빙의를 한 시점부터 생각하는 게 무의미한 이야기였다. 빙의했는데 또 회귀도 할 수 있지. 그리고 없던 상태창이 생길 수도 있는 거고. 말했다시피 나는 이런 일에 놀랄 만큼 아마추어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상태창이라는 건 나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거 아닌가? 회귀했다. 2회차다. 게임도 두 번째 트라이에서는 난이도가 낮아지곤 한다. 그것처럼, 난이도가 낮아지면서 이 상태창이 생긴 걸 수도 있지.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는 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안 그러면 죽는다고.

    ‘진짜 유리가 나타나기 전에 해결책을 세우지 않으면 나는 죽는단 말이야.’

    그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양잿물도……, 아, 양잿물 먹으면 죽지. 어쨌든 신체에 위해가 가는 것 빼고는 뭐든지 다 할 수 있다. 뭐라도 해야만 했다.

    그럼 우선…… 이 상태창이 뭘 해줄지부터 한번 볼까. 손끝으로 <예>라는 글씨를 살짝 눌렀다. 그러자 상태창이 한 번 깜빡거리더니, 글자가 바뀌면서 아래에 길쭉한 바가 하나 떠올랐다. 게임의 피통이랑 비슷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피통은 생기자마자 불길한 소리를 내며, 약간 깎였다.

    ‘왜……, 왜 깎인 거야?!’

    이 피통의 게이지가 뭘 뜻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파삭!’ 하는 효과음이 도저히 좋은 의미로는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게 등골이 오싹하면서 나쁜 예감이 머리를 강타했다.

    [가장 높은 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상태창에서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신은 특정 조건을 만족할 때까지는 전생의 캐릭터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조건 보기

    그냥 한 번에 보여주면 안 되냐, 진짜. 짜증스럽게 ‘조건 보기’를 눌렀다. 그러자 상태창에 깜빡깜빡 반짝이 효과가 들어가더니 차라랑 소리와 함께 글자가 떠올랐다.

    [조건: 4황자와의 친애]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4황자와의…… 친애? 그냥 만나는 것도 아니고 친애? 그 전까지는 전생이랑 비슷하게만 행동할 수 있다고?

    순간 깎인 게이지가 떠올랐다. 설마 그래서 깎인 건가? 처음 빙의하고 나서 나는 당연히 주위를 둘러보고 별 꿈이 다 있다 생각하며 다시 자다가 하인의 손에 깨워졌다. 그런데 그때와 다르게 행동해서?

    머릿속을 자발적 물음표 살인마의 영역으로 만들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글자를 눌러보았다. 또다시 차라랑 소리와 함께 다른 글자가 떠올랐다. 배경음 끄기 안 되나.

    친애를 위해서는 우선 만남부터! 4황자와 만남을 가지세요.

    “……뭐.”

    뭐 어쩌라고.

    방법도 안 나와 있다. 그냥 무턱대고 ‘4황자와 만나세요’라고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하나, 전생이랑 똑같이 행동하면서 전생에 만난 적 없는 사람을 어떻게 만나는가. 둘, 4황자는…… 숫자부터 불길한 그 남자는…….

    전생에 날 죽인 사람이었다.

    “하…….”

    깊은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대체 몇 번째 한숨이지. 이러다 땅이 꺼질 수도 있다. 땅이 꺼지면 바닥으로 추락하겠지, 하.

    어떻게 하필 황자여도 네 번째 황자일 수가 있는가. 4는 하여간에 좋지 못한 숫자였다. 이 알쏭달쏭 이세계에서 6년을 살았어도 유전자에 새겨진 4를 향한 찜찜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4황자 손에 죽으면서 더 강렬해졌으면 강렬해졌지.

    4황자가 어떤 인간인가? 그는 자기 궁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았고, 남들의 눈에 띄는 일도 적었다. 이따금 내 귀에까지 들어오는 사고를 치긴 했지만, 역시 어리석다는 평가만 더 깊어지는 정도의 일이었다. 그가 일으키는 말썽을 듣고 ‘후, 어쩌면 잠룡인지도 모르겠군.’ 하며 눈을 빛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모친은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집안 출신이었고, 그 본인이 딱히 무슨 공을 세운 적도 없으며, 황제 또한 넷째 아들에게 관심이 없는 걸 넘어 가끔 그가 치는 사고 때문에 미움만 가득했으므로 그와 제위는 지구와 달만큼 멀리 있었다.

    게다가 모습을 잘 드러내지도 않는데(어쩌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그는 이런저런 온갖 소문을 달고 다녔다. 몸이 어디가 불편하다든가(이 소문은 그의 겉가죽이 매우 멀쩡했기 때문에 별로 대두되지 않았다), 광증을 몰래 숨기고 있다든가(숨기고 있는데 소문이 난 거면 이미 숨기기에 실패한 거 아닌가?), 성적으로 상당히 문란하다든가(이건 별로 자세히 알고 싶지 않은 부분이다)……. 아무튼 제위 계승에 불리한 가십거리.

    소문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그가 사고뭉치든 은둔형 외톨이든, 나는 그에게 말리 에반의 동생에게 가지는 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그렇게 관심 밖에 있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진짜 유리’를 데리고 나타나서 단칼에 날 죽이리라고 예상이나 했겠는가. 뭐, 칼로 죽인 건 아니었지만.

    죽던 그 순간을 생각하니 몸이 파르르 떨렸다. 어쨌든 지금은 회귀해서 살아 있으니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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