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01.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법은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십니까?”
“흐아악!”
별안간 눈앞을 가린 그림자에 저절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심장이 바닥으로 뚝 떨어진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하자 소름이 돋은 등허리가 벽에 닿았다. 거기서 도망갈 틈도 없이, 내 양쪽 옆을 큼지막한 손이 턱, 턱, 짚었다.
“거긴 뭐가 들었어요? 사탕? 과자?”
사탕은 아니고 사탕만큼 반짝거리는 다른 게 들어 있긴 한데, 지금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다. 나는 보따리를 생명 줄처럼 움켜쥐고 앞에 있는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마침 회색 구름이 해를 가려 주위가 어두워지고, 내 앞의 남자에게 진 그림자도 더욱 짙어졌다.
회색 그림자에 덮인 그의 얼굴에서 시뻘건 두 눈동자가 유달리 선명하게 보였다.
“자꾸만 이렇게 몰래 나가시면 곤란합니다.”
“모, 몰래 나가려던 게 아니라…….”
“아니라?”
“그게……, 그냥 잠깐…….”
“그냥 잠깐?”
무섭다.
목덜미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나는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며 보따리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정말 고민입니다. 왜 자꾸 이렇게.”
“…….”
“도망을 가시는지.”
도망이라니! 누가 들으면 내가 뭐 죄라도 지어서 그런 줄 알겠다!
사실 도망은 맞았다. 나는 지금 이 남자를 피해 어떻게든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이번이 열한 번째 시도였다. 설마 이 남자가 횟수까지 알진 않겠지만…….
“벌써 열한 번째잖아요.”
아는군.
그렇게 생각하자 몸이 더 떨렸다. 남자는 벽에 짚었던 두 손을 떼더니 그 손으로 가만히 내 양쪽 팔뚝을 쥐었다. 그의 손은 체온이 높은 편인데도 팔에 닿자마자 온몸이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팔뚝을 쥔 손은 조금씩, 조금씩 힘이 강해져 결국에는 내 입에서 신음을 끌어냈다.
“아파!”
“흐음.”
아프다고 하는데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더니 오히려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분명히 양쪽 팔뚝에 멍이 들 것이다. 확 노려보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날 똑바로 마주 보았다.
“아……!”
‘아프다고!’ 하고 소리치며 온몸을 버둥대자, 그제야 손의 힘이 풀어진다. 팔이 욱신거리고 얼얼했다.
“죄송합니다. 신음이 듣기 좋아서 그만.”
“이……, 미, 미.”
미친놈이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데 차마 그만큼의 용기는 내게 없었다. 결국 도레미 중 세 번째 음계만 웅얼거리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몸을 옆으로 돌리려 했으나 그조차 쉽지 않았다. 그는 내가 도망가지 못할 정도의 틈새만 남기고 내게 밀착한 채였다. 살짝 닿은 다리를 떼려 하자, 그는 재빨리 제 다리를 밀어 넣어 은근하게 문지르듯 나를 눌렀다.
“몸으로라도 꾀면 당신이 도망갈 생각을 안 하실까요?”
그 말에 나는 질겁하며 고개를 휘저었다. 몸으로 꾀겠다고? 지금보다 어떻게 더? 무슨 짓을 하려고! 그가 손을 들더니 손등으로 내 뺨을 쓰다듬었다.
“왜 이렇게 놀라십니까?”
“무, 무슨 짓을 더 하려고. 지금도 충분히…….”
그가 스르르 웃었다. 섬뜩하다.
“설마 그 정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행위의 전부라고 믿으시는 건 아니겠죠.”
“…….”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왔다.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부터 사람 몇의 발소리가 요란하게 가까워졌다.
“방해꾼이 왔네요.”
아니…….
어느새 모습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와 남자를 보더니 즉시 무릎을 꿇었다. 그는 감흥 없는 얼굴로 손짓하며 내게서 조금 물러났다. 기사단 정복을 입은 그들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였다. 마지못해 나도 손짓하자 그들이 일어났다.
“탑주님, 폐하.”
일행의 가장 앞에 있던 사람이 그렇게 말하며 한 걸음 다가왔다. 시야 한쪽 구석에서 작게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보였지만,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남자가 나를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였다.
폐하. 이 제국의,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황제. 그게 이 남자의 지위였다. 그리고 나는…….
***
심호흡.
심호흡은 인간이 느끼는 수많은 불편을 해소한다. 불안, 초조, 두통, 소화 불량, 감정 과잉, 각종 통증, 빈맥과 호흡 곤란 등등 심혈관계의 이런저런 문제점까지……. 나는 깊은숨을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입으로 내쉬었다.
“후…….”
두어 번 반복했다.
별로 마음의 평안이 오는 것 같진 않고 그냥 평범하게 숨 쉬는 것보다 조금 귀찮을 뿐이었다. 미진한 효과에 혀를 차며 실눈을 떴다. 여전히 있었다.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마법력 1230년 실로니의 달 12일
유리 아이엘레스
체력: 12
마력: 999+
시작하시겠습니까?
<예>
<아니요>
……상태창이.
세상에 죽어본 적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있을지도 모르지.
근데 두 번 죽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두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다. 한 번 죽었다 깨어났을 때 나는 원래 살던 곳과는 다른 세계에 와 있었다. 그리고 다시 죽었다가 깨어나니 또다시 먼젓번 깨어났던 그 세계였다. 그런 판타지를 겪고 나니 눈 뜨니까 상태창이 보인다는 이 상황도 그리 놀랍지 않았다. 이 정도에 놀랄 만큼 아마추어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오히려 놀란 건 다른 부분이었다. 이 상태창이, 지난번에는 없었다가 갑자기 나타났다는 사실. 그리고 그 상태창에 표시된 날짜.
어딘가 고전 게임, 예를 들자면 판타지 세계에서 딸을 키우거나, 여왕 후보가 되어 영토를 육성하거나, 연금술사 소녀가 여행을 떠나는 그런 게임에나 나올 법한 클래식 디자인. 괜찮았다. 요즘 감성인 내 눈엔 좀 촌스럽긴 해도.
아니, 내가 요즘 감성을 가졌다고 말하긴 어려운가? 어쨌든 나는 그쪽 문명의 세계를 떠나 여기서 6년이나 살았으니까 그쪽의 요즘 감성은 어떨지 과연……. 강산이 변한다는 세월의 절반 이상이 흘러갔는데 그쪽 감성도 60%는 바뀌었겠지. 그래, 그렇다. 나는 이미 이 세계에서 6년을 살았다.
그런데 그 6년 동안 상태창은 단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다.
처음엔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게, 내가 깨어난 이 판타지 세계는 책 속이었다. 게임이 아닌 책. 그것도 퓨전이나 현판 요소가 들어가지 않은 정통 판타지 소설, 「가장 높은 탑의 마법사」. 해서 빙의하고도 상태창의 부재에 의문을 가진 적이 없다. 이건 장르상 그런 게 안 되는 거겠거니 해서.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어느 추운 겨울날. 나는 대표 새끼 말고는 아무도 원치 않는 회식을 마치고 새벽 4시에 비틀거리며 귀가하다 트럭에 치였다.
그렇다. 환생 트럭이었다.
나는 고아원 출신에 친구도 없고 직장 동료들과도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겨울밤 버려진 시신을 누가 장례나 무사히 치러줬을까 걱정될 정도로 그쪽에는 연고와 미련이 없었다. 오히려 빙의한 후 처음에 적응하느라 땀 뺐던 시간을 빼면 이쪽에서의 삶이 훨씬 호화롭고 아름다웠다.
왜냐하면 나는 이 세계의 최고 권력자였으니까. 제국 황제와 동등한 대우를 받는, 마법사들의 왕 유리 아이엘레스.
반면 현실의 김유리는 어땠던가? 공교롭게도 이름은 비슷하지만, 삶은 비교할 것이 못 되었다. 10대: 비리로 얼룩진 고아원, 20대: 장학금으로 다닌 대학교를 거쳐 30대에 이르러서는 젊은 대표가 경영하는 스타트업 IT 회사. 이것만 들어도 벌써 감이 잡히지 않는가? 졸업 후 3년을 갈아 넣은 회사는 구로의 꺼지지 않는 등불로 유명했다. 워라밸은 고사하고 돌연사나 안 하면 다행인 삶을 살던 나였다.
그런데 빙의하고 보니 세상에, 사람들이 나를 무슨 대통령, 아니, 왕 떠받들듯이 했다.
아침에 푹 자다가 일어나면 눈치 빠른 하인들이 씻을 물을 대령했고, 식사는 대표 새끼가 엄청 생색내며 데리고 갔던 유명 레스토랑의 것보다 훌륭했다.
최고급 호텔이라도 온 듯이 모두 내 앞에서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고, 내 말 한마디에 벌벌 떨고, 내가 필요하다고 한 것은 그 즉시 대령했다.
트럭에 치여 죽었다는 충격과 빙의의 비현실성 따위는 생생히 느껴지는 안락함 앞에서 금방 자취를 감추었다. 빙의하고 한 달쯤 지났을 때, 나는 익명으로 ‘환생 트럭은 실존한다’라는 제목의 에세이라도 쓸까 하고 생각 중이었다. 어딘가에 공감하며 읽을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면서. 대체로 그 트럭은 현실에 만족도가 떨어지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들이박는 것 같았다. 잠깐의 고통을 참으면 트럭은 치인 사람을 꿈의 세계로 데려가 주었다.
나는 마탑이라고 불리는, 지상에서 가장 높은 탑에 살았다.
말이 탑이지 마법으로 가득한 공간이라 계단 몇 개가 있는 궁전과 그리 다를 바 없었다. 탑은 미궁에 둘러싸여 있는데, 내 마법이 허락한 사람이면 누구든 그 입구에 선 것만으로 탑 앞까지 올 수 있었다.
탑의 모든 계단은 한걸음에 오를 수 있게 만들어져서 거의 엘리베이터나 마찬가지였고, 탑 꼭대기의 뷰는 서울에서 제일 높은 전망대만큼 좋았다.
내가 먹는 것, 입는 것, 손에 대고 취하고 즐기는 것, 발에 차이는 것까지 값비싸지 않은 게 없었다. 모두가 내 앞에서 웃었고 날 극진히 대했다. 말만 하면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즉시 가질 수 있었다.
사치와 향락의 쾌감은 엄청났다. 호화로움과 거리가 먼 삶을 살던 나는 순식간에 그 늪으로 빠져들었다.
세계관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 그 몸에 빙의한 나는 놀랍게도 그 마법까지 고스란히 쓸 수 있었다. 사용하는 방법은 몸이 기억했다. 이 세계의 지식도 책 몇 권을 읽자 마치 머릿속에 도서관을 통째로 옮겨놓은 것처럼 저절로 익혀졌다. 정말이지 꿈같은 세상이었다.
내 옆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시중드는 사람 외에도 가르침을 달라고 찾아오거나, 뜻을 여쭙고 싶다고 찾아오거나. 그들은 손을 비비며 신의 계시라도 기다리듯 내 말을 기다렸다.
물론 그렇게 날 찾아오는 이들은 대부분 눈빛이 대표 새끼와 비슷했다. 야비하고 꿍꿍이가 가득하고 음흉하고 믿으면 안 될 것 같은 점이. 즉 간신배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 세계에 대해서 뭘 알겠는가? 게다가 ‘어차피 책 속’이라는 생각 때문에 간신배든 뭐든 아무래도 좋게 느껴졌다. 내 생활이 호화로워서 더 현실감이 없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누리고 싶은 것만 누리며 살기를 6년. 나는 엄청난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도 알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살던 마탑에 군사들이 들이닥치고, 더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된 순간 어쩔 수 없이 알아야만 했다.
나는 악역이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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