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태성, 괜찮아? 갑자기 학교 안 나와서 존나 놀랐어. 연락도 안 되고. 많이 아파?
……너 학교는.
구라치고 조퇴했지. 약은 먹은 거지? 무슨 이 넓은 집 안에 환자 보는 사람이 없냐? 깨비는 어디 갔어? 밥은? 안 먹었지?
괜찮아.
괜찮기는? 너 식은땀 나. 봐, 열도 존나 끓는데. 감기야? 넌 무슨 한여름에 개도 안 걸린다는 감기에 걸리고 그러냐. 그러니까 내가 평소에 밥 좀 깨작거리지 말랬지. 어쩐지 어제부터 안색이 안 좋더라니.
……너 수업 들어야 하잖아.
뭐?
수업……. 빠지면 안 되잖아.
지금 수업이 중요하냐? 네가 아프다는데. 배 안 고파? 병원은 안 가도 돼? 아주머니 불러다 줄까? 미친, 너 지금 눈 풀렸어.
……넌, 내가 중요해?
뭔 소리야. 당연히 중요하지.
너는 나를……. 왜……. 어떻게 그렇게……. 해 줘?
뭐, 너한테 왜 잘해 주냐고?
응.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친구니까 그런다, 왜.
나도 네가 좋은데.
나도 네가 좋아, 우영아.
초침 소리가 들렸다. 태성은 바스락거리는 이불 속에서 더 작게 웅크렸다. 눈을 감은 시야엔 잔상 같은 부유물이 둥둥 떠다녔다. 그것이 헝클어지고, 쌓이고, 모이다 보니 그리움이 되었다. 들쭉날쭉 솟아오르던 모난 감정은 서서히 녹아내려 자신을 푹 적셔 버리다가도, 다시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는 했다. 그때마다 그것의 출처를, 이유를 다시 되짚어야 했다. 어지러웠다.
달칵. 문이 열리고 실내화 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이 밝아 왔다는 뜻이었다.
“기분이 좀 어때요?”
쓸데없이 다정한 물음에 피식 웃음이 샜다. 제대로 잠들지 못한 채 지새는 밤이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머리만 대면 잠들곤 하던 과거의 자신은 까마득히 잊힌 채였다.
“좆같아요.”
여전히 건조한 목구멍을 열었다. 어김없이 관자놀이가 지끈거려 눈을 감았다.
벌써 몇 달째였다. 태성이 좁디좁은 새장 안에 갇혀 버린 지도.
***
신입생은 군 휴학 외에 입학을 미룰 방법이 없었다. 대안은 질병 휴학뿐이었고, 제 능력 밖의 일이었기에 어머니에게 손을 벌렸다. 그것이 시발점이었다.
정지철은 제 비틀린 행적들을 되짚어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무단결근, 일정에 없던 귀국, 기사를 대동한 채 무턱대고 떠났던 일 등, 권우영을 향해 벌였던 무수한 일들을 근거로 삼아 개 같은 주장을 떠벌렸다. 비열하기 짝이 없는 새끼였다.
친구를 향한 도 넘은 집착은 곧 병이라 했다. 치료가 시급하다고 했다. 그들은 올바른 성 지향성과 가치관 정립을 위해 의학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개소리를 신나게 지껄였다. 그러나 태성은 반박할 수 없었다.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를 향한 집착이 과했다는 것쯤은, 병적인 집착에 몸이 달아 있던 것쯤은 저도 이미 잘 아는 사실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권우영은, 끝없이 단념하던 것들 속에서 쥐어 볼 수 있었던 단 하나였다. 더 갖지 못해 애가 끓는데 놓는 법 따위 알 리 없었다.
***
여권을 뺏겼다. 뉴욕에 있는 어머니의 저택에 갇혔다. 변명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무도 제 말을 들어 줄 리 없었으므로.
거짓으로 계획하려던 질병 휴학은 실제가 되었다. 심리 상담가와 정신과 의사, 회진 의사가 상주하다시피 집을 드나들었다. 일상을 교묘하게 통제당하기 시작했다. 집주인이 정해 놓은 경계 밖으로는 나갈 수 없었다. 어차피 기를 쓰고 돌아간대도 권우영을 볼 수 있는 법도 없었다. 그 또한 다른 의미로 갇힌 신세였다.
외국인들만 득시글한 타지에서 여권도 없이 할 수 있는 건 제한적이었다. 꼭 필요한 외출에는 사람이 서너 명씩 따라붙었다. 산책이건 쇼핑이건 자유롭지 못했다. 사방에서 저를 지켜보는 수십 개의 눈이 숨통을 조여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전과 다름없이 평온하게 돌아갔다.
어머니는 완벽주의였다. 일생을 계획해 온 아들 장사에 흠이 생기는 걸 원치 않았다. 일류 대학에 수석 입학한 자식이 순탄하게 졸업하기를 원했다. 덕분에 휴학 신청은 제대로 받아들여졌다. 혀를 깨물지 않고, 창밖으로 뛰어내리지 않으며 고분고분 버틸 수 있는 이유가 생겼다. 그 뭣 같은 성격이 이럴 때 도움이 되어 다행이었다.
하루하루가 의미 없이 흘러갔다. 1년 동안 어머니가 찾아온 횟수는 단 한 번이었다. 그마저도 10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줄 달린 마리오네트처럼 굴던 아들의 이탈에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했다.
억지스러운 치료는 금세 막을 내렸다. 심리 상담가 하나만 남긴 채 나머지 의사들의 발길이 끊겼다. 그럼 그렇지. 제가 앓는 건 병이 아니었다.
이 와중에도 각 분야의 예술가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감금하고 교육을 종용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그녀는 하나뿐인 아들을 포기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존나게 고약한 성격이었다.
태성은 혼자였다. 혼자라서 외로웠다. 할 수 있는 건 새카만 공허 속에서 빠짐없이 자신을 곱씹고 더듬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수없이 으깨졌다. 뭉그러지고 으스러졌다. 형체를 알아보기조차 어려워졌다.
***
“……마음은 잔잔한 수면과도 같아서, 매일 평온하게 유지할수록 감정의 굴곡도 순탄해집니다. 이렇게 올바른 사랑에 관하여서는…….”
선생은 매번 쓸데없는 타령만 줄줄이 늘어놓았다. 치료는커녕 되레 병을 만들 것만 같았다. 세상엔 온갖 쓰레기 같은 말들이 많았다. 번지르르하고 허울뿐인 것들에 괜한 반발심이 일었다.
“사랑이 뭔데요?”
태성이 물었다. 궁금했다. 제게 그토록 열렬히 주입하려는 그 씹스러운 감정 덩어리의 실체를 알고 싶었다. 알고 싶지 않으나 알 수 없는 것이며, 저는 모르나 권우영은 알고 있는 것이었다.
“사랑은……. 누군가를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것이죠. 대가 없는 희생이랄까요. 그 사람을 위한 일이라면 선뜻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대가 없는 희생.
웃기지도 않은데 웃음이 샜다. 제게는 개소리로밖에 들리질 않았다.
불행할 거라면 같이 불행해야 했다. 나락 끝으로 처박힐지언정 함께여야 했다. 그가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이라면, 깊숙이 파묻힌 발을 더 쑤셔 넣고 빠져 죽어야 했다.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대가 없는 희생 따위에 목을 내놓는 멍청한 짓 따윈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제 감정에 희생이란 건 절대 쓰일 수 없는 명사다. 그딴 좆같은 게 사랑이라면 자신의 감정은 사랑일 리 없었다. 대가 없이는 더더욱.
“선생님.”
태성은 물었다.
지옥 불에 떨어질 때, 같이 추락하고 싶은 마음도 사랑이에요?
그럼 이것도 사랑이에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해답을 알 수 없었다.
***
고여 버린 잡념이 점차 썩어들어 갔다. 썩고, 썩은 것들을 양분 삼아 또 썩은 싹이 피어나고 썩어 갔다.
사랑을 했나.
사랑을 하고 있었나.
사랑이었나.
까만 눈동자를 마주할 때마다 일렁이던 마음을, 손끝이 스칠 때마다 울렁거리던 속을, 쏟아져 내리던 햇살을, 온기를, 그 태양 같은 눈부심과 안정을. 타인과 함께하는 그를 떠올릴 때마다 새카맣게 물들던 시야와, 끝을 모르고 치솟던 감정의 폭포를. 질투, 치기, 집착, 온갖 더럽고 추잡한 날것의 덩어리들을, 밑 빠진 독임에도 꾸역꾸역 차오르기만 하던 결핍의 말로를.
진즉 가면을 썼어야 했다. 주변을 치워 내기 전에 더 바짝 붙었어야 했다. 애당초 틀어진 선로였음을 비로소 인정하고 바로 세웠어야 했다.
시렸던 목소리가 이명처럼 울렸다.
‘너 존나 질린다.’
쿵, 떨어진 칼날이 단두대 위의 목을 쳤다. 발목의 족쇄는 여전하다. 후회로 물든 노을이 지고 나면 새카만 절망만이 사위를 감쌌다.
***
1년의 근신 이후 고분고분해진 아들에게 어머니는 보상을 베풀었다. 이유가 어쨌든 요청대로 2년간의 입학 유예를 해 주겠단 소리였다.
물론 조건은 있었다. 그녀의 회사로 출근하여 성실히 일을 배워야 한다는 전제였다. 한국으로의 귀국이 금지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가능한 한 오래 떨어뜨려 놓는 것이 대안이라 생각한 듯했으나, 같잖은 일이었다. 그까짓 걸로 끝낼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썩는다고 하여 휘발되는 것은 아니었다. 흐르지 못하고 고여 버린 것들은 날이 갈수록 착실히 그 농도를 더해 갔다.
밥을 먹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울컥울컥 솟구치는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삽시간에 부풀어 오른 마음은 사그라들기는커녕 매 순간 숨통을 자비 없이 죄어 왔다. 보고 싶었다. 닿고 싶었다. 새장 안에 갇힌 처지를 토로하며 위로받고 싶었다. 하지만 제 업보가, 죗값처럼 돌아온 비수가 모든 결정을 무르게 했다.
오만한 질투로 그를 짓밟고 조롱했다. 경멸하며 다그쳤다. 정작 제일 끔찍한 게 누군지도 몰랐던 주제에 그를 잔인하게 난도질했다.
지리멸렬하다. 끝없이 자기혐오만 부풀어 갔다. 그럴 때면 눈을 감아 버렸다.
***
쳇바퀴 같은 일상이 이어졌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출근했고, 시가지 미술관 오픈에 관한 프로젝트 업무를 보았다. 한마디의 불평도 없었고, 내색도 하지 않았다. 제게 주어진 건 다 했다. 더 높은 비상을 위해 때때론 날개를 접을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었다.
뉴욕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던 남기혁을 만났다.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는 데에도 따라붙은 놈들의 눈초리가 느껴졌다.
여권을 빼앗겼다거나, 철창 안에 갇힌 신세 같은 건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저 권우영에 관하여 샅샅이 캐묻기 바빴다. 예상했듯이 그는 우영의 소식에 관하여 알고 있었다. 훈련이 힘들다든가, 피부가 좀 더 탔다든가, 마음에 안 드는 선임이 있다든가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들뿐이었지만 뭐라도 좋았다. 더 듣고 싶었다. 더 원했다. 주어진 한 시간 내내 권우영 얘기로 그를 채근하기 바빴다.
남기혁은 도를 넘는 추궁을 점차 기이하게 여겼다. 의심스러운 그의 얼굴을 보며 태성은 웃었다. 검지로 저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 게이야.” 좋아한다고. 내가 권우영을 좋아한다고. 몇 번을 말해도 모자랐다. 몇 마디의 말들로 잃어버렸던 시간을 보상받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손바닥 뒤집듯 반대가 되어 버린 처지에 웃음만 나왔다.
남기혁은 사색이 된 얼굴로 굳어 버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는 저를 동정의 눈빛으로 보았다. 아마 권우영과 멀어진 이유가 제 일방적인 짝사랑 때문에 그랬으리라 판단한 듯했다.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맞는 말이었으므로.
헤어지기 전 남기혁은 머뭇머뭇 우영에게 받은 사진들을 전송해 주었다. 기대도 하지 않았건만 의외의 수확이었다. 처음으로 그가 마음에 들었다. 아껴 보려고 눌러 보지는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우영의 사진을 켰다. 짧아진 머리의 우영이 낯선 사람과 함께 웃고 있었다. 전보다 성숙해진 얼굴에서 이질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반가움과 동시에 파괴적인 충동이 찾아왔다.
되짚듯 올라간 눈길이 우영의 어깨를 감싼 타인의 손에 닿았다. 쾅.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싸늘히 식은 시선이 벌겋게 타올랐다.
그날 밤, 금이 간 액정을 밤새 들여다보았다.
***
계절이 또 변했다. 절대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한 해도 이제 막을 내리고 있었다.
그가 보고 싶었다. 깊이를 모를 만큼 까만 눈동자와 비스듬히 휘어지는 입매가, 뺨에 푹 패는 볼우물과 시원한 눈웃음이 참을 수 없이 어룽거렸다.
갈증의 샘은 끝도 모르고 제 크기를 키워 갔다. 내리쬐는 햇살이 손톱만큼의 원망마저 휘발시키고, 그리움이라는 그을음만 거뭇하게 남겼다. 고작 한 단어로 표현 못 할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거세어졌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새벽, 악몽에서 깨어난 태성은 겉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채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저를 말리는 사용인들과 저지하는 경호인들 사이에서 발악하며 뛰쳐나왔다. 뒤를 따라붙든 말든 경계를 나설 생각도 없었으므로 상관없었다.
대문을 나선 뒤 고작 한 블록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태성은 차게 식은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이 미련하게 떨렸다.
‘여보세요.’ 고작 한 마디에, 적막 속에서 달칵 끊어지는 수화음에 설움이 북받쳤다.
우영아.
부르고 싶었다.
보고 싶어.
말하고 싶었다.
좋아한다고, 내가 널 좋아하고 있었다고. 누구를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 처음으로 좋아한 사람이 너라서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섣불리 다가갔다간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릴 터였다.
태초부터 느꼈던 감정들은 우정이 아니었다. 처음 자리 잡은 감정이었기에 그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을 뿐이었다. 멋모르고 뒤집어씌운 우정이라는 껍질의 탈피가 너무도 혹독했다.
전화가 끊긴 이후에도 태성은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새파래진 입술이 덜덜 떨렸다. 끝내 손아귀에 쥔 수화기가 아래로 툭 추락했다. 휭휭 부는 찬바람 사이로 뚜, 뚜, 뚜 반복적인 전자음이 이어졌다. 그는 수화기를 제자리에 걸어두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단절되지 않았다. 잔액이 남은 전화는 언제든지 다시 이어질 수 있었으므로.
***
눈이 내리던 날 태성은 귀국했다. 2년간 그녀가 원하는 것을 주었다. 이제는 자신이 받을 차례였다.
남기혁은 저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를 통해 우영의 집 주소와 강의 시간표를 알아냈다. 같은 건물의 위층 집을 사고, 수강 시간표를 맞춰 변경했다. 모든 준비가 착실하게 끝나가고 있었다.
재회는 멋들어질수록 더 좋을 것이다. 남은 것은 그가 질리지 않게 자연스레,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일뿐이었다. 얼른 그를 만나고 싶어 몸이 달았다.
태성은 꽃집에 들렀다. 어젯밤 읽었던 연애서에서 꽃은 언제든 무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에게 커다란 꽃다발을 건네는 상상을 했다. 질색할 얼굴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주홍색 장미 한 송이만 손에 쥐고 나왔다.
고심하여 옷을 차려입고, 머리를 만지고, 향수를 뿌렸다. 고작 1층으로 내려가는 주제에 심장이 뛰었다. 저답지 않은 일이었다. 권우영에 관한 한 저다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귀가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그가 오지 않았다. 괜한 불안감이 스몄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가 식는 것 같았다. 번호를 누를까 말까, 전화를 해 볼까 말까 고민했다. 핸드폰을 만지작대는 찰나, 인기척이 들려왔다. 다른 남자를 끌어안고 비비적거리는 권우영이 보였다.
툭, 손에 들고 있던 장미 한 송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
남기혁은 그가 만나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안고 웃고 있었다.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눈앞이 흐려지고 이성이 흔들렸다. 그는 애인이 있었다. 좆같은 소식통이었다.
태성은 눈을 감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도 아니었으므로 요동치는 감정을 억눌렀다. 참아야 했다. 모른 척해야 했다. 재앙 같던 인고의 시간을 견딘 대가를 망쳐서는 안 됐다.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가 아직도 남자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적어도 제 처지에서는 상대가 여자인 것보단 나았다. 그가 만나는 저급한 놈들과 자신은 달랐다. 태성은 전부터 제 외모를 예뻐하던 권우영을 잘 알았다. 기회를 곧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쉬운 길은 없었다.
‘난 존나 변했지. 네가 뭘 알겠냐.’
시린 눈빛에 속이 쿡쿡 쓰렸다. 2년 만의 재회임에도 그는 냉정했다. 반가워하기는커녕 저를 증오하는 듯 굴었다.
조금 더, 조금 더 꼬리를 내리고 숨겨야 했다. 부드러운 말투와 상냥한 태도를 유지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제가 변해야 했다. 다른 새끼들보다 더 완벽하게 맞춰야 했다. 그러면 다시 찾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꼭 그래야만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성은 제 생각이 완전히 틀려먹은 걸 알게 되었다.
‘우영 오빠!’
그는 여자도 만나고 있었다. 남자고 여자고 가리지 않으며 살고 있었다. 별안간 밀려든 배신감이 소름처럼 살갗을 타고 올라왔다.
우영이 또다시 차갑게 돌아섰다. 저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굴었다. 다시 마주한 그에게서 제가 모르는 권우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대부분이 제가 모르는 모습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권우영은 변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긴 공백의 간극을 느끼는 자신이 싫었다. 생겨서는 안 될 틈이, 벌어져선 안 될 균열이 태성을 미치게 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태성은 끊임없이 그의 집 앞으로 향했다. 그가 가는 길에 제가 없다면, 그가 돌아올 길에서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왜, 씨발, 자꾸 따라와. 왜!’
그리고 괴로워하는 우영을 보았다.
‘나 좀 그냥 둬. 제발, 그냥 좀 두라고.’
그는 애원했다. 고통스러워했다. 그것이 저 때문이라 가슴이 더 무너져내렸다. 불가능한 토로는 제가 들어줄 수도 없는 것이었다.
우영아, 네가 내 길인데 내가 어딜 가. 내가 어떻게 널 두고 가.
인내는 지금도 충분했다. 끓어오르는 충동을 절제하기 힘들어 속이 쓰렸다. 차라리 더 비뚤어지고 싶었다. 인내 따윈 개나 줘 버리고, 그를 무릎 꿇려 제 옆에 묶어 두고 싶었다. 수단과 방법 따위 가리지 않고 지독한 집착을 강제하고 싶었다.
그러나 수십, 수백 번 번의 충동 속에서 의지를 지켜냈다.
‘이래도, 나랑 멀어지기 싫냐.’
그리고 입술이 닿았다.
쾅, 뒤통수를 걷어차인 느낌이었다. 폭풍과도 같은 충격에 머리가 얼얼했다.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권우영은, 권우영은 제 생각보다 더 비뚤어져 있었다. 그렇게도 밀어내던 저를 상대로 발정할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 타인에게서 번진 온갖 오물들로 물들어 있었다.
착실하게 이어지는 입맞춤에 격렬한 증오가 솟구쳤다.
씨발.
소중한 첫 키스가 엉망이 되어 버렸다. 한 번도 이런 식의 처음은 원한 적 없었다. 적어도 제 처음은 그와 마음이 통한 후에 주었어야 했다. 서로의 관계를 되새기기도 전, 한낱 의미도 없는 행인으로 치부되어 사라질 것이 아니었다. 배신감이 치밀었다.
‘존나 꼴리는데……. 더 해도 되냐?’
그런 주제에 그는 좆같은 말만 했다. 분노가 들끓었다. 단 두 번의 만남 동안에도 그는 남자와 몸을 비비고, 여자와 함께 술을 마셨다. 그가 뱉는 모든 말들이 제가 곁에 없는 동안의 그를 보여 주고 있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그의 과거를 되짚어 보여 주는 것만 같았다.
닳아빠졌다. 권우영은 완전히 닳아 버렸다. 그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
태성은 머리가 비상했다. 그러니 태세전환 또한 순식간이었다. 우영의 선택이 이 길이라면 어디까지고 맞춰 줄 생각이 있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어차피 제 선택에 다른 우회로 따윈 없었다.
태성은 제 몸을 원하는 그의 욕망을 보았다. 그러니 그 마음이 변하기 전에, 더 늦기 전에 해결해야 했다. 원하는 것을 내주고 저를 더 갈망하게 만들어야 했다.
이것마저 뺏기면 안 돼.
고작 하나 남은 그의 처음이었다. 뒤늦은 참회로 놓친 마지막 기회는 꼭 잡아야 했다. 권우영의 뒤를 고집한 건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하고 싶어? 나를 깔고 싶어? 그러니까 왜, 몸을 막 굴리고 다녔어?
네가 처음이었으면, 내 뒤도 줬을 텐데. 왜 그랬어?
넌, 아무 새끼랑 뒹구는 일이 그렇게 쉬워? 응? 씨발, 우영아. 우영아.
불현듯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타의로 갇혀 살았던 지난 2년보다 더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
화마처럼 타오른 섹스 이후에도 관계의 진전은 쉽지 않았다. 우영은 여전히 열아홉 겨울에 멈춰 있었고, 그 자리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슴이 아렸다. 동시에 속이 상했다. 과거의 자신이 무얼 그렇게 잘못한 건지, 그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증오해야만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그에게 예쁨받고 싶었다. 전처럼 사랑받고 싶었다. 그러나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질리지 않게 다가가는 방법만큼 어려운 일도 없었다.
누구에게 머저리처럼 물어볼 수도 없어 습관처럼 책을 읽었다.
저자는 집착하지 말라고 했다. 상대를 향한 소유욕을, 통제를 버리라고 했다. 그보다 제 생활에 더 집중하라고 했다. 쓸모없는 미련을 보이지 말라고 했다.
수십, 수백 가지의 조언 중에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방구석에 처박혀 보냈던 1년, 그리고 그를 떠올리며 기계처럼 보낸 1년 동안 제가 어떤 생각으로 발버둥 치며 살아왔는지 그들은 몰랐다. 모르니까 할 수 있는 개소리들이었다.
‘너 나 좋아해?’
‘너 나 좋아하냐고.’
그러니 또 입을 다무는 수밖에.
***
권우영에게 자신은 완벽한 을이었다. 아니, 병이다. 정이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아래일지도 몰랐다.
현란하게 몸을 흔드는 그를 볼 때마다 가학심이 일었다. 능수능란하게 제 입술을 빨거나, 삽입 시 눈을 맞추며 야한 표정을 지을 때 더 그랬다. 여자고 남자고 다른 새끼들과 헐떡거리는 권우영이 떠올라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관계는 늘 거칠었다. 완전히 파괴해 버리고 싶으면서도, 애틋하고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가 쌓아온 모든 것을 부수고 싶어질 때는 일부러 눈을 감았다.
참아야 했다. 인내해야 했다. 여전히 자신은 목이 말랐고, 그는 제 갈증을 채워 줄 유일한 샘터였다. 그렇기에 참고, 참고, 참고, 참고……. 또 참았다. 매일같이 참기만 했다. 그게 제 인과응보라 생각하며 버텼다.
그러나 도저히, 다른 새끼와 몸을 섞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다. 심지어 전에 보았던 놈도 아니었다. 그는 또 새로운 남자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고, 뭐가 그렇게 급한 건지 젖은 머리로 편의점에 들어갔다.
콘돔이 필요한가 보지.
씨발,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증오로 치가 떨렸다. 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버벅대고만 있는데, 방법을 몰라 이렇게나 발버둥 치는데, 그는 모든 것이 너무도 쉬워 보였다. 개같이 비참해서 눈물이 나왔다.
사랑은 불행이다. 이토록 절제하기 어려운 감정이 사랑이라면 제게는 재앙이자 비극이었다.
***
지독한 염세주의에 빠져 버렸다. 잿더미처럼 타 버린 밤 이후에도 불행은 다시 찾아왔다. 저와 밤을 보낸 이후에도 그는 눈 뜨자마자 다른 새끼를 찾았다.
이수화. 세 글자가 귓구멍을 가시처럼 뾰족하게 파고들었다. 태초의 균열을 만든 장본인이자, 세상 그 누구보다도 꼴 보기 싫은 사람이었다. 더는 눈 감아 줄 수 없었다. 권우영이 저를 불행으로 이끄는 재앙이라고 한들, 그를 떠날 생각은 없었으므로.
‘걔는 안 질려?’
그에게 구원받고 싶었다. 그가 제게 주는 것이 불행뿐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계에 의미를 두고 싶었다. 그에게 먼지만큼의 존재도 되지 못할 바엔, 차라리 경멸 속에서 침잠하고 싶었다. 하여 억지를 부렸다.
나락뿐인 결말에 또 눈물이 났다. 어쩌다 이런 미친 사랑에, 버거운 감정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는지 괴로움이 사무쳤다.
죽이고 싶어. 죽여 버리고 싶어. 너도 죽이고 나도 죽고 싶어. 처음으로 되돌려야 해. 네 모든 걸 빠짐없이 다 쥐었어야 해. 너를 전부 씹어 삼키고 가졌어야 해. 그랬대도 네가 나에게 질렸을까? 또 그런 눈을 했을까? 좆같은 새끼들한테 웃어 주고 나한테는 씨발, 개지랄을 떨었을까? 우영아, 대답해봐, 또 그럴 거야? 네가 그러면 나는, 나는, 이제 네가 없으면…….
“그만 자, 자기.”
다정한 음색이 녹아들었다. 새카만 어둠 사이로 커튼 치는 소리가 들렸다.
“존나 잠자는 숲속의 공주냐.”
태성이 흠칫 눈을 떴다. 무거운 눈을 깜박, 깜박 감았다 뜨기를 반복할 때마다 까만 눈동자가 또렷해졌다. 그가 저를 보며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우영아.”
푹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혹여 환영처럼 사라질까, 조급히 뻗어 나간 팔이 그의 허리를 감고 품 안으로 끌었다. 아무런 반항 없이 안겨 오는 그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쉬었다. 막 씻은 듯 청량한 향이 스며들었다.
“무슨 꿈을 꾸는데 그렇게 끙끙대. 씻고 나오는데 존나 놀랐네.”
등줄기를 따라 천천히 쓸어내리는 손길에 태성이 옅은 숨을 내쉬었다. 불안과 초조로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던 감정이 그제야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응.”
“그럼 다행이고. 잘 잤어?”
그가 이마에 입을 맞춰 왔다. 이어 따뜻한 손길로 제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태성은 눈을 감으며 그의 손바닥에 뺨을 기댔다. 안정이 찾아왔다. 불안하게 뛰던 심장 박동이 차츰 느려지고 있었다.
현실이었다. 더는 불행하지 않았다.
별안간 머리 위에서 탄식이 들렸다. 난데없는 신음에 태성이 스르르 눈을 떴다. 눈가를 살짝 찌푸린 우영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각한 표정이었다.
“아……. 존나 예뻐. 미친. 얼굴 좀 어떻게 해 봐.”
엄지로 태성의 뺨을 꾹 누른 우영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그의 얼굴을 주물렀다. 하지만 어떻게 망가뜨려도 예쁜 얼굴은 못나질 줄은 몰랐다. 느닷없는 손장난에 태성이 낮은 웃음을 흘리자, 우영 또한 함께 웃었다.
“일어나. 너 강의 있다며.”
“응.”
“슬슬 가야 하는 거 아니냐?”
태성은 조금 더 힘을 주어 우영을 끌어안았다. 고작 강의 하나 때문에 눈 뜨자마자 떨어져야 하는 상황이 싫었다. 그와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었다.
“같이 갈래?”
“미친, 네 전공을 내가 왜 가.”
“뭐 어때.”
“죄송한데 저 그렇게 할 일 없지 않거든요.”
우영이 장난스레 말했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태성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가만히 시선을 내린 태성이 그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만지작거렸다.
“넌 쓸데없이 너무 바빠.”
말하며 단단하게 갈라진 근육을 손장난하듯 더듬어 갔다. 과가 달라 불만이 많았다. 그저 매 순간 함께 있고 싶은데 상황이 따라주질 않았다. 차라리 나란히 해외 편입학하는 건 어떨까. 욕심뿐인 고민은 그 자리에서 그치기로 한다. 과거를 생각하면 지금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네가 너무 아무것도 안 하는 거라고는 생각 안 하냐. 학과 행사 참여 좀 해.”
“난 그냥 너랑 있는 게 좋은데.”
“……나도 너랑 있는 거 좋거든. 그래서 한 말이 아니라…….”
우영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티셔츠 안에서 멈출 줄 모르고 올라오던 손 때문이었다. 이러다 또 일을 벌이기에 십상이었다.
“야야, 씨. 또 왜 세우는데.”
하반신에서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양감에 우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네가 먼저 꼬셨잖아.”
“하, 내가 언제.”
“방금.”
말하며 양 허리를 붙든 손에 힘을 주자, 우영이 완전히 위로 올라왔다. 얇은 티셔츠 아래 살갗이 빈틈없이 맞붙었다.
“왜 고백 안 했어?”
태성은 물끄러미 우영을 올려다보았다. 손에 붙든 허리를 더 바짝 끌어당기며 하체를 비비듯이 뭉근히 움직였다. 팔꿈치로 시트를 지탱하고 선 우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뭐라고?”
“왜 어릴 때 고백 안 했냐고.”
“아……. 내가 또 뭐 잘못했냐? 그냥 돌려 말하지 말고 얘기해.”
우영이 그의 어깨를 잡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벌써 저 소리만 수십 번째였다. 대부분 어딘가에 질투가 날 때 하는 말이었다.
“너 교복 입히고 박아 보고 싶어. 엉망으로 흐트러뜨려 놓고.”
순식간에 바지 안으로 들어온 손이 우영의 드로즈 위를 주물럭거렸다. 적극적인 손놀림에 우영의 허리가 움찔 떨렸다.
“하아……. 고태성, 눈뜨자마자 진심, 읏. 존나 변태 같아.”
태성이 그의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었다. 입술이 지나간 자리마다 홧홧한 열기가 번졌다.
“응. 나 변태 맞아.”
“아……. 살살해. 저번처럼 자국 남기지 말고.”
“할머니 주무실 때, 몰래 네 방에서 섹스했으면 어땠을까.”
“아, 씨발.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진저리치는 그의 팔목을 단단히 감아 잡았다. 떨어지지 못하게 꽉 끌어안고는, 드로즈 속에 손을 넣어 구멍 위를 지분거렸다. 손가락이 더듬더듬 움직일 때마다 우영의 허리가 들썩거렸다.
“잠깐 넣었다 빼기만 해도 돼?”
태성이 그의 귓불을 핥으며 속삭였다. 삽시간에 열기가 올랐다.
“흐, 씹. 그 짓을 왜, 해.”
“하고 싶어…….”
“읏…….”
“이렇게 가면 너랑 씹질하고 싶은 생각에 집중 못 할 것 같아. 그럼 강의 들으러 가는 의미가 없잖아. 응?”
동의도 없이 파고든 손가락 한 개가 찌걱찌걱 안을 넓혔다. 안 그래도 동트기 직전까지 섹스하다 잠든 탓에 아직 구멍이 흐물흐물 풀려 있었다.
“우영아…….”
태성이 투정 부리자, 끓는 숨을 내쉰 우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고개를 툭 떨구며 그의 가슴께를 치듯이 눌렀다.
“한 번만 해라. 나도 나가야 해. 조 모임 있어.”
“응……. 한 번만 쌀게.”
“하……. 왜 이렇게 믿음이 안 가지?”
허탈한 웃음기 어린 말에 태성이 낮게 웃었다. 우영의 허리를 감싸 안은 그가 턱을 쥐어 비스듬히 올렸다. 침대 옆 창가에서 쏟아져 들어온 햇살이 우영의 위로 번졌다. 눈이 부셨다. 태성은 부서지는 빛 위로 입을 맞췄다.
“우영아…….”
“어.”
“사랑한다고 해 줘.”
애틋한 눈빛의 태성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픽 웃음을 터뜨린 우영이 보답하듯 그의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쪽, 쪽. 살갗이 떨어질 때마다 짧은 소리가 났다.
“사랑해.”
망설임 없는 말에 태성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고작 세 글자가 버거웠다. 그 무게에 짓눌려 죽고 싶을 만큼 좋았다.
“너무 성의 없는데.”
그러나 한 번으로는 부족했다. 제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다 해 주려는 권우영이 사랑스럽다. 수십 수백 번을 봐도 모자랐다. 그런 그가 태성을 더 보채게 했다.
헛웃음을 흘린 우영이 그의 양 뺨을 다소 세게 쥐었다. 그리고 똑바로 시선을 마주했다.
“조올라 사랑해. 어? 진짜, 미친 듯이 사랑해? 존나 사랑해서 뒤져 버릴 만큼 사랑해.”
“……말하기 싫어?”
“아, 어쩌라고. 창문이라도 열고 소리칠까?”
태성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처구니없는 듯 그를 보던 우영도 따라 웃었다. 파란 창공에 낮달과 태양이 함께 떠올랐다. 어둠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고태성 외전 - 자각몽自覺夢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