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20/21)

본격적인 대학 생활은 고태성과 함께 시작하게 되었다. 이리 돌고 저리 돌아왔지만, 수년간 목표해왔던 대로였다.

그는 우영의 군 복무 기간 동안 휴학한 뒤 어머니 회사에 다녔다고 했다. 그 외에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눈치라 우영도 더 묻지는 않았다.

과가 달랐기에 전공 일정은 달랐으나, 어쩐 일인지 교양 시간표가 전부 같았다. 심지어 전공 강의 시간도 짜 맞춘 듯 거의 비슷했다. 아무 생각 없이 남기혁에게 보냈던 시간표가 유출된 탓이었다.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던 시기에 강의 시간표까지 베끼다니 하여간 미친놈이었다.

그는 우영의 사생활에 속속들이 관여하고 싶어 했다. 도서관이고 식당이고 별안간 불쑥불쑥 잘도 찾아왔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우영의 과 후배들이나 동기들과도 안면을 텄다. 화려한 외모와 사근사근한 말투 덕에 모두가 그를 호의적으로 대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결국에 축구부 동아리까지 가입하겠다고 나섰다. 우영은 한사코 그를 말렸다. 체교과 외에 다른 과 인원은 거의 없는 싸커킥은 아무리 봐도 고태성의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너 땀 흘리는 거 안 좋아하잖아.”

저 또한 그와 매일 붙어 다니는 게 좋았으나, 무작정 제가 하는 일이라고 다 따라다니다간 피로해질 것이 분명했다. 저 때문에 그가 싫은 일을 하는 건 원치 않았다. 괜히 신경 쓰이는 일만 늘어날 뿐이었다.

“좋아하던데.”

“뭐?”

“땀 흘리는 거 좋아하던데, 나.”

그가 눈을 휘어 웃었다. 우영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별안간 손등 위를 만지작거리는 손길과 야릇한 눈빛에 눈가를 찡그렸다.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빤히 보인 탓이었다.

“……맞네, 존나 좋아하지. 내가 그걸 까먹을 뻔했네.”

능청스레 되받아치자 고태성이 낮게 웃었다. 전처럼 그와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을 주고받고 웃을 때마다 묘한 감정이 차올랐다. 매 순간이 꿈같기만 했다.

“여기 있어, 금방 올게.”

주머니를 뒤적거린 우영이 그의 등을 툭 쳤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두고 담뱃갑을 꺼내 들며 흡연 부스로 향했다.

처음 고태성은 부스 안까지 함께 발을 들이곤 했다. 그 또한 흡연자인가 싶어 옆에 두고 담배를 피우던 우영은, 멀뚱히 저만 바라보던 그가 비흡연자란 소리에 바로 쫓아내 버렸다. 간접흡연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필터를 물고 불을 붙인 우영이 멀찍이 선 고태성을 바라보았다. 그는 가만히 선 채로 제 쪽을 보고 있었다. 부스 바깥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으라는 제 말을 고분고분 듣는 것이 퍽 귀엽기도 했다.

그는 그저 제 쪽을 향해 가만히 선 채로 있었을 뿐이지만, 등 뒤의 벚나무와 함께 어우러진 모습이 마치 티브이 광고의 한 장면 같았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와도 늘 한껏 꾸민 사람인 양 반짝반짝 빛이 났다.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새삼 그간 간과하던 것이 느껴졌다. 그가 아주 뛰어나게 잘난 놈이라는 사실이었다.

함께 캠퍼스를 걸을 때면 단번에 이목이 쏠렸다. 학식을 먹을 때도,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을 살 때도, 그저 걷기만 할 때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뒤통수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때는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꼭 그와 다닐 때만 유난하게 그랬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우영이 뿌연 연기를 내뱉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찰나, 별안간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이유도 없이 웃어 보였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과 시원스레 올라간 입매가 멀리서도 도드라졌다.

우영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터뜨렸다.

“미친…….”

존나 예쁘네…….

쓸데없이 열이 확 올랐다. 손가락에 담배를 끼운 채 눈가를 쓸어내렸다. 제가 느끼기에도 주책맞은 생각이었다. 입가에 어처구니없는 미소가 걸렸다.

턱을 비스듬히 든 채 그를 바라보던 우영이 고개를 떨궜다.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필터를 물고 뱉기를 빠르게 반복하다, 얼마 닳지도 않은 꽁초를 조급하게 처리했다. 한시라도 빨리 아름다운 제 연인에게 닿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 찰나, 한 여성이 고태성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우영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핸드폰을 내밀었고, 고개를 저은 고태성이 무어라 말을 했다.

우영은 일부러 그녀가 자리를 뜰 때까지 잠시 기다린 뒤에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놀랍지도 않았다. 같이 있다 보면 서로에게 종종 벌어지는 일이었다.

“인기도 많아?”

터벅터벅 다가가 툭 뱉자, 고태성이 눈을 들었다.

“응. 다 피웠어?”

그는 별 감흥 없는 얼굴로 답했다. 우뚝 멈춰 선 우영이 대수롭지 않게 그의 어깨에 팔을 턱 걸쳤다.

“존나 이마에 써 붙일 수도 없고…….”

중얼거리는 말에 고태성이 시선을 들었다. 우영은 괜스레 손가락으로 그의 하얀 이마를 톡 찔러 보았다.

“네가 누구 건지……. 가끔 적어놓고 싶다고.”

제가 말하고도 낯간지러워 시선을 돌렸다.

멀찍이 한국대학교 정문이 보였다. 고태성과 한국대학교. 그토록 바라 왔던 꿈과 희망이 끝내 한데에 모였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충족감이 차올랐다.

고태성이 지그시 눈을 내리깔았다.

“……쓸까?”

“뭐?”

“네 이름.”

“미친놈.”

한껏 진지한 얼굴에 우영이 큭큭대며 웃었다. 가끔 보면 그는 정말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됐고, 이따 술 많이 마시지 마.”

손을 뻗어 그의 팔목을 살짝 잡아당겼다. 어느새 따스해진 봄바람이 살랑살랑 그들의 뺨을 스쳤다.

“너 술 안 마셔 봤다며. 괜찮다가도 갑자기 훅 갈 수 있어. 난 내가 존나 멀쩡한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주량 모를 땐 조심해야 돼. 선배들이 준다고 다 마시지 말고.”

오늘은 동아리 엠티가 있는 날이었다. 오늘 목적지는 강원도 산골 마을이었다. 혈기 왕성한 남정네들이 모였으니 공이나 실컷 차다가 부어라 마셔라 할 것이 눈에 훤했다.

고태성의 첫 음주는 우영의 집에서 마셨던 맥주이고, 그게 끝이라고 했다. 교류도 없이 해외에서만 처박혀 있었다는 건 알았지만,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하고 살았는지는 몰랐다. 하여간 생긴 것과는 다르게 노는 놈이었다.

“좋았어?”

“음?”

“나 없이 술 마셔서 좋았어?”

비뚜름해진 시선에 우영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눈가를 찡그렸다.

“……아니. 안 좋았지. 개 맛없던데. 재미도 없고.”

“…….”

“다녀와서 우리끼리 코 삐뚤어지게 마셔 볼까? 어, 저기 버스 있다.”

자연스레 말을 돌린 우영이 그의 팔을 이끌었다. 어릴 적에는 고태성의 생각을 읽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고태성의 묘한 태도는 전이나 지금이나 같았다. 달라진 것은 단 하나였다.

그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는 것. 저를 향한 그의 투명한 감정을 온전히 믿게 되었다는 것.

그 전제 하나만으로도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제는 눈빛만 봐도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얼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걸 알아챌 때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같이 앉아서 가자.”

우영이 머리로 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따라 고태성이 픽 웃었다.

“여! 우영-. 태성-. 와썹!”

멀찍이 관광버스 앞에 선 이찬형이 소리치며 손짓했다.

“어, 빨리 왔네?”

덩달아 손을 흔든 우영이 씩 웃었다.

“어. 나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났다. 존나 피곤해.”

이찬형이 우영의 등에 이마를 툭 떨구자, 고태성의 눈가가 살짝 굳었다.

그는 이찬형을 오해하고 있었다. 주인님이니, 뭐니 이상한 소리를 하기에 그런 사이가 아니라며 구구절절 설명을 해 주었지만, 영 못마땅한 눈치였다. 그나마 그간 몇 번의 경기에 참석하며 어느 정도 경계를 풀어 놓은 상태였다.

“요즘 진짜 심심했거든. 강의는 노잼이지, 쓸모도 없는 과제는 산더미지, 학점은 시발……. 존나 현타 오는 거야. 아. 난 싸커킥 없었으면 자퇴했을 거 같아. 축구가 최고야. 선수나 뛸걸.”

“그래도 관리해야지.”

“그렇긴 하지……. 우영아, 이따 농구 같은 팀 먹자. 형들이 족구 대신 농구 할 거래.”

수다스레 건네오는 말에 우영이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고태성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어. 되면.”

“예스, 예스!”

싱글벙글한 이찬형이 버스에 올라탔다. 우영과 고태성도 따라 버스에 올랐다. 함께 자리를 잡고 앉자 주책맞게 설레고 들떴다. 마치 옛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와 버스를 탄 것은 고등학교 수학여행 이후 처음이었다. 우영의 기억 속 옆자리에는 고태성뿐이었다. 그가 늘 제 옆을 고수했기 때문이었다.

가방을 벗어 무릎 위에 놓는데, 코끝으로 기분 좋은 향이 풍겨 왔다. 고태성의 향기였다. 고개를 돌린 우영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 좋은 냄새 난다.”

고태성이 눈을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우영이 씩 웃었다. 금세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고태성이 입매를 굳혔다.

“그렇게 말하지 마.”

“왜?”

“흥분돼.”

직설적인 말에 우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반사적으로 시선이 내려갔다. 그의 오른쪽 허벅지 위에 인위적인 굴곡이 불룩하게 올라와 있었다.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미친, 너는 진짜…….”

우영이 어처구니없는 듯 웃자, 그가 어깨에 비스듬히 뺨을 기대 왔다. 시끄럽게 틀어 놓은 음악 소리 사이로 고태성이 낮게 중얼거렸다.

“수학여행 가는 것 같다.”

“어, 나도 그 생각 했는데.”

“응……. 좋다.”

들릴 듯 말 듯한 말에 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오래간만에 놀러 가서 그런가 설레네.”

“나는 너 좋다고 한 건데.”

난데없는 말에 우영이 흠칫 시선을 내렸다. 그는 뜬금없이 낯간지러운 말을 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담담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별안간 고백을 받은 우영이 정면을 바라보았다. 귀 끝이 뜨끈뜨끈했다. 심장이 주책맞게 또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별것도 아닌 말에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어, 나도.”

“…….”

“나도 좋다고, 너.”

고태성이 스르르 눈을 떴다. 시선이 마주치자 우영이 씩 웃어 보였다. 말랑한 뺨에 예쁜 볼우물이 패었다.

***

도착한 곳은 널찍한 뜰이 있는 독채 펜션이었다. 인조 잔디가 깔린 넓은 운동장에 농구 코트는 물론, 노래방 기계, 영화 스크린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수십 명의 남자가 단체 여행 오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짐을 풀기가 무섭게 시작한 첫 일정은 농구였다. 총 4개의 팀이 토너먼트로 점수를 냈다. 승리 팀에게는 끝날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어도 된다는 커다란 혜택이 주어졌다. 인원이 스물이 넘어가다 보니 주변이 왁자지껄하여 정신이 없었다.

우영의 팀은 첫 번째 경기에서 승리를 거뒀다. 아쉽게도 고태성과 팀이 갈리는 바람에 함께 경기하지는 못했다.

“오……. 태성이, 젬병일 줄 알았더니 잘하네?”

선배 김지훈이 우영에게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시선은 코트 위에서 날렵하게 공을 던지는 고태성에게 향한 채였다.

“쟤 운동 신경 좋아요. 안 해서 그렇지.”

숨을 몰아쉬며 경기를 지켜보던 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태성은 농구를 잘했다. 체격이 남다르고 운동 신경이 뛰어난 덕에 그가 제일 잘하는 종목이기도 했다. 어릴 적 둘이서 종일 구르며 놀던 실력이 어디 갈 리 없었다.

“동양화과라길래 별 기대 없었는데 의외네. 저 정도면 축구도 제법 하겠는데.”

승리의 포상이 꽤 크기에 다들 심기일전하던 중이었다. 설렁설렁 뛰는 것 같은데도 독보적으로 경기를 주도하는 고태성이 돋보였다. 물 만난 고기처럼 드리블하며 코트를 가로지르는 그를 보니 괜스레 뿌듯한 마음이 몰려왔다.

“수고했어, 수고했어!”

이어진 경기 끝에 결국 고태성의 팀이 승리를 거뒀다. 이번엔 그의 득점 덕분이 컸다. 그러므로 다음 경기는 자연스레 우영의 팀과 그의 팀이 겨루게 되었다.

삐익! 휘슬이 울렸다.

제일 앞에 서 있던 우영이 먼저 공을 선점했다. 빠르게 드리블을 이어 가는 찰나, 뻗어온 손에 공이 채였다. 바로 앞에서 공격적으로 다가오던 고태성이었다.

힐긋 눈이 마주치자, 우영이 한쪽 눈을 감아 보이며 윙크를 했다. 돌연 고태성의 손으로 빨려 들어가던 공이 툭 떨어졌다. 바닥에 닿기 전 우영이 다시 패턴을 찾아왔다. 우두커니 선 다른 사람들을 손쉽게 제치고, 그대로 빠르게 뛰어가 꽤 멀리서 슛을 던져 넣었다.

덜커덩.

골대 위를 덧그리던 공이 그물망 안으로 뚝 떨어졌다. 동시에 뒤에서 함성이 터졌다. 우영은 숨을 몰아쉬며 고태성을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짓궂게 웃는 얼굴이었다.

엎치락뒤치락하던 끝에 경기는 우영 팀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물론 에이스 또한 우영이었다.

오래간만에 실컷 뛴 탓인지 기분이 상쾌해졌다. 이온 음료를 꿀꺽꿀꺽 마시던 우영의 곁으로 고태성이 다가왔다. 선뜻 마시던 것을 내밀자 그가 느리게 받아 들었다. 눈가를 살짝 찡그린 채였다.

“물을…….”

“어?”

“물을 왜 그렇게 야하게 마셔?”

중얼거린 고태성이 우영을 바라보며 음료를 천천히 넘겼다. 우영이 어처구니없는 얼굴을 했다.

“네 머리가 그런 생각만 하는 거 아니냐?”

“그런가.”

대수롭지 않게 인정하고 있었으나, 마음에 들지 않는단 얼굴이었다. 속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주 귀여운 새끼였다.

몸풀기 농구가 끝난 후에는 바로 축구 경기가 이어졌다. 늘 그랬듯 우영은 각종 개인기와 잽싼 몸놀림으로 관중의 감탄을 자아내며 그라운드 위를 날아다녔다.

연달아 득점이 이어졌고, 또다시 우영의 팀이 승리를 거두었다. 짧고 굵은 완벽한 게임이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던 우영이 문득 시선을 들었다. 우두커니 저를 바라보고 있는 고태성과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또 낯빛이 좋지 않아 보였다.

“왜.”

코끝을 살짝 찡그린 우영이 그에게 걸어갔다. 저야 이래저래 운동하며 친해진 사람들이라지만 고태성은 이곳 사람들과 안면을 튼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원체 살가운 성격도 아니니 재미가 없어서 그럴지도 몰랐다.

“표정 왜 그러는데. 뭐, 또 삐졌냐?”

팔꿈치로 허리를 툭 치며 장난스레 묻자, 고태성이 눈가를 굳혔다.

“……뭐야, 진짜야?”

장난으로 한 말이건만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고개를 기울여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시선이 서서히 내려왔다.

“왜 그렇게 만져 대?”

“뭐를.”

눈을 치켜뜨며 묻는 말에 고태성이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씨발……. 자꾸 만지잖아.”

고개를 돌린 그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제야 숨은 뜻을 알아챈 우영이 헛숨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조금 전의 일을 말하는 듯했다. 득점 후 팀원들끼리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뜨리거나, 손뼉을 부딪치고 끌어안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하여간 어마어마한 질투심은 알아줘야 했다.

“아아. 야, 남자끼리 그냥 칭찬하는 거지, 만지긴 뭘 만져.”

우영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왜, 너도 만져 줘?”

“응.”

불퉁하게 돌아온 답에 우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케이, 집에 가서.”

능청스레 그의 허리를 감싸고 속삭이자, 고태성의 눈이 물러졌다. 그 변화를 금세 알아챈 우영이 큭큭 웃으며 손짓했다.

“나 일단 씻고 온다.”

“같이 가.”

“어?”

“같이 씻자고.”

흔들림 없는 답에 우영이 입을 다물었다. 슬쩍 주변을 훑어보니 전부 우왕좌왕 정신이 없어 보였다. 다른 사람들도 두셋씩 뭉쳐 씻고 있으니 상관은 없었지만, 괜스레 양심이 찔렸다. 둘이서 같이 있고 싶은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므로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통째로 빌린 별관 독채에는 방마다 욕실이 딸려 있었다.

“그러든가.”

짐을 풀어 놓은 2층 방으로 올라온 우영이 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졌다. 땀에 젖은 잘 짜인 몸이 드러나 번들거렸다.

“진짜 같이 씻게?”

“응.”

뒤따라 들어온 고태성의 시선이 우영의 상체를 타고 느리게 움직였다.

“아……. 씨발. 부끄럽게 왜 그러냐.”

우영이 장난스레 뺨을 긁적였다. 집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하던 일이었으나 밖에서, 그것도 아래층에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맨몸을 보이려니 민망했다.

터벅터벅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간 우영이 샤워기 아래서 수전을 틀었다. 따라 옷을 벗은 고태성이 느릿느릿 다가왔다.

“왜기는…….”

별안간 등 뒤로 딱딱한 근육이 맞닿았다.

“이 짓 하고 싶으니까, 우영아.”

부드럽지만 음험한 음색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덩달아 엉덩이 뒤로 뜨겁고 묵직한 양감이 느껴졌다.

고작 말 한마디에 우영의 좆에 느슨하게 피가 몰렸다. 오늘 종일 그를 두고 만지고 싶고 입 맞추고 싶던 건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 그런 짓을 할 만큼 낯짝이 두껍지는 않았다.

고민하는 찰나 고태성이 목덜미에 입을 맞춰 왔다. 익숙한 감각이 몸을 타고 올랐다. 벽을 짚은 우영이 짙은 숨을 내쉬었다.

“읏, 야. 잠깐, 좀 씻고…….”

“냄새 좋아.”

“뭐…….”

“네 땀 냄새 좋다고.”

그가 속살거리며 젖은 목덜미를 빨아 당겼다. 찌릿한 아픔에 우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여기서 섹스할 생각은 없었지만 흥분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야, 하지 마.”

“씻겨 줄게.”

찔걱, 바디 워시 짜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거품을 쥔 커다란 손바닥이 우영의 허리를 부드럽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코끝으로 달콤한 향기가 풍겼다.

“우영아…….”

그가 야하게 속삭였다. 등줄기를 따라 내려가던 손이 단단한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나 선 거 느껴져?”

우영이 입술을 다물었다. 엉덩이 골 사이로 팔뚝만 한 것이 문질리고 있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소름 끼치는 흥분이 몰려왔다.

“그냥, 박고 싶은데…….”

그가 조르듯이 중얼거렸다. 동시에 구멍 위를 지분거리던 손가락이 내벽 안으로 꾹 들어왔다. 미끈거리는 바디 워시 탓에 진입에 막힘이 없었다.

“……으, 야. 안 돼…….”

“그럼 우영이 구멍이 아프잖아.”

길쭉한 검지가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안을 넓히기 시작했다. 고태성이 지그시 등을 누르자 빳빳하게 선 우영의 자지가 차가운 욕실 벽에 문질렸다.

“아, 읏…….”

앞뒤로 뜨겁고 차가운 것이 정신을 혼란하게 했다. 그렇지만 저도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의 손길 하나하나가 기분 좋은 쾌감을 가져다주었다.

하나, 둘, 셋, 넷……. 천천히 개수를 늘려 간 손가락이 삽입하듯 안을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했다. 따라 찔걱, 찔걱, 난잡한 소리가 욕실 안을 메웠다.

“흐…….”

우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보다 훨씬 큰 것이 안을 드나드는 감촉을 알고 있다. 빨리 그 커다란 것이 안을 눌러 주었으면 하는 욕구가 솟구쳤다. 정말로 변태가 되어버린 게 분명했다.

“하아……. 우영아.”

그가 주르륵 손가락을 빼냈다. 별안간 제 좆을 붙잡고는 미끌미끌한 구멍 위에 귀두를 꾹 눌렀다. 그는 삽입도 하지 않고 맞대기만 한 채로 그것을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후으……. 나, 네 엉덩이에 대고, 읏, 딸치고 있어…….”

그가 속삭이며 진득한 숨을 뱉었다. 미끄러운 바디 워시 탓인지, 그의 프리컴 탓인지, 아니면 온통 몸을 적시는 물줄기 탓인지 구멍 주변이 온통 젖어서 미끄러웠다. 아래위로 움직이는 손길에 따라 귀두 끝이 우영의 구멍 안을 얕게 들어왔다가 나가기를 반복했다.

“아…….”

우영이 눈가를 찌푸렸다. 끝만 대 놓은 채 제 것을 쥐고 흔드는 그 때문에 갈증이 났다.

벽을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고개를 떨군 우영이 그대로 허리를 뒤로 쭉 밀며 삽입을 유도했다. 가만히 귀두 끝만 넣어 놓았던 고태성의 좆이 우영의 구멍 속으로 야금야금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 씹…….”

“읏…….”

“하아, 안이, 뜨거워…….”

고태성이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를 세워 우영의 어깨를 잘근잘근 깨물어 대며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찬 물소리가 둘의 신음을 묻었다.

“야……. 문, 제대로 잠갔, 지…….”

젖은 숨을 내쉰 우영이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응……. 하아…….”

꾸욱 끝까지 들어온 좆이 한계까지 파고들었다. 명치께까지 가득 찬 느낌에 우영이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그러나 뭉근한 아픔보다 그가 제 안을 침범했다는 사실이 더 흥분되었다.

“흐으……. 읏, 야. 살살, 해…….”

“응……. 나도 참고 있어.”

뿌리 끝까지 좆을 밀어 넣자, 찰싹 살끼리 맞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고태성이 내벽 안을 이곳저곳 쑤셔 대기 시작했다.

“아, 으흑…….”

우영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아무리 여러 번 섹스해도 안을 짓눌러 대는 크기에는 적응이 어려웠다.

“나, 빨리 싸라고 이러지.”

“으흐, 뭘…….”

“자지 조여 대는 거, 말이야……. 하아……. 읏.”

“미, 친……. 아니거든. 목소리 좀 줄여…….”

그는 고태성의 어깨에 뒷머리를 기댄 채 헐떡헐떡 새는 신음을 겨우 삼켰다.

숙소 욕실에서 섹스라니 미친 짓이다. 혹여 걸리기라도 한다면 동아리는커녕 과에서도 낯짝을 들고 다니지 못할 터였다. 그러나 살살 솟구치는 묘한 긴장감과 전율이 그를 더 고양시켰다. 어차피 여기까지 해 놓고 멈출 수도 없었다.

샤워기 소리 아래로 철퍽철퍽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몸이 움찔움찔 떨리고 손발이 저렸다. 내벽 안에서 요동치듯 흔들리는 것이 저릿저릿한 쾌감을 전해 주었다. 괴로울 만큼 지독한 쾌락은 고태성과 섹스할 때마다 수없이 느끼는 것이었다.

“흐으…….”

“하……. 으……. 우영아…….”

그가 끓는 듯이 신음했다. 그 낮은 소리가 미치도록 야하게 들렸다. 한 손으로 벽을 짚은 우영은 남은 손으로 제 성기를 움켜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샤워기에서 쏟아진 물이 눈가와 뺨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야……. 조용, 조용히 해…….”

“몰라……. 못, 참겠어……. 씨발, 좋아…….”

“아, 우으…….”

더듬더듬 손을 뻗은 우영이 수전을 끝까지 올리자, 물소리가 더욱 거세어졌다. 그것을 기점으로 고태성의 움직임이 거칠어졌다. 그는 까슬한 음모를 우영의 둔부 위에 비벼대며 삽입을 이어갔다.

찰박찰박찰박. 얕은 물소리가 더 빨라졌다. 등 뒤에 바짝 붙어 선 고태성이 우영을 팔 안에 가둔 채로 거침없는 허릿짓을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우영의 몸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딱딱한 벽에 이마를 댄 우영은 입술을 꽉 깨물며 지독한 쾌락을 견뎠다.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후으, 권, 우영……. 좋아?”

“읏, 흐윽. 좋아…….”

마구 흔들리는 그의 복부를 끌어안은 고태성이 한 손으로는 벽에 부딪히는 우영의 이마를 감싸 주었다.

“나도, 좋아……. 할, 때마다 미칠 것 같아…….”

“하, 읏……. 윽. 조금만, 아.”

“너, 내가 아까 무슨, 생각했는지, 알아?”

“뭐, 뭐를…….”

“운동장에, 너, 엎어 놓고, 박는 상상……. 흐읏.”

“미……. 윽! 아. 흣.”

“그냥……. 누가 문 열었으면, 좋겠어. 응? 우리 둘이, 읏, 씹 뜨는 사이인 거, 다 까발려지게.”

퍽, 돌연 안을 콱 짓이기는 쾌감에 우영의 몸이 발작하듯 떨렸다.

“아! 으, 흑……!”

“하아……. 열어, 놓을걸…….”

격정적인 신음 사이로 고태성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눈을 질끈 감은 채 허리를 들썩거리는 우영의 귓가엔 닿지 않았다.

***

짧고 굵었던 관계가 끝났다.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먼저 욕실을 나온 우영이 뽀얘진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2층까지는 아무도 올라오지 않은 듯했다. 음식 준비가 한창인 아래에서는 고기 냄새가 솔솔 올라오고 있었다.

우영은 대강 머리를 털며 내려가 눈을 굴렸다. 문을 나서자마자 커다란 집게를 든 채 고기를 굽고 있는 이찬형을 발견했다. 옆으로 부산스레 나다니는 이건우와 김재원도 보였다.

“어, 내가 할게.”

손을 뻗어 집게를 쥐자, 이찬형이 눈을 치켜떴다.

“나 알바 짬밥 좀 있잖아.”

“오, 맞다. 우영이 동혁 숯불갈비 에이스지?”

목장갑을 받아 든 우영은 본격적으로 두툼한 목살과 빗금이 간 벌집삼겹살을 노릇하게 굽기 시작했다. 솔솔 올라오는 숯 향이 코끝을 찔렀다.

“와, 우영이 형 고기 기가 막히게 굽는데. 존맛이다.”

“형, 와서 좀 먹어요!”

“어, 이것만 마저 굽고.”

저녁 식사는 이렇다 할 말도 없이 자연스레 시작되었다. 주변을 어수선하게 돌아다니는 선배들과 후배들이 뒤섞여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다들 편안한 분위기에서 먹고 마시며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말끔하게 머리까지 다 말린 고태성이 다가왔다. 우영이 슬쩍 웃으며 노릇하게 잘 구워진 고기를 그에게 들이밀었다. 그는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덥석덥석 잘도 받아먹었다. 이런 곳에서 고태성을 보고 있으려니 신기하고 좋기만 했다.

“형, 형! 한잔해!”

이건우가 채근했다. 적당히 고기 굽기를 끝낸 우영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분위기에 연달아 술잔이 오갔다. 고태성이 마실 물을 따라 주던 우영이 그의 얼굴을 힐긋 살폈다. 담담한 얼굴로 술잔을 홀짝이는 그를 보며, 괜스레 걱정된 탓이었다.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 내일 머리 아파.”

“응.”

“너 혹시 주사 있는 거 아냐?”

“주사?”

“어, 뭐……. 술주정. 모르겠구나.”

술자리에서 우영은 그간 수많은 사례를 겪어보았다. 길바닥에 드러눕기, 울며 전화 걸기, 다짜고짜 화내며 시비 걸기 등 저마다 행패를 벌이는 것도 다채로웠다. 하나같이 다 보기 좋지 않은 일뿐이었다.

“하기야, 네가 주정 부리면 귀엽긴 하겠다.”

우영이 키들거렸다. 그래도 그의 진상이라면 봐 줄 만할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 그가 주정 부리는 상상이 스쳐 지나갔다.

“귀여워?”

때를 놓치지 않은 고태성이 덥석 말꼬리를 물었다. 우영은 모른 척 고기를 집어 먹었다.

“맞아. 우영이가 날 좀 귀여워하긴 했지.”

“지랄.”

“아니야?”

금세 눈이 가늘어진다. 그 진지한 얼굴에 느리게 눈을 깜박인 우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존나 예뻐했지 귀여워하진 않았다고. 내가 맨날 너 예쁘다고 했잖아.”

고태성이 흐음, 콧숨을 내쉬며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때를 잘 넘긴 우영은 차가운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눈에 콩깍지가 제대로 씌었다. 이토록 예민하게 구는 모습조차도 사랑스러워 보이니 큰일이었다.

해가 지면서 슬슬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하나둘 술에 취해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노래방 기기가 소란스레 돌아갔고, 운동장 쪽에서도 킬킬거리며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태성이, 우영이? 얘네 때문에 우리 동아리 급이 확 높아졌잖냐. 내 동기들이 요새 얘네 소개해 달라고 난리야. 너네 여친 있냐?”

몇 번 눈인사만 했던 선배가 터덜터덜 걸어와 술병을 내밀었다. 가만히 잔을 받던 고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요.”

“있어?”

“네, 둘 다 있는데.”

단호한 답에 선배가 이해한다는 듯 턱을 주억거렸다.

“하기야, 이 얼굴이면 없는 게 이상하지…….”

“헐, 뭐야. 우영이 형! 형 언제 여친 생겼어? 그새? 설마 김세진이야?”

옆에 와 있는지도 몰랐던 이건우가 우영을 붙들었다. 난데없는 질문 세례에 굳은 우영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니야.”

별안간 고태성이 대신 답을 했다.

“우영이 고등학교 동창이랑 사귀는데.”

“에? 진짜요?”

“응.”

“헐. 김세진이 그래서 까였구나. 어쩐지…….”

“야야, 넌 뭔 형들 연애사에 관심이 많냐.”

어느새 다가온 김재원이 말을 거들었다. 별 답 없이 슬쩍 웃어 보인 우영이 담담한 얼굴의 고태성을 바라보았다.

새끼, 철벽은…….

우영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예나 지금이나 엄청난 소유욕은 여전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쉴 틈 없이 잔을 비우다 보니 정신이 몽롱해졌다. 문득 주는 족족 옆에서 받아 마시던 고태성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음주도 안 해 봤다면서 저와 똑같이 마시고 있었다. 어쩐지 아까보다 말수가 적어진 것 같기도 했다.

“괜찮냐?”

우영이 그의 팔을 살며시 잡았다.

“안 괜찮아.”

“왜. 어디 안 좋아?”

“어지러워.”

힐긋 시선을 든 고태성의 뺨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다른 술도 아니고 연거푸 소주만 들이부었다. 쓰기만 하고 맛이 없다며 구시렁대던 주제에 겨루듯이 똑같이 마셔 대더니 술기운이 오른 듯했다.

“이걸 왜 먹어?”

그가 투정 부리듯 우영의 어깨에 툭 머리를 기댔다. 주변의 눈치를 슬쩍 살핀 우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의 손을 이끌었다.

“바람 쐬고 오자.”

고태성은 군말 없이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영은 그를 데리고 미리 봐 두었던 한적한 뒤뜰을 향해 걸었다. 조금 걷다 보면 취기가 가실 것이다. 물론 단둘이 있고 싶다는 사심도 있었다.

사월의 봄이 찾아왔으나 아직 밤공기는 쌀쌀했다. 자박자박, 산책길을 따라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늘따라 유난히 둥그렇게 뜬 달이 휘황찬란한 빛을 뿜어내 두 사람의 그림자를 만들었다.

고요 속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평온하고 아늑한 밤이었다. 다시는 겪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그 순간이 다시 찾아왔다. 하나 이번만큼은 부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얼어 버려도 좋을 것 같았다.

“고태성.”

“응.”

“나 볼 좀 꼬집어 봐.”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우영이 제 뺨을 그에게 들이밀었다. 온순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고태성이 시키는 대로 뺨을 살짝 꼬집었다. 옅은 동공이 살짝 흐트러져 있었다.

“아프네?”

“…….”

“꿈인 줄 알고.”

툭 뱉어 놓고는 실없이 웃었다.

“어떻게 이렇게 예쁜 게 내 거냐?”

“…….”

“존나 전생에 나라 구했나 봐. 나.”

우영이 흥얼거리듯 말했다. 술이 조금 들어갔다고 낯부끄러운 말이 술술 잘도 나왔다.

휘황찬란한 달빛도, 왱왱 우는 풀벌레 소리도, 바스락거리는 발자국과 고요하고 서늘한 공기도 좋았다. 별생각 없이 살던 삶의 순간순간이 전부 즐겁게만 느껴진다. 모두 고태성 덕분이었다.

고태성은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달빛이 어린 우영의 뺨을 지그시 바라보다 손을 뻗어 왔다. 그가 우영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어딘가 애틋한 손길에 우영이 입을 다물었다. 왜인지 물기 어린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질거리고 있었다.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멀거니 우영을 응시했다. 도톰한 입술이 자꾸만 달싹거렸다.

“좋아해.”

“응?”

“……네가 너무 좋아.”

마치 독백 같은 말에 우영의 걸음이 멎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사랑해, 우영아.”

그가 우영을 바라보며 고요히 중얼거렸다. 우영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순간이 진공 상태로 멈춘 것 같았다.

정적 사이로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마주친 기다란 눈매가 희미한 웃음기를 머금었다. 숨이 막힐 듯한 고요 속에서 우영은 쿡쿡 쑤셔 오는 가슴께를 문질렀다. 어처구니없을 만큼 행복한 순간에 심장이 아려 왔다. 주책맞게 눈물이 울컥 나올 것 같기도 했다.

고태성이 제게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한없이 다정하고 예쁜 얼굴로 저를 보며 사랑한다고 말했다.

“아……. 씨발.”

우영은 열 오른 눈가를 손등으로 꾹 눌렀다. 팔불출 같은 생각에 자꾸만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욕이 나왔다.

“……왜 욕을 해.”

고태성이 짐짓 눈가를 찡그렸다. 시선을 들자 물끄러미 저를 보는 고태성의 고운 얼굴이 보인다. 달빛이 가득한 아름다운 눈동자가 오로지 저를 향해 있었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를 옆에 두고도 혼자였던 전과는 달랐다.

“존나……. 좋아서.”

그를 바라보던 우영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너 큰일 났다. 이제 나한테 코 꿰여서.”

“…….”

“내가 너 절대 안 놓아줄 거거든.”

우영은 다짐했다. 다시는 그를 놓지 않을 거라고.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으며, 사랑받고 있다. 괴로웠던 과거와 현재를 이겨 낸 외사랑은 끝내 양방향이 되었다. 그러니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다. 돌고 돌아온 제자리에서 이제는 끝까지 함께 헤쳐 나갈 것이다.

“이거 그냥 하는 말 아니다. 형아 믿지?”

그의 팔목을 살며시 쥔 우영이 단단한 눈빛을 보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고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믿어.”

“확실해?”

“네에, 오빠.”

능청스레 되물은 말에 고태성이 애교 부리듯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그 사랑스러운 눈빛에 가슴 한구석이 사르르 녹아들었다. 그대로 그를 끌어안고 입 맞추고 싶었다. 나도 사랑한다고, 네가 좋아 죽을 것 같다고 속삭이고 싶었다. 솟구친 충동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으려던 찰나였다.

“권우여엉-, 고오태성!”

바스락 잔디 밟는 소리와 함께 이찬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술에 취했는지 혀가 잔뜩 풀린 채였다. 등 뒤에서 소란하게 들려오는 고함에 우영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별안간 파스슥 깨져 버린 분위기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얘들아-. 여어-기 으슥한 곳에서 뭐 하냐! 뭐야, 뭐야. 뭐 하고 있는데에.”

“형드을! 우리 족구 한판 해요!”

이찬형이 실실 웃으며 다가왔다. 멀찍이 이건우와 김재원의 소리도 들려왔다.

“야야, 애들아, 너네 우정이 좀 남다르다. 어?”

“진짜아, 형들 왜 이렇게 사이좋아요? 질투 나게.”

비틀비틀 다가온 그가 짓궂게 채근하자, 뒤따라온 이건우가 말을 얹었다.

“나 우영이 형 저렇게 다정한 사람인 거 처음 알았네. 막 다 해줘. 물 챙겨 주고, 안주 챙겨 주고, 입 닦아주고……. 김재원 넌 뭐하냐?”

“너부터나 좀 잘하고 말해라.”

킬킬거리는 수다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투덕거리는 이건우와 김재원을 뒤로하고 손을 번쩍 치켜든 이찬형이 삿대질했다.

“그러니까아, 너네 무슨 사이냐? 무슨 사이야? 뭐어, 누가 목숨이라도 구해줬어?”

정신 사나운 물음에 우영이 눈가를 작게 찡그렸다. 서늘한 바람에 한 김 식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고태성을 힐긋 바라보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산통을 깨는 바람에 짜증스러운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또 웃음이 샜다.

“뭐, 우리?”

우영이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머리가 고태성의 어깨에 툭 닿았다.

“……사랑하는 사이?”

말하며 고태성의 허리를 팔로 감아 당겼다. 허공에서 또다시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 보아도 늘 저만 보고 있는 그 덕에 눈만 돌리면 그와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치, 자기?”

천연덕스러운 물음에 고태성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또한 팔을 뻗어 우영의 목을 자연스레 끌어 감쌌다.

“……응, 여보.”

말하며 우영의 머리칼 위에 뺨을 기댔다. 당황하기는커녕 한술 더 뜨는 행동에 우영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사위로 달큼한 공기가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마치 그 순간을, 주변을 꽉꽉 메워 버리기라도 할 듯 행복한 기운이 두 남자를 완전히 감쌌다.

지금 우리 사이는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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