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19/21)

낮은 흐느낌은 한참을 이어졌다. 우두커니 선 우영은 말없이 너른 등을 도닥였다. 그것 말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울음 속 토로를 곱씹을 때마다 심장이 욱신거린다. 한바탕 쏟아 낸 진심들이 뾰족한 화살이 되어 머리를 들쑤셨다. 그가 서럽게 우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알면서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케케묵은 불신이 섣불리 치달으려는 판단을 죄 밀어 냈다.

고태성이, 고태성이 나를……. 나를, 좋아하는 건가.

혀 아래 고인 말에, 팽팽히 묶어 놓은 회로가 탁 하고 끊어졌다. 이윽고 심장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말이 돼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가리키는 건 하나였다. 모를 수도, 모르는 체할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담담히 인정해야 했다.

그간 해 온 모든 짓이, 전부 부질없는 일이었음을.

“하아…….”

눈을 감은 우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품에 안은 고태성의 머리를 살며시 힘주어 더 끌어안았다. 저보다 덩치가 커다란 놈인데도 어쩐지 작게만 느껴졌다. 죽 이어지던 잔떨림이 어느덧 잦아들고 있었다.

“고태성.”

침묵 사이로 우영이 낮게 속삭였다. 제 가슴께에 파묻힌 까만 머리칼과 반듯한 귓가를 엄지로 쓸어내렸다.

“얼굴 보여 줘.”

부름에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툭 떨궈진 뺨을 쥐고 살짝 힘을 주자, 고태성이 스르륵 고개를 들었다.

손바닥에 축축이 젖은 볼이 감겨 왔다. 여전히 내리깐 속눈썹은 흠뻑 젖어 있었다. 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해 묵묵히 바라보았다.

예쁘다. 어릿한 가슴과는 별개로 그 얼굴이 참 예뻤다. 괴로워할 때 더 예뻐 보이니 괴상한 노릇이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제가 제일 미친놈 같았다.

“왜 울었어.”

“…….”

“뭐가 그렇게 서러웠어?”

우영이 작게 물었다. 확인하고 싶었다. 제가 깨달은 진심이 실재하는지 확신하고 싶었다.

고태성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따라 기다란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잔뜩 힘이 들어간 턱이 움찔거렸고, 희고 고운 뺨이 물기로 반질거렸다.

그가 보이는 모든 약함이 전부 저 때문이었다. 이상하게도 형용 못 할 만족이 치솟아 올랐다.

“얘기해 봐.”

고태성의 시선이 스르르 올라왔다. 살짝 고개를 기울인 우영이 젖은 눈가와 뺨에 입을 맞췄다. 말랑한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며 부드러운 소리가 났다.

“응?”

우영의 엄지가 도톰한 입술을 꾸욱 눌렀다. 약하게 문지르듯 움직이던 손가락이 아래로 살짝 미끄러졌다. 우영은 마치 잘못 건들면 깨어질 유리를 다루듯이 고태성을 만졌다.

“……억울해서.”

잠깐의 침묵 끝에 그가 답했다.

“뭐가.”

입술을 누르던 손가락이 턱선을 따라 목덜미로 내려갔다. 움칠 움직인 고태성의 고개가 살짝 더 떨어졌다.

“내가 잃어버린……. 네 시간들.”

습한 음색에 우영이 숨을 멈췄다. 잔뜩 어두워진 낯빛에 왜인지 속이 울렁거렸다.

“……네 인생에 나 대신 채워진 것들.”

그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고개를 떨군 고태성이 우영의 손바닥 위로 얼굴을 묻었다. 느리게 내쉬는 숨결에 뜨거운 체온이 스며들었다.

“나는, 억울해……. 우영아.”

시선을 내린 그가 눈썹을 끌어 내렸다. 유약한 얼굴은 마치 소나기에 흠뻑 젖은 길고양이 같았다.

우영은 가만히 그를 주시했다. 딱딱하게 경직된 눈과 달리 속은 말랑말랑하게 녹아들었다. 심장이 어처구니없을 만큼 쾅쾅 뛰고 있었다. 정말 병이라도 걸린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크게 느껴졌다.

딱딱한 껍데기를 깨고 나온 용기가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남몰래 켜켜이 덮어 두었던 것들을 이제는 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전부 제가 아닌 그의 용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우뚝 선 자존심을 짓누르고 드러낸, 그 눅진한 진심에서 파생된 결과였다.

우영의 입술 끝이 움직였다.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한 번도 너를 친구로 본 적이 없다고. 그랬다면 섹스 따윈 하지 않았을 거라 고백하고 싶었다. 수백, 수천 번을 원하고 바라 왔던 상황이 바로 눈앞에 닥쳐 있었다.

우영은 지그시 그와 눈을 맞췄다. 별안간 벅차오르는 감정에 숨이 가빠 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10년을 케케묵은 글자들이 튀어 나가지 못하고 입 안을 맴돌았다. 그리고 끝내, 해묵은 감정을 토해 내려는 찰나였다.

“좋아해.”

허공을 툭 갈라낸 진심에, 목구멍이 턱 막혔다.

“좋아한다고……. 권우영.”

짧은 말 한마디에 우영의 눈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입 안에서 맴돌던 말이 상대의 입술 사이를 툭 비집고 나온 탓이었다. 조금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이제 어떡해?”

끓는 듯한 음색이 이어졌다.

“난……. 네가 좋아서 돌아 버릴 것 같은데, 이제 어떡해.”

그 사이로 고태성이 스르르 고개를 들었다. 따라 우영의 시선도 찬찬히 위로 올라갔다.

턱을 비스듬히 든 그는 한없이 애처로워 보였다. 모든 걸 끝낸 양 자포자기한 눈이, 마치 곧 질식할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너만 기다렸어. 그래야 한다고……. 얌전히…… 네 생각만 하면서, 그냥 다 참으면서……. 그렇게 너만 생각했어.”

고태성이 손바닥으로 젖은 얼굴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살짝 보이는 입술 끝은 비뚜름하게 사선을 그렸다. 한쪽만 휘어져 비웃는 듯 보이기도 했다.

“분명 이게 맞는데, 겨우 참았는데……. 자꾸,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게 싫었어……. 내가 할 수 있는 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없으니까, 씨발. 그게 너무…….”

하지만 단단히 굳은 눈동자가 또다시 습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앞뒤 없이 중얼거리는 그는 여전히 괴로운 얼굴이었다.

지켜보던 우영도 괴로워졌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정말로 그의 고통이 온전히 다 저릿하게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네가 싫어할까 봐. 전보다 내가 더 싫어질까 봐……. 질릴까 봐, 난 아무것도, 하나도 쉽게 할 수 없어서……. 그게, 그게 진짜 미쳐 버릴 것 같아서…….”

“……그만.”

끊임없이 이어지던 혼잣말이 뚝 잘려 나갔다. 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감싼 우영이 다시 젖어 들기 시작한 눈가를 엄지로 문질러 닦았다. 손끝에 그의 진심이 묻어 나왔다.

“내 말부터 들어.”

단호한 음색이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너 안 질려.”

“…….”

“너 안 질린다고. 한 번도 질린 적 없어.”

고태성의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 물기 어린 뺨과 눈가가 반질거렸다. 그 젖은 얼굴에 괜스레 속이 쓰려 왔다. 불쑥 느낀 감정은 미안함이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오해 그만해.”

우영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속이 갑갑했다. 과거 제가 던졌던 작은 불씨를 기억한다. 한번 타오르지도 못한 채 금세 꺼져 버린 줄 알았던 그것은, 걷잡을 수 없는 화마로 번져 그를 까맣게 태우고 삼켜 버린 듯했다.

저 또한 그와 같은 화상을 가졌다. 이미 그에게서 제가 먼저 받았던 것이었다.

우영은 묵묵히 다시 그를 감싸 안았다. 가만히 저를 보는 고태성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으나, 따스한 체온이 좋았다.

“보고 싶었어.”

그 어깨에 기대어 낮은 숨을 내쉬었다. 흐트러진 적막 속에서, 처음으로 드러낸 민낯에 안정이 찾아왔다. 가슴 속 꽁꽁 뭉친 응어리가 조금씩 희석되고 있었다.

우영이 그의 어깨에 툭 이마를 부딪쳤다. 등을 감싼 팔은 여전히 풀지 않은 채였다.

“새벽에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는데……. 툭하면 하늘만 쳐다봤거든. 여름이고……, 겨울이고, 그냥 존나 맨날.”

별안간 시작된 낮은 음색엔 허탈함이 배어 있었다.

“후임이 왜 그렇게 하늘만 쳐다보냐고 묻더라.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달구경 중이라고 했지……. 아, 산에서 보면 새벽달이 개 크게 뜨거든. 이런 데서 보는 거랑 비교가 안 돼. 크고, 환하고, 졸라 CG 같다고…….”

다소 두서없던 말꼬리가 차츰 흐려졌다. 둘 사이로 짧은 정적이 스쳤다.

“그냥……. 너도 그걸 보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좀 덜 보고 싶더라. 그렇게라도 네가 어딘가에 있을 거라 생각하니까, 좀 나은 것 같았거든.”

“…….”

“어쩌겠냐, 그거라도 해야지.”

살짝 고개를 든 우영이 픽 웃었다. 따라 고태성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쪽팔리게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속상하고……. 억울하고, 짜증 나고. 다 집어치우고 싶은데 그게 안 돼서, 나도 그런 내가 그냥, 존나……. 싫기만 했어.”

우영이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이윽고 금세 진중해진 눈빛이 고태성을 지그시 마주 보았다.

“……너도 그러냐?”

불현듯 목이 메어 눈가를 찡그렸다. 손을 뻗은 우영이 눈물이 마른 흰 뺨을 서서히 쓸어내렸다.

“그래서 이렇게…….”

그리고 아슬하게 새어 나오던 말은 끝내 이어지지 못했다.

고태성이 젖은 입술을 뭉개듯 부딪쳐 왔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우영이 눈을 치떴다. 눈을 꽉 감은 그가 우영을 부서질 듯 끌어안으며 몸을 밀착시켜 왔다. 전처럼 거칠고 성급하기만 한 혀 놀림이 이어졌다. 뜨거운 숨결에 혀가 녹아 버리는 것 같았다.

“우영아…….”

그는 잠시 떨어진 입술 틈으로 가쁘게 우영을 불렀다. 저조차도 제어하기 어려운 듯 색색 내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고태, 읍…….”

놀라 굳어 있던 우영이 눈앞의 고태성을 응시했다. 그리고 찬찬히 눈을 감았다. 울컥 치미는 감정에 그대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고개를 비틀었다.

둘은 서로를 꽉 끌어안고 더듬으며 질척한 혀를 얽었다. 딱딱한 이가 부딪치고, 서투르게 입술을 씹었다. 타는 듯한 갈증으로 더 깊숙이 닿고 싶은 욕망이 들끓었다.

주춤주춤 뒷걸음질하던 우영의 무릎 뒤로 침대가 걸렸다. 고태성은 그의 입술을 아프도록 빨고 혀로 짓누르듯 문지르며 그를 밀어트렸다. 그 힘에 우영이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춥, 추웁. 쭙. 엉망으로 포개져 누운 채 나누는 키스는 진득하고 달았다. 몸으로, 입술로 온통 드세게 짓눌리는 바람에 숨이 막히고 입술이 얼얼했다. 고태성은 마치 우영의 모든 것을 다 삼켜 버리고, 뼛속까지 빨아 먹으려는 듯 집요하게 굴었다.

하지만 좋았다. 좋을 수밖에 없었다. 이 순간이야말로 우영이 평생을 소원하던 꿈이었다.

한참을 헐떡거리며 혀를 얽던 고태성이 느리게 입술을 떼어 냈다. 침대 위로 팔을 지탱한 그가 가쁜 숨을 내쉬며 우영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고개를 툭 떨군 그가 우영의 목덜미에 이마를 기댔다.

“……아무도 없고, 너만 있으면 좋겠어.”

턱 아래서 앓는 듯한 음색이 들렸다.

“세상에 우리 둘만 있었으면 좋겠어.”

그 짙은 고백에 단단히 쌓아 두었던 무언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진심이 아닐 리 없는데도 믿기지 않았다. 그토록 바라 오던 일인데 그냥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진심이냐?”

뜨겁게 치미는 감정을 겨우 삼킨 우영이 확인하듯 물었다. 긴장한 건지 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나 좋다는 거……. 진짜냐고.”

“응.”

“…….”

“좋아……. 진짜 좋아.”

하나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틈 없이 답이 돌아왔다.

“좋아서…….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좋아.”

그는 우영의 목덜미를 아프도록 질근질근 깨물며 빨아 당겼다. 정말로 피를 쭉쭉 뽑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보였다.

눈가를 찡그린 우영이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현실감이라곤 쥐뿔도 없는 현실에 머리가 멍해져 갔다.

그러니까 그간 그가 제게 보였던 모든 일이, 제가 좋아서 벌인 일이었다. 단순한 호기심도, 어그러진 집착도, 비틀린 욕정도 아닌 정말로 저와 같은 마음에서 비롯된 일들이었다. 믿기지 않았다. 좋아서, 그러면서도 덜컥 겁이 났다. 온갖 혼잡한 잡념들이 이성과 감성을 마구 뒤집고 흐트러뜨렸다.

우영은 손바닥으로 감은 눈을 문질렀다. 뜨끈하게 열이 오르고 있었다.

“아……. 씨발, 나 지금 좀 어지러운 것 같아. 너 때문에.”

그가 툭 웃었다. 장난스러운 미소에 한쪽 뺨에 볼우물이 패었다.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온갖 두서없는 말들로 횡설수설하느니 그냥 입을 다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우영은 가만히 그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불규칙하던 두 남자의 숨소리가 어느새 조금씩 안정되고 있었다.

그를 쓰다듬던 우영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 시트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팔목을 살짝 쥐었다. 별안간 내지른 상처는 그새 검붉은 피딱지가 굳어 있었다. 우영이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안 아파?”

“……아파.”

투정하듯 돌아온 답에 웃음이 샜다. 우영은 그의 가슴께를 살며시 밀어 내며 다시 시선을 맞췄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어나.”

가볍게 턱짓하며 상체를 반쯤 일으키는 찰나, 주머니 속에서 진동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게 손을 넣어 홀드 버튼을 누른 우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병원.”

“…….”

“빨리 일어나. 예쁜 손 망가뜨리지 말고.”

다소 퉁명스러운 말은 꼬리가 흐려졌다. 툭 내민 손길을 잠잠히 바라보던 고태성이 우영의 손에 깍지를 얽었다. 다신 놓치지 않을 사람처럼 아프도록, 꽉.

***

주말이었기에 택시를 타고 응급실로 향했다. 오디오에서는 퀴즈를 내는 라디오 DJ의 목소리와 화려한 효과음이 시끄럽게 흘러나왔다. 택시 기사 또한 기분이 좋은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가는 내내 고태성은 제 손을 꽉 쥐고 놓지 않았다. 우영은 묵묵히 앉은 채 고개를 돌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피를 떡칠한 손을 늘어뜨리고 창밖을 보는 주제에, 자신의 손을 부스러뜨릴 듯 세게 쥐고 있다. 이질적인 상황에 기가 찼다.

“고태성.”

손을 꼼지락거린 우영이 낮게 속삭였다.

“불만 있으면 말을 해.”

“…….”

“존나 아파.”

건너온 시선에 잡은 손을 가리키듯 턱짓했다.

이런 곳에서 손을 잡고 있는 것 자체도 어색하고 믿기지 않건만, 혹여 택시 기사가 보기라도 할까 봐 신경이 쓰였다. 우영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고 민망하게 다가왔다.

고태성은 아무런 답도 주지 않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꽉 쥔 손을 놓지 않은 채, 다시 창밖을 응시할 뿐이었다. 마치 불구경이라도 하는 사람 같았다.

헛숨을 내쉰 우영이 가만히 맞잡은 손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고태성이 저를 마음에 두었을까.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홀로 속 썩이는 동안, 정류장을 지나친 수십 대의 버스는 이미 종착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행선지를 확인조차 않은 채 무턱대고 올라타지 않은 것은 저였다. 어쩌면 오롯이 제 탓인 것만 같았다.

떠올리자 돌연 멀미가 났다.

주말이라 도로는 한산했다. 덜컹거리던 택시가 긴 터널에 들어서자 새카만 어둠이 찾아왔다.

습관처럼 시선을 돌리는 찰나 창문에 고태성의 실루엣이 드리웠다. 따라 그를 바라보는 제 얼굴과, 또 창문 속의 저를 응시하는 듯한 고태성의 눈동자가 선명해졌다.

우영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습해지는 침묵에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

접수를 마치고 그를 치료실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제야 화장실에 들러 피 묻은 손을 씻어 낸 우영이 숨을 돌렸다. 저도 모르게 계속 긴장하고 있었는지, 벌건 대낮부터 피로가 몰려왔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으나 참기로 한다. 제 옆에 자꾸 들러붙는 그에게 담배 냄새를 풍기고 싶지는 않았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켰다. 수십 개의 메시지 알림과 부재중 아이콘이 눈에 들어왔다. 12시 10분. 이수화와의 약속 시각이 막 지난 참이었다.

[쵸파: 우영아, 무슨 일 있어? 11:10]

우영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름 석 자에 발작하던 고태성의 앞에서 차마 연락할 수는 없었던 탓이었다.

[쵸파: 혹시 레스토랑 거리가 너무 멀어? 나 차 있어서 데리러 갈 수 있는데. 11:23]

[쵸파: 리뷰가 좀 별론가? 여긴 어때? 11:35]

[쵸파: (링크) 11:35]

[쵸파: 우영아,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혹시 급한 일 생긴 거라면 오늘 안 만나도 돼. 나는 괜찮으니까 확인하면 연락 줘. 걱정돼. 11:59]

“아…….”

우영이 낮은 신음을 냈다. 바로 아침까지만 해도 고태성과 이렇게 될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일이 벌어진 후로 벌써 몇 시간이나 흘렀음에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바람맞은 건 생각도 않고 무작정 제 걱정만 하는 놈 탓에 미안함이 물씬 몰려왔다. 퍽 이수화다운 행동이었다.

인상을 찌푸린 우영이 통화 버튼을 누르곤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전자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 달칵, 전화가 연결되었다.

-응, 우영아.

“어. 야, 진짜 미안……. 급하게 일이 생겨서 핸드폰을 못 봤다.”

상체를 바로 일으켜 앉은 우영이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조급한 어조에 수화기 너머에서 안도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어, 아니. 별거 아닌데, 아니다, 급한 일이긴 한데…….”

우영이 두서없이 덧붙였다. 별일 아니라고 했다간 별것 아닌 일에 파투 맞은 사람이 되는 셈이니, 그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하여간, 무슨 문제 있는 건 아니야. 걱정시켜서 진짜 미안. 기다렸지?”

-아냐, 별일 없으면 됐지. 난 또 사고라도 난 줄 알고…….

“야, 나 존나 안전주의라 사고 같은 거 안 나. 몰랐어? 횡단보도도 하얀 선만 밟으면서 걷잖아.”

우영은 장난기 어린 말을 툭툭 던졌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속셈이었다. 다행히 그의 말이 잘 통한 듯, 어렴풋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그럼 다행이다.

그 말을 끝으로 짧은 정적이 흘렀다. 눈가를 찡그린 우영이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운동화 끝으로 바닥을 문질렀다. 미안한 마음에 말이 쉽게 나오질 않았다. 평소 이런 식으로 약속을 어기거나 한 적이 없었기에 더 신경이 쓰였다.

“어……. 미안한데 우리 다음 주에 볼까? 나 학교 끝나고 봐도 돼.”

-응. 그래도 괜찮겠어?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안도의 숨을 내쉰 우영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하기야 이수화는 이런 일로 화가 났더라도 티를 낼 사람도 아니었다.

“어, 난 괜찮지. 너 언제까지 있는데?”

“같이 보면 안 돼?”

별안간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영이 흠칫 눈을 치떴다.

“오늘 같이 보자. 나도 수화 보고 싶은데.”

어느새 다가온 고태성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오른손에는 하얀 붕대를 감은 채였다. 아, 이렇게 빨리 나올 줄은 몰랐는데. 우영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문득 수화기 너머에서 ‘우영아?’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성이랑 있어?

이수화가 먼저 물어 왔다. 당황스러움에 우영의 눈가가 설핏 굳었다.

“어? 어, 지금 같이 있어.”

고태성을 힐긋 바라보며 답하자, 그가 우영의 옆자리에 느릿느릿 붙어 앉았다. 그는 한쪽 몸이 완전히 맞붙도록 가까이 앉고는, 우영의 어깨 위로 스르르 머리를 기댔다.

“수화 안녕.”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짧은 침묵 끝에 ‘어……. 안녕.’ 하는 소리가 돌아왔다.

“수화야, 나도 같이 보면 안 돼?”

-어……?

“싫은 건 아니지? 대신 내가 밥 살게.”

고태성은 전화의 주인이 자신이었던 양 말을 건넸다.

-아……. 난, 상관없는데……. 우영아, 넌 괜찮아?

난데없는 질문에 우영의 눈가가 굳었다. 면회를 왔을 때 고태성에 관해 몇 마디 나눈 적이 있었다. 그것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어……. 괜찮지.”

우영이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안간 약속을 미룬 이유가 고태성 때문인 걸 그가 알아 버렸으니 괜스레 찝찝한 마음이 몰려왔다.

“수화야, 지금 말고 저녁 먹을래? 우리 일이 좀 있어서.”

불쑥 끼어드는 말에, 우영은 제 어깨에 기대어 말을 잇는 고태성을 흘긋 보았다. 그는 그저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래……. 그럼, 이따 장소랑 시간 알려 줘.

“응, 이따 봐.”

서둘러 전화를 끊고는 주머니에 핸드폰을 쑤셔 넣었다. 여전히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있는 고태성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싫어하면서 굳이 그를 만나려 하는 심보를 알 수 없었다.

“……이수화 싫다며.”

“응.”

“싫다면서 왜 보려고 하는데? 뭐, 설마 꼬투리 잡고 갈구고 그럴 생각은 아니지?”

우영이 넌지시 물었다. 이제 전처럼 애들도 아닌데 그런 꼴은 두고 볼 수 없었다. 오늘 일로써 고태성이 이수화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도 확실히 알게 된 참이었다.

“보기 싫은데, 보고 싶은 게 옆에 있으니까 괜찮아.”

덜컥, 별안간 그가 내뱉은 말에 가슴이 지끈했다.

“그리고 아예 안 볼 거 아닌 이상 싫은 것도 자꾸 봐야 적응된대.”

“…….”

“너 걔 끊을 거 아니잖아.”

아래로 길게 내리깔려 있던 속눈썹이 천천히 올라왔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예쁘게 눈을 휘어 웃었다. 우영은 고개를 툭 떨구며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렇긴 한데, 어차피 외국에 있어서 평소에 잘 보지도 못하고…….”

“씨발…….”

들릴 듯 말 듯 작게 새어 나온 욕설에 우영이 시선을 들었다. 그러나 고태성은 조금 전과 같이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고 있을 뿐이었다. 우영이 무어라 입을 열려는 순간,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나 아파. 찢어졌는데 간호사가 소독약 막 바르더라. 쓰라려서 죽는 줄 알았어.”

그가 붕대 감은 손을 찬찬히 들어 올렸다. 기다란 눈가를 괴로운 듯 일그러뜨린 채였다. 그 손길을 따라 우영이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찢어졌으니까 당연히 소독약을 바르지.”

혀를 찬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10년 가까이 뭘 때리거나 부수는 걸 본 적이 없던 놈이었다. 그가 화를 내는 걸 본 것도 이수화 때문에 싸웠을 때가 다였다. 그만큼 평상시 감정의 동요도, 남의 일에도 원체 관심이 없던 놈이었다. 저 때문에 괜한 상처가 생긴 듯해 속상했다.

“봐 봐, 괜찮대?”

“아니……. 아프다니까.”

“그러게 씹, 갑자기 거울은 왜 깨부수고 난리야. 애냐?”

짜증 섞인 목소리와는 달리 붕대 감은 손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문득 그가 몸을 더 기대 왔다.

“안 그랬으면 너 그냥 갔을 거잖아.”

우영이 입을 다물었다. 사실이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으면 별생각 없이 이수화를 만나러 갔을 터였다. 그야 그의 진심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냥 호나 해 줘.”

“……뭐?”

우영은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호 해 달라고. 원래 애인끼리 이런 거 해 주는 건데, 몰라?”

고태성이 느리게 시선을 들었다. 장난기라곤 없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애인이라니.

난데없는 단어 선택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저도 모르게 귀 끝까지 뜨끈한 열이 번져 가기 시작했다. 괜히 시선을 돌린 우영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무, 슨. 그런 건 어디서, 누가 그래.”

고태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어지는 침묵에 다시 고개를 돌린 우영이 가슴께까지 들어 올린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 후우 입김을 불었다.

“……됐냐?”

슬쩍 눈치를 살피자 고태성의 입술 끝이 픽 휘었다. 분명 재수 없는 행동인데도 얄밉지가 않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어서 숨이 가쁜 것 같았다.

“집에 가자.”

손을 거두고 서서히 상체를 일으킨 고태성이 말했다. 난데없는 제안에 우영이 되물었다.

“집?”

“응. 나 밥 해 주라. 점심 먹고 소파에 누워서 영화 볼 거야.”

“…….”

“너랑 술도 마실 건데, 저녁에 이수화 봐야 하니까 맥주 마실래. 그럼 시간 맞겠지?”

줄줄 흘러나오는 말에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별안간 이루어진 화해건만, 그는 마치 착착 일정이라도 짜고 온 듯 굴었다.

“대낮부터 무슨 술이야……. 뭐 오늘 작정하고 왔냐?”

괜한 머쓱함에 우영이 불퉁하게 말했다. 물론 저도 좋았다. 아직 서로 나누지 않은 말들이 한참 남아 있었다. 감정이 격앙된 채 짧게 나눴던 대화로는 지난 앙금을 풀어내기에 부족했다.

우영의 물음에 고태성이 음, 하고 낮은 울림을 냈다.

“오늘?”

“어.”

“오늘이 아니라 훨씬 전부터지.”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휘어지는 눈가에 충만한 만족이 어려 있었다.

***

“라면 먹을래?”

가판대 앞에서 고심하던 우영이 넌지시 물었다. 택시에서 내려 편의점에 들렀다. 평소에 집에서 뭘 해 먹지 않던 탓에 먹을 게 없었다.

할 줄 아는 것도 몇 가지 없었고, 고작 집 앞 편의점에서 뭘 사야 할지도 막연했다. 애당초 누군가에게 밥을 해 달라는 소릴 들을 줄은 몰랐다. 그게 고태성일 거라곤 더더욱.

“응, 좋아.”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라면 묶음을 집었다. 할머니가 안 계실 때 집에서 끓여 먹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그가 마시고 싶다던 맥주는 집에 있었고, 함께 먹을 과자 몇 봉지를 집었다. 터벅터벅 계산대로 걸어가자 고태성이 먼저 카드를 내밀었다.

“됐어. 나도 이제 돈 있거든.”

지갑을 꺼낸 우영이 그의 팔을 밀었다. 아르바이트생이 우영의 눈치를 힐긋 보았다. 그는 체크 카드를 내밀며 중얼거렸다.

“이런 거 사지 말고 비싼 거 사. 존나 비싼 거.”

“……응.”

빤히 그를 보던 고태성이 살짝 웃었다. 우영은 땀이 배어 나오는 손으로 비닐봉지를 집어 들었다.

두 남자는 침묵 속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벽면에 붙은 거울에서 저를 향한 시선이 느껴졌다. 힐긋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쳤다. 가만히 그를 보던 고태성이 살살 눈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종일 제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뚫어지겠다.”

괜스레 중얼대며 팔을 문지르는데, 그가 슬며시 손가락을 얽어 왔다. 경직된 우영이 손을 움찔 떨었다. 간지러운 기분에 시선을 내렸다. 별것 아닌 수작에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안 산소가 부족해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아……. 주책은, 진짜.

우영이 고개를 툭 떨구며 속으로 욕을 했다.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기다렸다는 듯 먼저 튀어 나간 우영이 문 앞에 서서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10291029’

삐리릭. 도어 록이 열리자마자 느껴지는 시선에 등줄기가 굳었다.

어릴 적부터 늘 모든 비밀번호는 고태성의 생일이었다. 그를 좋아하고 말고를 떠나 늘 쓰던 것이라 대수롭지 않게 설정해 놨던 것이었다. 어쩐지 치부를 드러낸 듯해 민망해졌다.

“들어와.”

괜스레 툭툭 말하고는 먼저 들어가 운동화를 벗었다.

제 옆에 있는 건 분명 10년 넘게 좋아해 온 고태성이 맞는데, 이상하게도 전혀 다른 사람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저와 같은 마음의 고태성은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저를 좋아하는 고태성은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한 손으로 벽을 짚고 불을 켜려는 찰나, 따스한 체온이 등 뒤를 감싸 왔다. 별안간 목덜미에 쪽, 쪽, 입을 맞추는 행위에 우영의 움직임이 멎었다. 속에서 뜨끈한 열이 훅 솟구쳐 올랐다.

“……야, 하지 마. 나 배고파.”

눈가를 찡그린 우영이 팔꿈치로 그의 배를 툭 밀어 냈다. 그러자 입맞춤을 멈추고 어깨 위로 턱을 걸친 고태성이 낮게 중얼거렸다.

“……키스하고 싶어.”

직설적인 말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대로 멈춘 우영이 하, 헛웃음을 흘렸다. 살짝 고개를 돌리자 또 눈이 마주쳤다. 아래로 내리깐 속눈썹이 그를 새초롬히 보이게 만들었다.

“존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영이 낮게 중얼거렸다. 뒷말은 하지 않고 삼켰다.

그의 턱을 쥐고, 무작정 입술을 맞물며 눈을 감았다. 난데없는 입맞춤에 고태성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입술을 벌리며 질척하게 안을 채우는 혀 놀림에, 고태성이 자연스레 그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건지. 별것 아닌 그 손길이 또 미치도록 좋았다.

이를 세워 말캉한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고작 입술을 맞대는 것만으로 지나친 흥분이 몰려왔다. 키스가 이토록 뜨겁고 다디단 행위인 줄 알았으면, 이렇게 좋은 건 줄 알았으면, 이 새끼 잘 때 진작 시도라도 해 볼 걸 그랬다.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놈이니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몰랐다.

미친 생각에 빠져 있는 찰나, 엉덩이 뒤로 뭉근한 변화가 느껴졌다. 그 적나라한 반응을 알아챈 우영이 촉, 소리를 내며 입술을 떼어 냈다.

“하아, 그만…….”

“……왜.”

슬그머니 밀어 내자, 그가 우영을 더 꽉 끌어당기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끈질기게 들러 붙어오는 행동에 웃음을 터뜨린 우영이 그를 다시 밀어 냈다.

“아, 목 부러지겠다……. 일단 밥부터 먹고.”

떨어내고 떨어내도 질척하게 다가오는 손길이 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똑같이 받아 주다간 또 눈이 돌 게 분명했다. 점심이고 뭐고 그때처럼 바닥에서 내내 붙어먹을 것만 같았다. 고태성의 성욕은 밑 빠진 독 수준이라는 걸 이제는 잘 알고 있었다.

“밥 먹고?”

“어.”

“밥 먹고, 뭐?”

그가 귓불을 자근거리며 속삭였다. 움칠 어깨를 떤 한쪽 눈을 찡그렸다.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 나가는데도, 끝까지 등 뒤에 찰싹 붙어 쪽쪽거리는 놈 때문이었다.

“……뭐든, 밥 먹고 하자고.”

“그래.”

원하는 답을 얻은 고태성은 그제야 산뜻하게 떨어져 나갔다. 저보다 먼저 거실로 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을 보며 우영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냄비에 물을 붓고 가스를 켠 뒤, 바글바글 끓는 물을 바라보았다. 뒤통수가 따가웠다. 돌아보지 않아도 이유는 알 것만 같았다.

……기왕 해 주는 거라면 좀 더 그럴듯한 게 좋았을 텐데.

평소 도시락이나 즉석 제품 같은 것들만 데워 먹고는 했으니 준비된 게 있을 리 없었다. 금세 매콤한 라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고태성은 푹 익힌 것보다 조금 덜 익힌 것을 좋아했다. 그나마 라면은 잘 끓일 줄 알아서 다행이었다.

“와서 앉아.”

“응.”

느릿느릿 걸어온 고태성이 의자를 빼 앉았다. 꼬들꼬들하게 잘 익힌 라면이 매콤한 냄새를 솔솔 풍겼다. 그릇을 놓아주던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테이블 위로 두 팔을 괸 채 저를 뚫어져라 보는 시선 때문이었다.

“나 먹여 줘야 하는데.”

“…….”

“팔 다쳤잖아.”

고태성이 붕대 감은 팔을 느리게 올려 보였다. 그제야 아차 한 우영이 낮은 신음을 냈다.

“아, 미안. 깜박했다.”

“괜찮아, 아.”

턱을 비스듬히 든 그가 입을 벌렸다.

마른침을 삼킨 우영이 자리에 앉았다. 팔을 마치 로봇처럼 움직이며 라면을 건져 내 수저에 올렸다. 온몸의 관절이 삐거덕거리는 기분이었다.

건져 낸 면발을 소복이 담은 수저를 쓱 내밀자, 고태성이 고개를 기울였다.

“호 불어 줘야지. 나 입천장 데면 어떡해.”

눈 하나 깜박 않고 하는 말에 우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 미친 새끼야…….”

“빨리.”

저도 모르게 큭큭대던 우영이 웃음기 가시지 않은 얼굴로 숟가락 위를 후후 불었다.

그간 날 세우고 으르렁대느라 바빠 저렇게 면피 두꺼운 놈인 걸 잊고 있었다. 이제야 제가 알던 고태성 같아 보여 기분이 이상했다.

“이리 와.”

가까이 오라는 듯 턱짓하자, 고태성이 상체를 숙였다. 숟가락이 벌어진 입술에 닿았고, 그대로 그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내리깐 눈과 곧게 뻗은 콧대를 바라보던 우영이 숨을 삼켰다. 괜스레 등줄기가 빳빳하게 굳었다.

“맛있다.”

“당연하지, 누가 끓였는데.”

휘어지는 눈가를 힐긋 본 우영이 입술 끝을 씩 올리며 젓가락을 들었다.

“면 넣고 4분 15초,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그걸 기억해?”

“……뭐 별거라고.”

우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릴 적 그의 입맛에 맞추려 인터넷 검색까지 하며 외워 두었던 것이지만, 오늘 몰래 핸드폰 타이머를 쟀던 건 말하지 않기로 한다.

고태성 한 입, 나 한 입 하며 의도치 않게 낯간지러운 짓을 하며 먹다 보니, 평소보다 먹는 시간이 훨씬 길어졌다. 다 먹은 후에 즉석밥 두 그릇까지 야무지게 말아 먹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식사를 끝내고 냄비와 그릇을 모으며 치울 때 발견한 그의 수저가 깨끗했다. 먹는 내내 아무 자각도 없이 같이 쓴 것이다. 뒤늦게 얼굴이 붉어졌다.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은 우영은 유리 조각 청소에 나섰다. 오전에 고태성이 벌여 놓은 일을 수습해야 했다.

“내가 할게.”

“됐어, 위험하니까 뒤에 앉아 있어.”

다시 봐도 깨진 거울과 핏자국이 요란했다. 그림 그리는 새끼가 손을 엉망으로 만들고 엉엉 울기까지 했다니. 그 말도 안 되는 짓의 원인이 저 때문이라는 게 새삼 믿기지 않았다.

깨진 거울을 현관으로 옮기고, 쓰레받기와 빗자루로 유리 조각을 쓸고 담았다. 혹시 모를 부스러기를 생각해 청소기를 돌린 뒤, 물을 묻혀 걸레질도 했다. 제가 하겠다며 나서려던 고태성은, 그 손으로 뭘 하느냐는 말에 가만히 침대에 앉아 그가 치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 번만 더 화난다고 이 지랄 해 봐. 그땐 안 봐줘.”

엄포하듯 툭 던진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청소를 마친 우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걸어 나갔다. 잠자코 앉아 그를 지켜보던 고태성도 뒤를 졸졸 따라 나갔다.

“소파에 앉아 있어.”

“응.”

“영화 보고 싶다며 고르고 있던지. 거기 뭐 볼 거 많던데.”

싱크대에서 선 우영이 수전을 틀며 말했다. 다시 보기가 잘 되어 있어 장르별로 볼 것이 많은 듯했으나, 사는 게 바빠서 한 번도 틀어본 적은 없었다.

솨아, 물줄기 소리 사이로 그릇 씻는 소리만 달그락달그락 울려 퍼졌다. 불현듯 단단한 것이 등을 감싸 왔다. 그가 설거지하는 우영의 허리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코를 묻은 탓이었다.

“……좋다, 우영아.”

낮은 목소리가 간지럽게 속삭였다.

“손 나으면 내가 해 줄게. 나 이제 요리도 잘해.”

담담한 음색에 우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요리의 요 자도 모르던 고태성이 뭘 만든다니, 상상도 가지 않는 일이었다.

“뭐 잘하는데?”

“김치볶음밥.”

“김치볶음밥?”

“응. 네가 제일 좋아하던 거.”

허리를 가로지른 손이 판판한 복부를 은근슬쩍 만지작거렸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손길에, 뱃속이 빳빳하게 당기는 기분이었다. 일부러 뒤꿈치로 그의 배를 툭 치며 밀어 냈다.

“이제 아닌데요.”

“그럼 뭔데?”

“요즘은 김치 안 넣은 게 더 맛있더라. 그냥 달걀이랑 야채 넣고 볶은 거.”

옛날에는 할머니가 만들어 준 김치볶음밥이 제일 맛있었는데, 요새는 다소 심심하게 볶은 것이 더 당겼다. 아주 가끔 혼자서도 해 먹는 것들이었다.

“……그럼 그것도 배워 올게.”

어딘가 풀이 죽은 답에 우영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뭘 배워 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수전을 끈 우영이 입술 끝을 올렸다.

“내가 가르쳐 주면 되지.”

물 묻은 손을 슥슥 닦곤 걸음을 옮긴다. 자꾸만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고, 아까 사 온 과자를 소파 앞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중 바스락거리는 봉지를 하나 집어 들곤 고태성의 품 안으로 툭 던졌다. 청포도 맛 사탕이었다.

“선물.”

난데없는 행동에 고태성이 느리게 시선을 들었다.

“너 사탕 좋아하잖아. 남기지 말고 꼭꼭 씹어서 다 먹어라.”

우영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품에 안은 사탕 봉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부터 성인이 되자마자 꼭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제가 번 돈으로 그에게 선물을 사 주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 갑작스럽게 화해를 하는 바람에 멋도 없고 초라했으나 만족스러웠다. 다음엔 더 멋지고 좋은 것을 선물할 것이다.

우영이 맥주 캔을 따며 소파에 풀썩 앉았다. 손에 쥔 캔을 고태성에게 건네주고는 제 것을 새로 땄다. 치익,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적 사이로 티브이 광고 소리가 이어졌고, 아직은 어색하고 낯설었으나 평온한 기분이 들었다.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돌리던 우영이 캔을 입술에 대려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부터 느껴지던 시선 때문이었다.

“왜?”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고태성이 저를 보고 있었다.

“……짠 해야지.”

“뭐?”

되묻는 말에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짠도 안 하고 마셔? 원래 술 마시기 전에 같이 마시는 사람끼리 잔 부딪치고 먹는 거 아니야?”

“……어, 그렇긴 한데.”

어색함에 눈가를 찡그린 우영이 손을 뻗었다. 퉁, 두 개의 캔이 부딪치자 멋없는 소리가 났다. 고태성은 늘 이상한 고집이 있었다.

“……짠.”

“…….”

“……맛있게 먹어라.”

괜스레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고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게 뭐라고, 늘 다른 사람들과 하던 일인데도 민망하고 어색했다. 사실 지금도 이 모든 순간이 현실 같지가 않았다.

“고태성, 보고 싶은 거 없어?”

“응, 있어.”

“뭔데? 그럼 네가 골라.”

영화 채널을 돌리던 우영이 리모컨을 건네자, 손끝이 짧게 스쳤다.

고작 한 모금 마신 맥주 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고태성이 소파에 등을 푹 기댔다. 고르라는 채널은 안 돌리고 저를 보며 웃는다. 살짝 휘어진 눈가의 눈물점이 도드라졌다.

“왜?”

저를 향한 미묘한 눈웃음에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짧은 정적 사이로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우영이 낮은 신음을 냈다.

“아……. 씨, 너 진짜 작정하고 왔지, 미친놈아. 수작 그만 부려.”

쿠션을 집어 그의 품 안으로 퍽 때리듯 던지자, 고태성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래간만에 듣는 호탕한 웃음소리에 우영의 귀 끝이 붉어졌다. 숨 쉬는 것조차 저를 홀리려고 드는 것 같았다.

“말했잖아, 우영아.”

“…….”

“작정은 훨씬 전부터 했다고.”

고태성이 우영의 팔목을 쥐었다. 그대로 스르르 올라온 손이 맥주 캔을 빼앗아 테이블 위로 놓았다. 시선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 우영은 가만히 그 까만 눈동자를 응시했다. 마주친 시선 속에서 우영의 낯빛에 웃음기가 가셨다. 그의 말 속에서 아찔한 의문을 찾아낸 탓이었다.

“……언제부터인데.”

우영이 신음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진중한 빛을 띤 눈동자가 흔들렸다. 심장이 쾅쾅 소리를 내며 방정맞게 뛰고 있었다.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언제부터…… 그랬는데?”

눈가가 절로 일그러졌다. 반대로 고태성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를 응시하던 고태성이 스르륵 허리를 감아 왔다. 그대로 자연스레 몸을 기울이며 느리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냥…….”

“…….”

“처음부터.”

그는 한숨처럼 말을 흘렸다. 말캉한 입술이 봄날에 흩날리는 벚꽃처럼 스쳤다. 작게 벌린 틈 사이로 그가 다시금 낮게 읊조렸다.

“처음부터 네가 좋았나 봐.”

심장이 뚝 떨어진 것 같단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걸까. 누군가 가슴 한편을 콱 움켜쥐기라도 한 듯 욱신거렸다.

기다란 손가락이 우영의 뺨을 애틋하게 쓸어내렸다. 뜨끈한 맥박이 귀에서 요동쳤다. 밖으로 새어 나갈까 긴장이 될 만큼 커다란 소리였다.

“……그래서 힘들었어.”

고태성이 낮게 속삭였다.

“너무……. 너무 오래 걸려서 힘들었어……. 우영아.”

지친 음색에 깃든 공허한 감정이 제게도 전해져 오고 있었다. 저를 향한 음울한 눈동자가, 매일 밤 그를 원망하며 지샜던 지난 2년간의 자신과 다를 바 없다며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우습게도 그 모습이 위로와 자조를 동시에 안겨 주었다.

우영은 저를 태울 듯 보내오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달아오르는 속과 다르게 눈가는 딱딱하게 굳어만 갔다.

“그러니까, 이제 떨어지지 말자.”

“…….”

“피하지도 말고……. 도망가지도 말고……. 이제 나랑 같이 있자.”

그가 우영의 손목을 슬금슬금 만지작거렸다. 한 번씩 깜박이는 눈은 목덜미를 향한 채였다.

우영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가 뱉는 진심들이 속속들이 가슴에 박혔다. 그럼에도 여전히 꿈같기만 한 현실이 아득했다.

벅찰 만큼 너무 좋으면 심장이 아프기도 하나. 이상하리만큼 욱신거리는 고통은 생전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이제 진짜로 고태성을 가질 수 있는 건가. 끙끙 앓기만 했던 열병 같은 외사랑이 아니라, 가시덤불 속에서 버둥거리던 무모한 발악이 아니라, 정말로 당당하게 내 연인으로, 내 것으로 품에 안을 수 있는 건가?

새카만 어둠 속을 거닐던 터널의 끝이 보였다. 별안간 나타난 출구 밖에서 조각났던 희망이 쏟아져 들어왔다. 하얗게 번진 빛무리에 눈도 뜨지 못할 정도로, 완연하게.

“그 말 후회 안 해?”

우영이 나직이 물었다.

“……떨어지지 말자는 말. 후회 안 하냐고.”

그리고 비스듬히 눈을 치떴다. 스르륵 뱀처럼 뻗어 나간 팔이 고태성의 단단한 허리를 감싸고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리 드세지도 않은 악력에 그가 아래로 훅 내려앉았다.

우영은 상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짧은 침묵이 스치자, 잇새로 낮은 한숨이 흘렀다.

“내가 존나……. 집착하면 어쩌려고.”

혼잣말하듯 중얼대는 소리에 고태성이 입을 열었다.

“네가?”

“어.”

“왜?”

“……왜라니.”

당연하다는 듯 돌아온 물음에 우영이 눈가를 찌푸렸다. 되묻는 말에도 고태성은 가만히 우영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우영이 입술을 달싹였다.

“……좋아하니까.”

“…….”

“내가 존나……, 좋아하니까…….”

제가 하는 말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엉망진창으로 몸을 뒤섞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카타르시스가 몰려왔다. 수년간 꼭꼭 감춰두었던 말을 뱉으면서도, 차마 바라볼 수가 없어 시선을 내리깔았다. 죽기 전에 이 말을 그에게 직접 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너 나 좋아해?”

“뭐?”

“너……. 나 좋아해?”

산통 깨는 말에 우영이 어처구니없는 숨을 뱉었다. 일순 미간이 좁아졌다.

“씹. 여태 내 말은 뭐로 들은 거야.”

“……보고 싶었단 말밖에 안 했는데.”

“그게 그 말이잖아.”

“그게 어떻게 그 말이야?”

당연하다는 듯한 물음에 우영이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제게로 향한 곧은 눈빛은 그가 말장난 따위나 하는 게 아니란 걸 알려 주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당연한 거 아니냐? 좋아하니까 보고 싶은 거지. 보고 싶으면 좋아하는 거야. 안 좋아하는데 어떻게 보고 싶냐?”

찡그린 채 줄줄 읊는 말에, 고태성이 상체를 확 일으켰다. 여태 본 중 가장 역동적인 움직임이었다.

“너 나 좋아해?”

다소 거세어진 목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갈랐다.

“……어.”

“어떻게?”

“뭐?”

“언제부터?”

“아니……. 씨발. 넌 네가 듣고 싶은 것만 듣냐?”

덩달아 상체를 반쯤 세운 우영이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도대체 여태 무슨 대화를 주고받은 건지 황당할 지경이었다.

아니, 아까는 애인이라며. 오밤중에 달구경하다 보고 싶어서 질질 짰다는 말이면 충분했던 것 아냐? 여태 제가 좋아하는 줄도 몰랐던 주제에 애인이니 뭐니 이런 소릴 한 건가? 그냥 내 마음은 상관없고 제가 좋아하니까 사귀는 거다, 뭐 이런 건방진 생각?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투명한 눈길로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를 보니 새삼 현실이 와닿았다. 놈은 고태성이었다. 일반적인 사람과는 사고방식이 좀 달랐다. 그간 잊고 있었던 그 뻔뻔한 성격에 충분히 있을 법도 한 일이었다. 어쩌면 제가 믿기지 않는 만큼 그가 믿기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중학교 2학년.”

눈을 마주친 우영이 또렷하게 말했다.

“그때부터 너 좋아했어.”

“…….”

“지금까지.”

또렷한 어조에 고태성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처음이었다. 그의 얼굴 위로 적나라한 당혹의 빛이 스치는 걸 본 것은.

그를 힐긋 바라본 우영이 살짝 고개를 떨궜다.

“나……. 너 존나 좋아했어. 중학교 때부터 좋아했다고. 네가 이서율이랑 사귀기 훨씬 전부터 내가, 내가 더 먼저 너 좋아했다.”

민망함에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상상 속에서나 겨우 해 보았던 고백이었다. 별안간 소파에 앉아 맥주를 마시다 말고 꺼내려니, 멋들어진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수화는?”

우영이 이맛살을 좁혔다. 이 얘기가 한 번은 나오리라 생각했었다. 애당초 일이 벌어지고도 부정하지 않았던 것은 자신이었으므로 그가 오해하고 있을 거란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실제론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하……. 이수화 좋아한 적 없거든. 네가 멋대로 오해한 거지.”

“둘이 사귄 거 아니야?”

“뭘 사귀어. 아니야.”

“아니라고?”

“미쳤냐? 네가 게이가 끔찍하다느니 뭐니, 좆같게 말하니까 열 받아서 막말한 거지.”

“진짜 아니야? 네가 고백한 거 아니야?”

“아이씨, 아니라니까. 걔랑 어떻게 사귀냐? 넌 남기혁이랑 사귈 수 있어?”

나무라듯 쏘아붙인 말에 고태성이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예시가 확실히 먹힌 듯했다.

“……근데 왜 말 안 했어?”

“말할 기회나 있었냐고.”

우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먼저 존나 끔찍해했잖아. 씨발, 어차피 게이 되실 거면 그때 왜 그 지랄을 하셨어요?”

“…….”

“아, 또 생각나네……. 그때 존나 상처받았는데. 그날 이후로 자다가 깬 것만 수백 번이다. 진심.”

지끈거리는 가슴을 짚은 우영이 토해 내듯 중얼거렸다. 아직도 생생한 그때를 떠올리니 심장이 울렁거렸다.

난감한 얼굴로 눈가를 굳힌 고태성이 말꼬리를 흐렸다.

“나는…….”

“아, 됐어. 다 지난 얘긴데. 사과 들으려고 한 말도 아니고.”

우영이 대충 손을 내저었다.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달싹거리던 고태성은 끝내 말을 잇지 않았다.

투명한 반응에 우영이 쓴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한바탕 뱉고 나니 속이 시원하게 트인 기분이었다.

“그리고……. 말 안 한 거 있는데.”

“……응.”

“나 네가 처음이다.”

우영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여기까지 와서 괜한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허세 부리느라 한 거짓말이니 민망하기도 했다. 이런 건 원래 제 스타일이 아니었다.

“너 하는 짓 짜증 나서 경험 많은 척했는데, 나 누구 사귀어 본 적도 없어. 손도 안 잡아 봤다. 졸업하자마자 입대하고, 전역하자마자 입학했는데 누구 만날 시간이나 있었겠냐?”

이상하리만큼 굳어 가는 고태성의 얼굴에 우영이 힐긋 눈치를 살폈다.

“그러니까, 키스도……. 섹스도 네가 처음이라고.”

“…….”

“알아들었으면 이제 걸레 취급 그만해라.”

사실 이렇게까지 할 일도 아니었건만, 그에게 지기 싫다는 마음에 괜한 치기와 자존심을 부린 게 문제였다. 하기야 스물둘 먹고 동정인 게 세상에 저 하나뿐만은 아닐 테니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진짜야?”

고태성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이질적인 음색에 눈을 치뜨자 벌겋게 물들어 가는 눈자위가 보였다. 그가 또 울 것 같은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야, 야.”

당황한 우영이 눈을 끔뻑거렸다.

“진짜냐고, 권우영.”

그가 다급한 듯 우영의 손목을 쥐었다. 한껏 찌푸린 눈썹은 아래로 향한 채였다.

“……내가 이런 거짓말을 왜 해.”

“진짜 내가 처음이야? 키스도, 섹스도 내가 처음이야?”

“하, 그래. 뭐 보여 줄 수도 없고.”

“아…….”

고개를 떨군 고태성이 끓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는 손바닥으로 눈가를 짓누르고 있었다.

“씨발……. 좋아…….”

잇새로 끓는 듯한 욕이 샜다. 별안간 고개를 치켜든 그가 팔을 뻗어 우영을 와락 덮쳐 왔다. 순식간에 몸이 다시 소파 위로 눕혀졌다. 그는 마치 오랜만에 만난 주인을 보고 달려든 대형견처럼 우영을 끌어안고 얼굴을 비벼 댔다.

“우영아……. 권우영…….”

“윽, 야. 왜 이래…….”

“좋아서 쌀 것 같아.”

난데없는 음담패설에 우영이 진저리치듯 그를 밀어 냈다.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불쑥 발기한 아래가 느껴진 탓이었다.

“아, 미친놈아…….”

“……그럼 우리 둘 다 서로가 처음인 거네?”

다시 고개를 든 고태성이 물었다. 눈가에 희미한 기대가 어려 있었다. 다소 격양된 목소리는 평소에 거의 들어 본 적 없던 것이었다.

“뭐?”

“너 처음이라며, 그럼 우리 서로가 다 처음인 거잖아. 첫 키스도, 첫 섹스도.”

“……그건 아니지.”

“왜?”

우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아무리 의미를 두려고 해도 그렇지, 이런 허풍은 달갑지 않았다.

“네가 키스도 안 해 봤다고?”

“응. 안 해 봤는데.”

“무슨…….”

“말했잖아. 나 아다라고.”

거를 것 없는 담백한 말투에 우영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뭐가 문제냐는 듯, 투명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또렷한 눈동자에 거짓은 없었다.

……설마, 진짜야?

“왜, 아닌 줄 알았어?”

그제야 다소 서툴렀던 그와의 첫 키스가 떠올랐다. 넣기가 무섭게 싸지르던 첫 섹스도 떠오른다. 당시엔 다른 잡념에 섞여 그다지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당연히……. 아니 씨발, 네가 처음이라고?”

“응. 나 아다 맞는데. 내 아다 네가 따먹었잖아. 그래서 맛있었다며.”

단호한 답에 우영이 헛숨을 내쉬었다. 당시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치부하고 빈정거렸던 것일 뿐이었다.

“아니 그건……. 미친. 됐고. 진짜 진심?”

“응. 진심.”

“……다 걸고 진짜 아무랑도 안 했어?”

“응. 뭐 걸까?”

음흉하게까지 느껴지는 눈웃음에 우영이 거친 손길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니, 너……. 너처럼 잘생기고, 키도 크고 돈도 많은 애가 왜, 왜 처음이냐?”

제가 뱉어 놓고도 주책맞은 말에,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아니……. 그렇잖아. 넌, 존나 잘났으니까…….”

중얼거리는 말꼬리가 흐려졌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고태성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치면, 너는?”

“…….”

“너도 키 크고 잘생기고, 인기도 많고……. 좆도 크잖아.”

오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멀거니 그를 바라보던 우영이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야, 그만하자. 존나 무슨 대화냐 이게.”

“왜? 원래 연인끼리는 칭찬해 주는 건데?”

“아, 뭔 지랄 좀!”

“왜. 나 칭찬 더 해 줘. 더 해 주라. 키 크고, 잘생기고, 또 뭐가 잘났는데? 말해 줘야 알지. 응? 아니면 뭐가 부족한데? 싫은 건 뭔데?”

“아……. 씨.”

깔아뭉개듯 짓누르며 치대는 말에 우영이 팔꿈치로 그를 밀어 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마른세수하며 마음을 진정시킨 우영이 손바닥을 내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아, 솔직히 못난 곳 찾기가 더 힘들지. 장난해? 거울 좀 봐라.”

구시렁대는 우영의 입술 끝이 살짝 휘었다. 마구 열이 오르는 속이 어쩐지 들뜨는 기분이었다.

“뭐……. 성격에 하자가 좀 있긴 한데, 봐줄 만해.”

“…….”

“존나 예뻐서.”

손을 뻗은 우영이 고태성의 뺨을 살짝 쥐었다.

“얼굴만 봐도 꼴릴 때가 있거든.”

우영이 낮게 웃었다. 손바닥 안에 들어온 말랑한 뺨을 만지작거리다 엄지로 입술을 지그시 누르듯 벌렸다.

“……얼굴만 봐도 꼴려?”

비스듬히 내리뜬 눈이 야하다. 희고 긴 눈자위에 동그랗고 작은 눈동자가 유난히 불건전해 보였다. 별안간 찾아온 미묘한 분위기에 우영이 마른침을 삼켰다.

“응……. 빨아 줄까?”

“…….”

“아님 박아 줄까?”

그가 눈을 내리깔며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우영은 그대로 그의 뺨을 누르듯 밀어 내며 웃었다.

“미친……. 누굴 섹스 중독으로 아나.”

“중독이면 어때서. 원래 연인끼리 갖는 섹스가 스트레스 해소에 최고랬어.”

“아, 진짜. 그딴 건 자꾸 어디서 주워 듣고 오는 거야.”

우영이 코끝을 찡그리며 웃었다. 따라 날렵한 뺨에 볼우물이 패었다.

“응? 왜, 하자. 하고 싶어.”

저지하는 말에도 고태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영의 손목과 손바닥에 연신 입술을 누르며 중얼거렸다.

고개를 돌린 우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힐긋 아래를 내려다보니 고양된 만족이 빠듯이 차오른다. 이렇게 예쁜 걸 뿌리칠 수 있을 리 없었다.

***

“하아……. 우영아.”

꽉 맞닿은 따스한 품이 낯설었다. 귓가를 지분거리는 입술이, 숨결이 가득 섞인 애틋한 음색이 아직도 어색했다.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꿈같은 현실에 매 순간 정신이 몽롱해졌다.

침대에 누운 우영이 그의 어깨를 꽉 쥐었다. 얇은 티셔츠 위로 유두를 꾹 짓누르며 잘근잘근 깨무는 행위에 짙은 숨을 내쉬었다. 축축이 젖어 드는 셔츠는 찝찝하기는커녕 외설적으로만 느껴졌다.

“야……. 간지러워……. 읏.”

“간지럽기만 해?”

속살거리는 목소리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살갗이 예민해졌다. 바짝 선 돌기를 셔츠 채로 쭙, 빨아들이며, 허벅지로 하반신을 뭉근하게 짓누르는 행위에 아랫배가 조여들었다. 그간 몇 번 겪었던 섹스와 다를 것도 없건만 오늘따라 유난히 더 흥분되었다.

“아니……. 존나, 좋아……. 하아.”

상기된 얼굴의 우영이 그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뭐라도 씐 것인지, 제 위에서 눈을 깜박거리는 고태성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아니, 원래도 그랬을 것이다.

“더 해 봐.”

우영은 그의 손을 제 드로즈 위로 끌어당겼다. 벌써 동그랗게 끝이 젖어 든 속옷은 터질 듯 부풀어 올라 있었다.

지금부터는 증오와 치기로 점철된 채 서로를 잡아먹으려 들던 행위가 아니었다. 진실로 애정 어린 욕망에서 비롯된 거짓 없는 섹스였다. 매 순간 현실을 깨달을 때마다 살갗 위로 소름이 끼쳤다.

“하아, 젖었네…….”

“읏…….”

고태성이 드로즈 위를 엄지로 문지르며 웃었다. 웃는 얼굴이 야하다. 아니, 이제는 그냥 숨만 쉬어도 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잘 느끼고……. 잘 세우고……. 물도 많고…….”

“…….”

“이런 건 왜 몰랐지?”

“……미친놈.”

느릿느릿 말꼬리를 흐린 그가 상체를 숙였다. 드로즈 위로 부푼 좆을 야금야금 베어 먹는다. 우영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움직였다.

뜨거운 혀가 귀두 끝을 문지르듯 쓸어내렸다. 시선은 여전히 마주친 채였다.

“그런데…….”

“흐…….”

“내가……. 처음이라고…….”

고태성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랫배를 긁는 성감에 눈을 내리뜨자 까맣게 일렁이는 눈동자가 보였다. 어쩐지 얇은 천 하나를 두고 애무당하는 일에 몸이 더 달았다.

이를 세운 그가 드로즈 끝을 물고 아래로 끌어 내렸다. 꼿꼿하게 선 살덩이가 툭 튀어나와 뺨에 부딪혔다. 적나라한 광경에 뭐라 말할 새도 없이 강한 압력이 성기를 빨아들였다.

“흐……. 읏…….”

우영의 몸이 움칠 튀었다. 뜨거운 점막이 아래를 꽉 조여 와 눈가를 찌푸렸다. 입 안에 불룩 찬 좆이 버거워 보이는데도 그는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는 양 빨아 대기 시작했다. 동정이라더니. 제 걸 몇 번 빨아 보았다고 혀 놀림이 능숙했다. 하기야 어릴 적부터 배움에 능한 놈이었다.

“하아, 고태성…….”

우영이 낮게 신음했다.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보았다. 따라 희고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 나직한 부름에 스르르 치뜬 까만 눈동자가 물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 선정적인 모습에 우영의 좆이 그의 입 안에서 크게 꺼덕였다.

“내가, 해 줄게……. 넌 받은 적 없잖아.”

엄지손가락이 고태성의 눈가를 다정하게 문질렀다. 제 아래를 물고 있는 와중에도 발갛게 상기된 뺨이 잘 익은 사과처럼 예뻤다.

춥, 젖은 입술을 떼어 낸 고태성이 눈을 살짝 휘어 웃었다.

“그럼 같이 할까?”

“……같이?”

“응……. 같이 빨아 주자고.”

상체를 일으킨 고태성이 무릎으로 섰다. 망설임 없는 손길로 바지와 드로즈를 한 번에 죽 내렸다. 삽시간에 커다란 성기가 퉁 솟구쳤다. 그의 것은 좁아지거나 굵어지는 굴곡 없이 매끈하게 올라붙어 있었지만, 낯선 크기와 검붉은 색 때문에 봐도 봐도 적응이 어려웠다. 끝은 이미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같이 어떻……. 읏.”

눈을 끔뻑거리던 우영의 몸이 순식간에 위로 들어 올려졌다. 어느새 그는 고태성의 배 위에 앉아 있었다. 난데없는 상황에 눈가를 찡그리자, 그가 비스듬히 웃으며 우영을 올려다보았다.

“뒤로 돌아서 앉아 봐.”

“뒤?”

“응. 뒤. 빨리.”

떠밀 듯 보채는 손길에 우영이 머뭇머뭇 뒤로 돌아앉자마자, 뒤에서 양 허벅지가 잡혔다. 강한 악력에 순식간에 몸이 아래로 푹 끌어 내려졌다. 잘게 갈라진 그의 하복부에 코를 박기 전, 반사적으로 시트 위를 짚어 지탱했다.

이게, 무슨.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뜨거운 점막이 좆을 다시 쭉쭉 조여 오기 시작했다.

“아, 읏! 야……. 우읍.”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두툼한 귀두가 입술 위를 치덕치덕 벌리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끈끈하게 흘러나온 쿠퍼액이 우영의 입술을 마구 적셨다.

“후으, 우영아…….”

“우윽……. 욱.”

“입을, 벌려야, 내 걸 빨지…….”

작게 중얼거린 고태성이 우영의 단단한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 이윽고 빳빳이 선 좆을 게걸스레 빨기 시작했다.

“아, 흐읏…….”

요란한 자세에 당황하던 우영이 입술을 벌렸다. 벌어진 잇새로 뜨거운 자지가 비집고 들어왔다. 반도 넣지 않았는데 입 안이 빠듯하게 찼다.

좆 됐다. 이걸 끝까지 넣었다간 기도건 식도건 죄다 막혀 질식사할 것이 분명했다. 괜한 소릴 지껄인 것에 빠른 후회가 몰려왔다.

“흐읍……. 웁.”

커다랗고 뜨거운 살덩이가 안을 마구잡이로 짓눌러 왔다. 고태성이 할 때는 버거워 보여도 할 만해 보였는데, 처지가 바뀌니 전혀 다른 일이 되었다. 막상 입 안에 넣어보니 숨이 막히고 입가가 찢어질 것만 같았다.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우영은 미끈거리는 기둥의 끄트머리만 입에 문 채로 우물거렸다. 서툰 혀 놀림에 이따금 표피 위로 치아가 스쳤다. 귓가론 제 좆을 빠는 소리와 함께 이따금 낮은 신음이 들려왔다.

적나라하고 야하고, 자극적인 행위였다. 지금 자신은 고태성과 거꾸로 겹쳐 누워 서로의 좆을 빨아 주고 있었다. 소름 끼칠 만큼 강렬한 쾌락과 배덕감이 온몸을 잠식했다.

“으웁……!”

우영은 입 안을 조이며 그의 좆을 빨다가도, 마구잡이로 치닫는 쾌감에 몸을 움찔거렸다. 아래를 마구 자극하는 혀 놀림과 입 안을 들쑤시는 성기에 정신이 다 혼미했다.

돌연 두툼한 귀두가 목구멍을 콱 치고 올라왔다. 고태성이 아래에서 허리를 쳐올린 탓이었다.

“커으……. 우븝…….”

호흡이 부족해진 우영의 눈가가 벌겋게 물들었다. 아래로 제 좆을 단단히 물고 있는 탓에 어디로 도망갈 수도 없었다. 놈은 몇 번 해 본 탓인지, 아니면 제 좆이 성에 차지 않는 탓인지 능숙하게도 행위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눈가를 찌푸린 우영이 욕을 곱씹는 찰나, 뾰족한 혀끝이 귀두 끝 구멍을 파고들었다. 별안간 저릿한 쾌감이 아래를 강렬하게 스쳤다. 평소보다 빠르게 찾아온 절정에 눈앞이 새하얗게 번져 갔다.

“아으……. 흐, 으읍…….”

“으음……. 음…….”

아래위로 빨아 주는 질척한 소리와 가로막힌 신음이 난잡하게 퍼졌다. 쾌락에 몸서리치던 우영은 본능적으로 허리를 움직였다. 아프도록 발기한 좆이 고태성의 입 안을 꾸역꾸역 밀고 들어갔다.

아, 씨발……. 쌀 것 같은데.

사정 욕구가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입 안을 가득 채운 살덩이에 눈만 질끈 감는 찰나, 끝내 참지 못한 좆이 울컥울컥 정액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입속의 것은 이미 뱉어 낸 지 오래였다.

“하으……. 흐…….”

팔뚝으로 시트를 짚고 선 우영은 그의 입 안에 허릿짓을 했다. 그 몸짓이 버거울 법도 한데, 고태성은 입을 뗄 기미가 없었다. 한 방울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그것을 쭉쭉 빨아들일 뿐이었다. 체면 따위 없이 욕구만 남아 헐떡거리는 짐승 같은 움직임이었다.

후희는 제법 길게 이어졌다. 사정을 끝낸 우영이 부들부들 떨리는 허리를 들자, 고태성의 잇새로 좆이 주르륵 빠져나갔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손바닥에 남은 정액을 뱉어 냈다.

“우영아……. 힘들면 안 빨아도 돼.”

우영은 그의 허벅지 위로 뺨을 기댄 채 숨을 헐떡거렸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미디어에서도 본 적 없는 적나라한 광경뿐이었다. 등줄기가 오싹오싹했다.

“……존나 커, 씨발. 입술 찢어진 것 같아…….”

눈을 감았다 뜬 우영이 숨을 몰아쉬었다. 혀끝으로 입가를 쓸자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네가 우리나라 평균 망치는 거 아니냐.”

시선을 들어 얼굴 앞에 우뚝 솟은 성기를 바라보았다. 다시 보아도 어처구니가 없는 크기였다. 아래에서 고태성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웃긴가.

눈가를 찌푸리는 순간, 단단한 손가락이 아래를 쑥 파고들었다. 사정의 여운으로 축 늘어져 엎드려 있던 우영의 몸이 움찔, 튀었다.

“여긴 안 늘어나나 봐. 그렇게 하고도 또 조이는 걸 보면.”

“읏, 미친 새…… 끼야…….”

찌걱찌걱 젖은 소리가 방 안을 어지럽혔다. 난데없는 삽입에 우영의 허벅지 안쪽이 바르르 떨렸다. 손가락으로 쑤셔 대는 아래도 아래지만, 눈앞에서 액을 질질 흘리며 꺼덕거리는 성기를 계속 보고 싶지 않았다. 자극적인 장면에 정신이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으……. 고, 태성. 그만…….”

“응?”

“좀, 똑바로, 흐. 하자고…….”

“그럴까?”

별안간 손가락이 쑤욱 빠져나갔다. 벌어졌던 구멍이 닫히는 느낌에 우영이 반사적으로 아래에 힘을 주었다.

“우영아, 뒤로 할까, 앞으로 할까?”

단단한 둔부를 꽉 움켜쥔 고태성이 그대로 상체를 빼내듯 일으켰다.

“하으……. 몰라, 그냥, 거기서 해.”

무너지듯 쓰러진 우영이 침대 시트에 뺨을 댄 채 중얼거렸다. 근지러운 느낌에 열이 올라 죽을 것만 같았다.

“응……. 근데 어차피 전부 다 하긴 할 거야.”

등 뒤에 선 그의 손길에 엉덩이가 들렸다. 사이를 벌리는 느낌과 함께 구멍 위로 뜨거운 귀두가 문질렸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느낌이었다. 횟수로는 몇 번 되지 않지만, 고태성은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정이라 섹스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길었기 때문이었다.

우영은 곧 찾아올 고통에 대비해 눈을 질끈 감았다. 하다 보면 저도 좋아 자지러지곤 했지만, 삽입 초반에는 매번 아픈 것을 감수해야 했다.

“으…….”

그러나 몸을 쪼개는 듯한 고통이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마치 약을 올리듯 미끌미끌한 구멍 주변을 문지르기만 하다가, 끄트머리만 얕게 꾸욱 넣었다가 빼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었다.

“뭐, 해……. 씨발.”

눈가를 찌푸린 우영이 고개를 돌렸다. 제 자지를 쥔 채 무릎으로 선 고태성이 보였다. 얼굴엔 희미하게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네 구멍 존나 귀여워.”

“…….”

“뱉었다가 삼켰다가 할 때마다……. 내 좆 크기에 맞춰서 동그랗게 움직이거든.”

난데없는 음담패설에 우영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보지 않아도 아래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떠오를 것만 같아서였다.

“……씹, 그딴 거 상상하게 만들지 마, 미친놈아……. 흣!”

신경질 부리듯 외치는 순간, 뜨거운 불기둥이 안을 쑤시듯이 파고들었다.

“아, 으윽!”

“하아……. 넣어 줄 테니까 보채지 마…….”

고태성이 나른하게 중얼거리며 상체를 숙여 왔다. 그 각도에 따라 삽입이 더 깊어졌다. 철퍽, 세찬 소리와 함께 우영의 상체가 앞으로 밀렸다.

“……후으, 너무 좋다. 우영아…….”

양손으로 허리를 바짝 붙든 고태성이 그를 다시 아래로 죽 끌어당겼다. 다시금 철퍽, 마치 파도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길, 쑤셔 본 게, 나밖에 없다니.”

“아, 흑!”

“좋아서, 흐읏……. 좋아서……. 미칠 것 같아.”

고태성은 그를 놔주지 않을 기세로 꽉 붙들곤 점점 속도를 붙여 가기 시작했다. 거친 움직임에 따라 우영의 몸이 앞뒤로 거세게 흔들렸다. 우영이 침대 시트를 찢을 듯이 꽉 움켜쥐었다.

“아, 씹, 천천……. 천히……. 좀.”

“싫어, 못 멈추겠어. 하읏……. 아, 좋아서…….”

“개, 흐, 아! 잠, 읏.”

“후읏. 내가 아니라, 네가, 날 물고 안 놔주잖아……. 읏…….”

흐려지는 말을 끝으로 그가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박는다기보다 좆을 안에서 빼내지 않고 넣은 채로 마구 흔들어 대는 수준이었다.

찰박찰박, 완전히 젖은 구멍이 내는 물기 어린 소리가 난잡하게 울려 퍼졌다.

“흐, 아. 씹, 하, 으읏…….”

고개를 떨군 우영이 저릿저릿하게 올라오기 시작하는 쾌감에 눈을 감았다. 내벽을 쑤셔 대는 익숙한 쾌락에 늘어져 있던 좆이 다시 꼿꼿하게 일어났다.

“하아, 너무, 좋다……. 아……. 우영아, 안 해 본 자세도, 하나씩 다, 해 보자……. 내가 다 알아, 올 게……. 흐읏, 왜 처음, 콘돔 끼고 했지? 안 끼는 게, 훨씬 기분 좋아……. 끼지 말걸…….”

혼이 나간 듯 중얼거리는 말에 우영이 욕을 짓씹었다.

씨발, 그렇게 좋나…….

하기야 그는 원래의 용도대로 쓰고 있으니, 고통과 쾌락이 공존하는 저보다는 훨씬 더 나을 것이다. 그렇게 좋아하니 차라리 더 잘된 일 같았다. 자신보다 그가 더 좋은 게 좋았다.

“아! 고태성……. 태성아……. 얼굴 보고 할래, 이리 와…….”

“응. 우영아……. 하아…….”

약하게 중얼거리는 말에도 곧바로 자세가 바뀌었다. 팔을 뻗은 우영이 그의 목덜미를 끌어당겨 입술을 맞물었다. 허겁지겁 삼켜 대는 타액 사이로 뜨거운 애정이 오갔다. 우영은 숨이 막히도록 그를 꽉 끌어안으며 허리를 들썩거렸다. 몸 구석구석을 휘몰아치기 시작하는 쾌감에 전신이 바르르 떨렸다.

“우읍, 하아……. 더, 더……. 안쪽에…….”

“응……. 안에, 쌀 거야……. 다 싸 줄게.”

내벽을 꾹 짓누르며 허리를 세운 고태성이 그대로 허리를 둥그렇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을 강하게 자극하는 행위에 몸서리친 우영이 턱을 젖혔다.

“아, 학! 흐윽! 아!”

“읏, 흐읏…….”

꼿꼿이 선 자지 끝에서 정액이 후드득 튀었다. 사정과 함께 쾌락이 휘몰아쳤다. 헐떡거리는 우영을 내려다보던 그가 더 거칠게 안을 쑤셔 댔기 때문이었다.

“하으, 씨발, 좋아……. 너무 좋은데……. 우영아, 하아…….”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우영을 따라 꺼덕거리는 좆이 여기저기 정액을 흩뿌려 댔다. 우영의 다리를 제 어깨 위에 올린 그가 팔을 뻗어 가슴을 콱 움켜쥐었다.

“중학교, 2학년이라고…….”

“으흑, 으……. 아읏…….”

“진작 알았으면, 흐읏. 열다섯, 아다도 따먹고, 열여섯, 아다도 따먹고, 씨발, 그냥 매년 네 처음은 내가, 다 먹었을 텐데…….”

찌푸린 눈을 뜬 우영이 어처구니없는 숨을 내쉬었다. 그는 섹스 중에 제정신이 아닌 소리를 할 때가 있었다.

“무슨, 미친, 소리를……. 또…….”

돌연 붕대를 감은 커다란 손바닥이 우영의 양쪽 가슴을 꽉 끌어모아 쥐었다. 별안간 그 모습을 발견한 우영이 눈가를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그는 여태 다친 손을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쓰고 있었다.

“야, 씹……. 너 손, 아프, 다며……!”

“응? 으응…….”

그는 초점이 나간 눈으로 가슴을 주무르며 상체를 낮췄다. 고개를 숙인 고태성이 우영의 귓가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파……. 아프니까, 이따 호 해 줘…….”

낮게 속삭이는 달콤한 음색에 또다시 아랫배가 뻐근해졌다. 포기하듯 눈을 감은 우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또 기나긴 섹스의 시작이었다.

***

행위 도중 전화가 걸려 왔다. 이수화였다. 또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하던 것을 멈추고 통화를 연결했다. 거칠어진 숨을 낮추며 답하던 우영은, 돌연 허리를 세우는 고태성 탓에 낮은 신음을 터뜨렸다. 말을 할 때마다 깊게 찔러넣는 움직임에 이를 꽉 사리물 수밖에 없었다.

전화가 끊어진 이후에도 그는 굶주린 야생 동물처럼 굴었다. 그만하라며 밀어 내던 우영이 진지하게 욕을 내뱉을 때쯤에야, 눈가를 붉게 물들이며 품에 안겨 왔다. 빤히 보이는 여우 짓이 어처구니없다. 내내 맹수처럼 굴다가 돌연 웅크린 새끼 고양이가 되어 버리는 모습이 황당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더 어이없는 것은, 눈에 보이는 그 뻔뻔함마저도 사랑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미친 것이 분명했다.

우영은 다정한 손길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슴께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숨결 하나에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니 다른 건 아무래도 다 좋을 것만 같았다. 그냥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고 싶었다.

해가 어둑해지고 나서야 그들은 씻고 나설 채비를 했다. 장소는 이수화가 예약했다는 도심의 호텔이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해 댄 탓에 도착 시각마저 아슬아슬했다.

“무슨 이런 데를…….”

눈가를 찡그린 우영이 우뚝 솟은 건물과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출구를 주시했다. 뒤 따라오던 고태성이 자연스레 어깨에 손을 얹어 왔다.

“왜?”

“존나 비싸 보이는데……. 이 새끼 돈 많나.”

우영이 구시렁거렸다. 약속 시각을 미룬 것도 미안한 일이건만, 이런 곳에서 비싼 밥까지 얻어먹으려니 영 찜찜했다. 하나 고태성은 별 감흥 없는 얼굴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호화로운 레스토랑 입구 앞에서 웨이트리스가 응대를 도왔다. 예약 시각과 이수화의 이름을 얘기하자 친절한 안내를 시작했다.

우영은 고급스러운 내부와 전방이 탁 트인 통유리 너머를 두리번거렸다. 고층 건물이라 그런지 야경 뷰가 끝내줬다. 하지만 스물둘 먹은 남자 놈들 셋이서 올 곳은 아닌 것 같았다. 괜스레 민망해져 시선을 돌리는 찰나,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양팔을 겹쳐 댄 채 곧은 자세로 밖을 바라보고 있던 이수화였다.

“이수화!”

우영의 부름에 그가 흠칫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 찰나, 다소 무정했던 낯빛에 금세 해사한 웃음이 피었다.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간 우영이 씩 웃었다. 익숙한 얼굴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오랜만이다?”

“……안녕.”

“이 새끼, 형아 왔는데 앉아서 인사하네? 군기 빠졌지?”

헝클어뜨리듯 투박하게 머리를 쓰다듬자, 이수화가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하얀 목 폴라 위에 잿빛 롱 코트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는 전보다 의젓한 분위기를 풍겼다.

“야, 키 컸다며. 어디 많이 컸나 보자.”

능청스러운 장난에 이수화가 찬찬히 일어났다. 전과 달리 눈높이가 얼추 비슷해졌다. 우영이 오, 하고 감탄을 내뱉었다.

“수화 안녕.”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에 이수화가 우영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 안녕.”

“잘 지냈어?”

느릿느릿 다가온 고태성이 우영의 어깨 위로 턱을 얹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어깨가 굳었다. 예전 같았으면 대수롭지 않았을 일이었지만, 남들 앞에서 아직은 조금 어색한 감이 있었다.

“……응. 오랜만이다.”

“그러게. 얼굴 보니 잘 지낸 것 같네.”

이수화의 시선이 우영의 어깨 끝에 닿았다. 순간 묘한 기류가 흘렀다.

“야, 앉아서 얘기해. 허리 아프다.”

우영이 고태성의 팔을 이끌었다. 자연스레 의자를 빼 주며 앉으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그가 이수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신경이 쓰였다. 놈이 이 자리에 굳이 따라 나온 것도 전부 질투 때문일 것이다. 이수화로부터 비롯된 문제로 멀어졌었으니 예민하게 구는 것도 이해해 주어야 했다.

“뭐 이렇게 부담스러운 델 예약했냐. 대충 삼겹살이나 쏘지.”

기왕 이렇게 된 거 굳이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에, 평소보다 더 장난스레 말을 건넸다.

“아……. 이 근방에는 여기가 제일 좋다고 해서.”

“어, 좋아. 누가 좋은 거 몰라서 그래. 너 부담될까 봐 그러지.”

물을 마시며 씩 웃었다. 호텔 레스토랑은 난생처음일뿐더러 제 수준으로라면 먼저 와 볼 생각도 하지 못할 곳이었다. 굳이 메뉴판을 보지 않아도 가격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냐, 나 이제 돈 많아. 더 비싼 것도 사 줄 수 있는데…….”

“얼씨구. 이제 대놓고 도련님 티 내시겠다?”

짓궂은 어조에 이수화가 고태성을 힐긋 바라보았다.

“그건 아닌데…….”

“실례하겠습니다.”

“아, 네.”

돌연 나타난 종업원 탓에 잠시 대화가 끊겼다.

“오늘 메인은 샤토브리앙 쇠고기 안심스테이크인데요, 굽기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어……. 저는 미디엄 웰던으로, 너희는?”

묻는 말에 같은 거로 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태성은 누가 봐도 별 감흥 없는 얼굴로 대강 고갯짓을 했다.

“다 그렇게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수화가 살짝 웃으며 종업원을 올려다보았다. 조곤조곤 예의 바른 모습에 어쩐지 전에 본 적 없는 고상함이 느껴졌다.

“아, 여기 메뉴가 셰프 요리 하나뿐이라 미리 주문해 놨어.”

시선을 느낀 그가 말을 덧붙였다. 찔찔대면서 따라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의젓해진 모습에 괜한 뿌듯함이 솟았다.

“잘했어. 뭐, 어떻게 지냈냐? 외국인들 사이에서 사는 거 안 불편해?”

“음……. 그냥, 뭐.”

그가 말꼬리를 흐리며 웃었다. 평소와 달리 말수가 적어진 걸 보니 아무래도 그 또한 고태성이 불편한 걸지도 몰랐다.

괜히 데리고 왔나. 생각에 잠긴 찰나, 물잔을 만지작거리던 이수화가 입을 열었다.

“너희는?”

“어?”

“너희는 잘 지냈어?”

그가 말간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잘 지냈냐고?

그와 허심탄회하게 속을 터놓은 것이 불과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여태 서로 물어뜯고 할퀴지 못해 안달이 났던 관계였으므로 ‘너희’와 ‘잘 지낸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못 지내는 것도 아니었다. 하룻밤 사이 관계는 까마득하게 뒤집혔고, 우영은 완벽한 하루를 보내고 온 참이었다. 결론은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잘 지냈지, 우린.”

그러나 우영보다 고태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돌연 손등 위를 덮은 손바닥이 서서히 손가락을 얽어 왔다.

“보다시피.”

그가 맞잡은 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웃었다. 그 모습에 이수화가 입을 다물었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놀란 우영 또한 눈을 치켜떴다.

“실례하겠습니다.”

타이밍 좋게 알록달록한 음식이 테이블 위로 세팅되었다.

“크림치즈를 넣은 훈제연어롤과 문어세비체입니다. 드시기 전에 레몬즙을 살짝 뿌려 드시면 맛이 더 좋아집니다.”

침묵 사이로 상냥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잠시 정적을 갈라놓은 그녀는 금세 등을 돌려 사라졌다. 고태성의 폭탄 발언에 목이 바짝바짝 말라 왔다.

“뭐 해, 자기야.”

“…….”

“나 먹여 줘야지. 다쳤잖아.”

달콤한 목소리가 흘렀다. 난데없는 말에 우영이 흠칫 시선을 들자, 고개를 살짝 기울인 그와 눈이 마주쳤다. 정적 속에서 그가 우영의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밑도 끝도 없는 행동에 말문이 턱 막혔다.

툭, 소리에 시선을 드니 엎어진 물잔이 보였다. 하얀 테이블 시트가 빠르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어……. 아……. 미안…….”

티슈를 뽑은 이수화가 상 위를 주섬주섬 닦기 시작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아주 놀란 모양이었다. 우영 또한 당혹스러운 눈으로 고태성을 보았다.

뭐 하자는 거지, 이 새끼. 커밍 아웃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3년 전부터 집착적으로 이수화를 질투하던 놈이었다.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머리론 이해가 갔으나 기분이 이상했다. 그야 게이가 끔찍하다고 욕하던 놈이 남 앞에서 제게 소유욕을 드러내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괜스레 열이 올라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가 원하는 건 명확했다. 이수화의 앞에서 선을 긋고 제게 이름표를 달아주고 싶은 듯했다. 고요했던 마음의 수면이 찰랑찰랑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생각을 마친 우영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 와서 더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나 얘 좋아해.”

적막 속에서 우영이 툭 내뱉었다. 놀란 이수화와 시선을 마주한 채로 고태성을 향해 까닥 턱짓했다.

“얘도 나 좋다더라.”

“…….”

“그래서, 그렇게 됐다. 놀랐냐?”

대수롭지 않은 표정과 천연덕스러운 물음에 이수화의 시선이 우영과 고태성을 차례로 스쳤다.

“……어……. 어, 아니.”

“뭐 그렇게 얼빠져 있고 그래. 왜, 너무 잘 어울려?”

우영이 장난스레 웃었다. 고태성은 먼저 일을 벌인 주제에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하여간 웃기는 놈이었다.

“자.”

우영은 연어를 포크로 찍어 고태성의 입 앞에 들이밀었다.

“먹여 달라며. 안 먹어?”

재차 포크를 들이밀자 고태성이 서서히 입술을 벌렸다. 그는 무슨 생각하는지 모를 얼굴로 가만히 우영이 주는 것을 느리게 씹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이수화로서는 난데없는 폭탄선언이었을 테니 당연했다. 혹여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잘…….”

작게 새어 나온 목소리에 우영이 시선을 들었다.

“잘 어울려. 잘됐다.”

이수화가 말간 미소를 머금고 저를 보고 있었다. 경멸 아닌 웃음기 어린 눈빛에 우영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 고맙다.”

조금은 초조했던 속과 달리 담담한 말이 튀어 나갔다. 걱정이 가시자 그제야 민망함이 몰려왔다. 고태성이 보는 앞에서 뜬금없이 고백한 꼴과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야, 너 손 멀쩡하잖아.”

우영은 화제를 돌렸다. 고태성을 바라보며 괜스레 나무라듯 말했다. 섹스할 땐 미친 듯이 움켜쥐고 난리 부르스를 떨더니, 고작 포크질 하나 못 한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아냐, 나 아파……. 아까 힘 많이 써서 더 아파.”

“엄살은…….”

그러나 퉁명스러운 말과는 달리 손은 그의 음식을 대신 썰어 주고 있었다. 그의 칼질을 바라보던 고태성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엄살 아닌데. 더 찢어진 것 같기도 하고……. 욱신거려.”

“……진짜야?”

“응.”

우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나이프를 내려놓고는 그의 손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하기야 몇 시간 내내 눈이 돌아 있었으니 상처가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디 봐.”

심각한 낯빛의 우영을 보며 고태성의 기다란 눈에 옅은 웃음기가 배었다. 이수화가 멍하니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끊임없이 이어지던 코스 요리를 끝낸 후 커피까지 마신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태성이 먼저 자연스레 지갑을 꺼내 들었으나, 이미 예약과 동시에 이수화가 계산을 마친 후였다. 그는 영 탐탁지 않다는 얼굴을 했으나, 언뜻 기분이 좋아 보이기도 했다.

“나 잠깐 전화 좀.”

핸드폰을 꺼내 든 고태성이 차츰 멀어졌다. 차를 가지고 온 이수화 탓에 앞에서 발레파킹을 기다리던 차였다.

“우영아, 좋아 보여서 다행이다.”

이수화가 가만히 눈을 맞춰 오며 말했다. 얼추 비슷해진 눈높이가 새삼스레 놀라웠다.

“그래 보이냐?”

“응.”

우영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괜스레 머쓱한 마음에 코끝을 찡그리며 시선을 돌렸다. 멀찍이서 전화를 받는 고태성의 모습이 보였다. 연예인이나 모델이라 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잘난 모습에 괜스레 제가 더 뿌듯해졌다. 사실 그를 보고 있는 지금도 이 관계가 믿기지 않았다.

“……맞아, 좋아.”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우영이 중얼거렸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고맙다……. 이래저래.”

고개를 든 그가 이수화를 응시했다. 선약에 난데없이 끼어든 고태성에게 불편한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은 것도 모자라, 오랜 친구, 그것도 남자끼리 사귄다는 말에 온전히 응원해 주는 그가 고마웠다. 이것저것 물어 올 법도 한데 그는 아무런 물음도 없었다. 참 이수화다운 반응이었다.

“아니야, 내가 고맙지. 내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해.”

담백한 음색이 이어졌다.

“친구잖아.”

눈이 마주치자 이수화가 살짝 웃어 보였다. 어쩐지 의연하고 말쑥하게 자란 모습에 묘한 감정이 치달았다. 눈물을 찔찔 짜 대던 걸 닦아 주던 게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 앞으로도 계속 내 친구 해 주세요, 부잣집 아들내미 씨?”

우영이 능청스레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그가 또 푸스스 웃었다.

“손님, 타시면 됩니다.”

어느새 발레파킹을 맡았던 직원이 다가왔다. 건너에 번쩍번쩍한 검정 세단 한 대가 서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수화가 아쉬운 얼굴을 했다.

“내가 데려다줘도 되는데.”

“됐어, 근천데 뭐.”

그의 차를 얻어 타고 가면 편했겠지만, 족족 싫은 기색을 내비치는 고태성을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다.

“들어가. 운전 조심히 하고.”

“응. 연락할게, 우영아.”

“오냐.”

고개를 끄덕인 이수화가 차에 올라탔다. 부드러운 배기음과 함께 잘 빠진 검정 세단이 미끄러지듯 출발했다. 우두커니 선 우영은 창문을 내리고 눈인사하는 이수화에게 손을 흔들었다.

“우영아.”

별안간 들려온 부름에 우영이 흠칫 고개를 돌렸다. 우영의 어깨에 손을 올린 고태성이 건조하게 속삭였다.

“눈을 못 떼네.”

“……뭐, 차가 존나 비싸 보이길래.”

“저 차 싸구려야.”

뜬금없는 유치한 말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련하시겠어요.”

이어지는 정적에 우영이 시선을 들었다. 눈앞에 고태성의 찌푸린 눈가가 보였다. 아무래도 또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싸구려 맞아. 내 차가 더 비싸.”

삐딱하게 하는 말에 우영이 소리 내어 웃었다. 호탕하고 낮은 웃음소리가 듣기 좋게 울려 퍼졌다.

“미친, 작작 하세요.”

“진짠데.”

웃는 이유를 알 수 없던 고태성이 가만히 우영을 응시했다. 머쓱하게 코끝을 찡그린 우영이 화제를 돌렸다.

“근데 너 차도 있었어? 면허는 언제 땄대?”

“옛날에. 내가 쟤보다 운전 더 잘할걸.”

“어떻게 알아.”

큭큭거리던 우영이 아무 생각 없이 답했다. 별안간 고태성이 멈춰 섰다. 고개를 돌리자 오묘한 눈빛이 제게 쏟아졌다.

“……지금 이수화 편드는 거야?”

비뚜름하게 기울어지는 얼굴에 우영이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어, 아니. 당연히 네가 더 잘하겠지. 너 존나 빨리 배우잖아. 그치?”

“……응.”

“씨발, 식겁했네.”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푹 내쉰 우영이 고태성을 힐긋 보았다. 장난인 줄도 모르고 세상 심각하기만 한 얼굴에 또 픽 웃음이 터졌다.

“야, 좀 걷자. 배부르다.”

팔을 뻗어 그의 손을 이끌고, 자연스레 걸음을 맞춰 발을 내디뎠다. 늘 함께 걷던 그 언젠가처럼 밤공기는 상쾌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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